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05. 04) _ 밑줄 긋기를 위해 2004년 이후 오랜만에 꺼내 듦. 그래서 생일이 다가오면 기분이 묘해진다. 아직도 내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이를 새로 먹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역 앞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있는 듯한 기분.-(34쪽)쪽
열린 창문 너머로 높은 아파트 옥상에 올라타듯 떠 있는 둥그런 달이 보였다. 창밖을 내다볼 때면 나는 곧잘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으로 많은 사건들을 그린다. 바깥의 어둠에 비추어 내듯. (…)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절대 잊지 말자고, 내게는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떠올린다.-(41쪽)쪽
빛이 눈에 반사되어 지면은 밝은데, 뾰족한 잎 사이사이 풍경은 어둠에 갇혀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둠이 보였다. 이 먹색 같은 어둠이, 산의 밤 풍경 자체라고 생각했다. 점점 짙어지는 먹색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그 경치를 봤던 순간과 비슷했다.-(50~51쪽)쪽
"재미있고 없고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같은 말이라도 말투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글자도 그렇다. 너나 나나 모두 쓰는 언어가 나만의 언어가 되어 종이 위에 출현하는 것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53쪽)쪽
그의 등에 몸을 기대자 고동이 이중으로 들려, 마치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였다.-(82쪽)쪽
담 너머로 넒은 마당과 툇마루가 보이고, 마당에서 무슨 빛이 반짝반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손전등을 든 야나기 씨와 부인이 마당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윤곽을 잃은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해, 마치 두 마리 개똥벌레가 너울거리는 것 같았다.-(89쪽)쪽
곧바른 길이 계속 이어지는 데다 대부분이 언덕길이라 한없이 멀게만 보여 늘 우울했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지금, 이렇게 느긋하게 걸으니 전혀 다른 길 같았다.-(102쪽)쪽
그 후로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하고, 뜬금없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천천히 불안이 밀려왔다. 그때, 아니 그 이전부터 시간이 멈춰 있는 장소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16쪽) 험한 꼴을 당하면 당할수록, 언젠가는, 하고 기대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멀어질수록 머릿속에서 실상과 다른 모습이 제멋대로 형성된다. 많은 기억 중에서 희망을 낚으려 한다. -(115~116쪽)쪽
"어떤 말이든 내뱉고 나면 혼이 깃들어. 말에 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서도도 마찬가지지. 쓰는 순간 말의 힘이 종이 위에 살아나니까. 그리고 쓴 당사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122쪽)쪽
어둠에 익은 눈에 희미한 잔상처럼 그의 등이 비치자, 이대로 손을 목에 두르고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무방비한 상태로 자고 있는 그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를 흔들어 깨워, 이렇게 쉬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서 무슨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정말 망가진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웠다. 눈을 감자 폭도 깊이도 없는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 낀 보일락 말락 한 틈새로 새로운 어둠이 퍼졌다.-(138쪽)쪽
나는 이제 아무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벌써 오랜 옛날에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물론,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다.-(145쪽)쪽
"가끔은, 무서워." "무슨 말이야?" "모든 것이, 하나같이 전부. 오늘 자고 나면 내일 아침 아르바이트, 인파, 따분한 평일, 잠들기 전, 전부." "그런 때는 어떻게 하는데?" "죽은 것처럼 눈 꼭 감고 참아. 그러면 언젠가는 지나가니까." "왜 무섭다고 말 안 하는데?" "말로 하면 분명해지니까. 한 번 말이 된 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160~16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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