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품절


다리 너머로 보이는 브리즈번의 다운타운 야경은 손에 쥐고 있던 잔별들을 한꺼번에 쫙 뿌려버린 것처럼 곱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 광경이 늘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쳐다보자면 현기증이 날 듯한 높다란 빌딩들과 하나도 꺼지지 않고 불이 켜져 있는 창들은 가끔 나를 질리게 했다. 아무리 저 빌딩 사이에 내가 근무하는 직장이 있고 다운타운을 벗어나 십여 분만 더 걸어가면 내가 몸을 누일 수 있는 아파트가 있다고 나를 위로해도 나는 여전히 이방인인 것만 같았다.-(42~43쪽)쪽

때로 사진은 손바닥 안에 담은 물 같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아껴가며 모아둔 기억의 뭉치들. 물처럼 흐르는 세월 한 움큼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떠낸 그것 안에서 나는 종종 웃고 있기도 했고, 종종 외롭게 무표정하기도 했다.-(43쪽)쪽

오빠의 손 안에서 조약돌처럼 웅크린 윤지의 손. 저 손들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들만의 소리를 생각하며 나는 나대로의 소리를 들었다. 나에게만 들릴 푸시싯, 한숨 소리. 철대문을 둘러싼 낮은 담장 너머로 붉은 해가 이울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또 어떤 일들이 생겨날지 몰랐다.-(55쪽)쪽

모호한 것들이 일순간에 확연한 진실이 되어 머리를 때릴 때가 있다. 어렵고 난해한 정사각형 큐브가 문득 한 꼭지를 잘 돌려 맞추면 싱겁도록 단순해지기도 하듯이 말이다.-(59쪽)쪽

나를 기억한들 기억하지 못한들 지금에 와서 그것이 중요할 턱이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없다지 않은가. 내가 사랑했던 자매와 오빠 혹은 나의 옛애인들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모든 것이 오해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64쪽)쪽

나는 다리 사이의 낯선 통증을 참느라, 귀를 간질이는, 나에게만 들려오는 낮고 음산한 음악 소리를 지우느라 밤새 부산했다. 지극히 사사로운 시간이었다.-(90쪽)쪽

부서진 조각들은 너무 멀리 날아가고 흩어졌다. 그것들이 남기는 인사들만 귀엣말처럼 나를 여전히 간질이고 있었다.-(93쪽)쪽

"단것들은 기억을 희미하게 해줘.
피로하고 아픈 것을 잊게 해준다는 거야."-(108쪽)쪽

이 도시의 풍경 대부분이 우리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검은 강물 안 깊은 속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몰라도 내 눈에 보이는 표면은 늘 고요했다.-(116쪽)쪽

(---) 연탄 불구멍 같았어. 젖은 걸레로 불구멍을 틀어막으면
쉬이 잦아들지만 조금 따뜻해지자고 불구멍을 열어버리면,
또 활활 타버리는 거야.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전쟁 같았어."-(117쪽)쪽

보도블록 사이를 메웠던 흙들이 빗물에 뭉개지고 있었다. 저 아래, 젖은 흙 아래에는 어떤 영혼들이 묻혀 있을까. 리는 쥐와 개미와 도마뱀을 떠올렸다. 그쯤에서 생각을 그치려 했건만, 이미 죽어버린 쥐와 개미와 도마뱀 사이에 함께 누운 자신의 얼굴이 자꾸 눈가를 헤집었다.-(149쪽)쪽

기억은 거꾸로 돌아가는 비디오 테잎처럼 너그럽게 시간을 되짚어주었다.-(172쪽)쪽

지나간 시간의 대부분은 왜곡이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혹은 그 시간들이 가여울 때가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이 나를 자꾸 간질였다.-(179쪽)쪽

(…) 그 안에 숨죽여 누웠던 어린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다 파내어진 채로 먼 곳으로 실려가 조각 날 것이다. 그 전에 두 아이가 먼저 캐비닛의 먼지 섞인 어둠을 잊을까.
(…) 발을 헛디딘 밤이 몇 번이나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211쪽)쪽

자루에서 푸른색 사과들이 굴러나왔다. 몇 개는 그들의 발에 밟히고 몇 개는 이불 속에서 뭉개졌다. 몇 개는 나에게로 굴러왔다. 나는 푸른색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알이 작은 사과는 매끄러웠다. 한 입 베물면 새큼한 물이 입 안 가득 고일 것 같았다. 나는 목이 말랐다.-(249쪽)쪽

울컥울컥. 내 위는 걸레처럼 비틀어지고 있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에 맥이 풀리면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입에서 흘러나온 포도주가 내 귀를 막아주었으면. 흐르고 흘러서 내 귀를 출렁출렁 채워주었으면.-(256쪽)쪽

선수들이 손바닥으로 공을 바닥에 내리꽂을 때마다 가슴이 차갑게 발랑거렸다.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칠 수 없는 속도들, 나는 그것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260쪽)쪽

사과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 삶이 멈춘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적포도주를 다시 마시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될 리는 없으므로.-(257쪽)쪽

한번만 더 말을 아끼면 내가 이기는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헤픈 말은 미련을 만들고 미련은 슬픔을 만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슬퍼지는 사람이 지는 거니까. 나는 엄마처럼 뒤에서 슬퍼지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알레르기는 짐작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병원균은 도처에 숨어 있었다.-(262쪽)쪽

그의 말처럼 알레르기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몰랐다.
성장통처럼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버릴, 통과의례 같은 것.-(265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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