입술
이명랑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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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0505)

허리춤에 칼을 꽂은 조련사들이 쓰레빠를 끌고 다니듯 여기저기로 코끼리들을 끌고 다녔다. 코끼리들의 배설물 위로 또 다른 배설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이국의 언어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어진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한 사내에게 붙박여 있었다.
… 최소한 자신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만은 ‘몰락’이라고 해도 될 만큼 초라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13쪽)쪽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지. 이해 못 하는 걸 무서워하는 인간과 이해 못 하는 걸 찾고 만들려 하는 인간."-(23쪽)쪽

일 달러를 벌려다가 뭔지도 모르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들, 그 소녀들의 몸과 그 소녀들의 연인과 그 연인의 아비와 어미와, 헐벗었으나 수천 년 동안 힘들게 지켜온 그네들만의 삶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는 일 달러에 대해 다른 사람 아닌 타이 한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진은 그 순간만큼은 타이 한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약기운이 아니라 부당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26쪽)쪽

마약에 취하거나 돈에 집착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결국은 모두, 더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뿐이다.-(33쪽)쪽

그러나 들썩이는 어깨와 토해내듯 ‘한국’이라는 말을 뱉어놓고는 그 말이 불러일으킨 파문에 휩싸여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목소리만으로도 어진은 알 수 있었다. 타이 한이라는 사람이 이 말을 얼마나 오래 참아왔는지를. 겉으로는 모든 것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타이 한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었다. 마약을 하거나 뚜쟁이 노릇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실은 실패와 후회로 얼룩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떠나간 시간을 저토록 아파할 수 있다면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36쪽)쪽

냄새는 묘사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냄새는 정직해서 은유와 상징으로 포장할 수도 없다. 냄새는 그저 발가벗는다.
(…) 너는 동굴 같아. 네 속으로 들어가면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까매져. 분명하던 것들의 윤곽이 흐려지고 어둠만 남는 거야. 그러면 이렇게 가만히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거야.-(42쪽)쪽

노트를 하나 마련해봐. 거기다 다 써버려. 쓰다보면 기억이 날걸? 네가 네 속에 숨겨놨던 것들이 너를 찢고 나올 거야. 다 받아 적어. 그리고 묻어버려.-(59쪽)쪽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그 아득함이 실제의 물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감이라는 사실에 나는 더 당황하고 있었다.-(69쪽)쪽

테이프를 되돌려 감듯, 지나온 삶을 되돌려 감을 수 있는 사람이란 그 인생에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한 사람, 그는 리와인드 버튼을 한 번 더 누를 시간마저 갖지 못했다. 설령 이제 누군가가 그를 기억해내어 그를 대신해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준다 해도 끝까지 돌다간 그의 테이프는 절대로 되감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 죽었으니까.
(…) 죽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변명일 뿐이다. 참회를 하고 눈물을 흘려도 여기, 살아 숨 쉬는 자의 참회와 눈물은 트로피를 거머쥔 승리자의 한때의 도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지금 내 뱃속에서 나를 쥐어뜯고 있는 저 정체 모를 통증……나쁜 짓을 한 것도, 내가 원한 것도,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불쑥불쑥 나를 찾아와 들쑤셔대는 저 통증……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익숙하면서도 매번 낯설기만 한 저 통증을 향해 나는 주먹질을 했다. 내 몸이 아파야 한다면 차라리 내 주먹으로 내가 내 몸에 멍을 만들리라.-(84~85쪽)쪽

모든 것이 0과 1로 단순화되는 디지털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한 주변인의 이야기란, 죽은 자에게 목덜미를 잡혀 자신의 삶으로 죽음을 대신해야 했던 영식이 아저씨의 이십 년 세월 앞에서는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1975년 4월 28일에 신체검사를 받았다는 한 남자의 생이 이쪽 원에서 저쪽 원으로 건너가고 있는 테이프를 매만지며 가짜와 진짜, 이쪽과 저쪽, 그 사이에서 소설의 자리는 어디인가.-(92~93쪽)쪽

"그대로 놔둬. 방이 환해지는 거, 뭔가가 이 방으로 들어오는 거 모두 귀찮아졌어."
(106) 방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은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다 나가버린다.-(103쪽)쪽

빛을 가로막고 있는 블라인드를 본다. 이제 저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는 일은 없을 거야. 상상 속의 고래가 늘 훌쩍 뛰어넘어가버리곤 했던 그 문턱을 본다. 방문은 닫혀 있다. 문은 꼭 잠겨 있다.
… 내 등에 그가 꼭꼭 눌러 새겨준 그 검은 글자들이 아프게 아로새기고 있는 무늬가 무엇인지 안다. 그는 지금도 날카로운 조각칼을 들고 어디선가 무늬를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120쪽)쪽

우리의 열아홉은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은 선물상자 같은 것이었지.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 속에는 ‘내일’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무엇이 들어있었어.

(…)아직 포장의 리본을 풀지 않았을 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어제 연필로 휘갈겨 쓴 영어 단어 위에 오늘치의 영어 단어를 붉은색 볼펜으로 휘갈겨 써 어제의 시간을 지워버리듯 선물상자 바닥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누군가 내 앞으로 부친,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그 선물상자를 앞에 놓고 나는 그 속에 들어있을 알맹이를 상상하며 상자 바닥에 밑그림을 그려 넣곤 했지.-(199~200쪽)쪽

나는 뒤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이제 막 사진액자의 네모난 틀 안에 붙박여버린 어떤 풍경을 지켜보았지. 인생을 둘러싼 모든 것들…… 화살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상처들마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 풍경은 내게는 너무나 낯설어서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단다.-(218쪽)쪽

밑동에서 조금 올라가다 제 몸을 기꺼이 반으로 나누어 땅을 향해 휘어 있는 저 나무라면 그 뿌리로 전설 하나쯤은 움켜쥐고 있을 법도 하지 않니?
너와 내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져버리게 된 곳, 그곳은 어디였을까?-(223~224쪽)쪽

길 양편으로 갈라져 서 있는 낡은 집들이 안개 속에서 길을 연다. 나는 그 길 위로 올라가 희뿌연 안개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그 무엇을 쫓는다. 그것은 손짓하는 듯도 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듯도 하다.
(…)공원은 쇠와 장구와 북과 징이 만나 얽히고 풀리고 맺히고 꿈틀거리는 소리로 깨어나고 있었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저리로 달려가서 이 지랄 같은 열기가 내 몸에서 다 빠져나갈 때까지 진저리치고, 뛰고, 날아올랐으면……-(254쪽)쪽

검은 땅에서 날아올라 하늘에 길을 내는 새, 강으로 흘러들어가 강 너머의 들판과 맞닿고, 돌을 뚫고 들어가 땅속에 더 너른 길을 예비하는 길……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찾아낸 길, 책을 뒤져 찾아낸 길들이란 저 살기등등한 바다 앞에서는 전부 무효였다.-(284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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