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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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이 시를 듣고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 내가 접해본 그 어떤 시도 이렇게 가슴 정중앙에 과녁 꽂듯 툭, 하고 박히지는 않았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로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 황지우였다.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피는 꽃이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제 스스로 꽃잎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종교, 정확히 말하자면 불교적인 교리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꽃이며 석가탄신일에 절마당 가득 달린 연등의 모습은 신성하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갯펄을 뽈뽈거리며 기어다니는 게, 무작스럽게도 간장 게장이 생각나 입맛을 다시는 나같은 독자에게 '게눈 속의 연꽃'이라니.

'너를 기다리는 동안' 때문에 사버린 시집이었는데, 늙은 아내에게 소근소근하는 듯한 시와, 담뱃갑의 경고를 보며 뻑뻑 담배를 피워대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흐뭇했다.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시보다는 시인의 개인적인 경력 때문에 호감이 가는 황지우였지만, 역시나 그의 툭 던지는 듯하면서도 유려하게 흐르는,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시어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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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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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진실은 인간을 괴롭게 한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따위에서 희화화된 인간을 보면서는 희희낙락, 즐거워하며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을 테지만 정말 진지한 자세로 인간이 처해 있는 현 상황을 응시하다 보면,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샤워꼭지에서 나오는 살충제를 온몸으로 맞으며 파리나 모기처럼 죽어간 대학살의 이야기가 고작 한두 세대 전 일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쭉 끼치고 말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뇌와 성기가 가장 크다는 인간이 맨 처음 직립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유구한 문명이라는 것이 고작 그런 정도의 수준이라니. 진실은 인간을 괴롭게 하고 함몰된 역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쥐>는 두 개의 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버지 블라덱이 들려주는 아우슈비츠까지의,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만화를 그리는 아트와 아내 프랑소와즈, 블라덱과 재혼한 아내 말라 간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이다. 대개 하나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생존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군요' 하는 해피엔딩으로 얼버무려지기가 일쑤이지만, 블라덱이 고집불통에 구두쇠 노랑이, 인종차별적인 늙은 유태인이 되어 별의별 자잘한 것들에 대해 아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모습은 실소와 함께 독자에게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해 준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 블라덱의 아내 아냐가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말없이 자살하게 된 것, 그녀의 가슴 가장 밑바닥에는 아들을 잃고 수용소에서 살아남고 나서도 극복되지 못한 무언가가 늘 응어리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쥐>에는 다양하고도 뛰어난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는데, 아무래도 나는 전문가가 아닌지라 그런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다만 그림이 매우 독특하다, 고만 생각했었다. 단순히 독특하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붉은 색 표지에 흘러내리듯 쓰인 '쥐'라는 글자는 섬뜩하기조차 했다. 그리고 빼곡이 들어찬 쥐들. 줄무늬 죄수복을 입고 별을 달아야 했던 유태인들을 쥐로 묘사했다는 것, 그리고 독일인들은 고양이가 되어 있는 것. 그저 먹고 먹히는 천적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려니 생각하다가 책의 몇몇 부분에서 나는 무릎을 탁 칠만큼 감탄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도 간첩을 꼬리가 살짝 삐져나온 쥐로 그려서 지하철 곳곳에 안보 광고를 붙여놓지 않던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폴란드인(돼지)인 척하는 모습은, 정말 <쥐>라는 제목 속에 함축된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반전이라고까지 이름붙이기엔 뭣하지만 아냐가 유태인인 것을 들킬까봐 불안해 하는 장면과 블라덱이 폴란드인인 것처럼 짐짓 태연하게 행동하는 장면들은, 이 끔찍한 이야기가 왜 굳이 만화라는 장르로 이야기되어야 했었는지 확연하게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짧은 콧수염을 붙이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던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속 히틀러와는 또다른 강한 충격이다.

똑같이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저 협잡꾼에 가까웠던 한 사내가 셀 수 없는 인명을 구하는 회색톤 이야기와 아들을 위해 전쟁마저도 코미디(comedy,희극)으로 돌변시키는 위대한 부정의 이야기라는, 깊은 간극을 지니고 있었다면 <쥐>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이야기이다. 마치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이 그랬듯. 진실은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 결코 진실 그 자체를 재현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이니까. 그러나 이토록 생생하게 과거를 전달해주고 현재를 잊지 않는 작가가 있는 한, 결국 인간은 가장 잔인한 짐승일 뿐이라는 슬픈 진실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이라는 낙인을 이마에 찍고 늘 되새김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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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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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이라는 수식어는 함부로 붙일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고의' 라는 찬사보다도 까다롭게 제 뒤의 주어를 선택하는 단어, 취향의 다채로움과 다양한 지식적 깊이와 넓이를 감안하고서 나오는 '썩'이라는 말, 아무튼 이 책은 그 수식어가 썩 어울릴 정도로 아주 유쾌하게 잘 만들어진 책이다. 번역상의 문제가 지적되기는 했지만(한자로 써주면 간단히 이해될 단어를 굳이 일본어로 길게 풀어썼다는 점 등) 전반적으로 한 학기분의 강의록답게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유연하고 일관성있는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요즘 시대에도 왜 신화가 유효한지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 역시 우물 안 개구리식의 독선이 아니라 설득력있는 문장으로써 다가온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도 재미있고, 칼 융의 <인간과 상징>도 해박하고 풍성한 지식의 장에서 꿈과 신화,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상징을 읽어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만, 어딘가에 걸터앉아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보통의 책보다 약간 작은 듯한 느낌의 판형과 노란색과 검정색으로 이루어진 표지도 깔끔하니 손 안에 쏙 들어와 마음에 든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신화적 요소를 빠짐없이 추출해냈다는 점에서, 얼마 전 나온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의 '손이 없는 소녀' 이야기에 낯설어했던 독자라면 더더욱 강력히 추천한다. 특히 신데렐라 이야기의 또다른 버전인 미크마크 인디언족의 이야기는 그 원형적 신화의 완전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골치 아프게 신화를 파고들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지만,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드는 사람이 읽는다면 책을 덮는 순간에 '썩' 만족스런 마음이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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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 - 매트릭스의 철학 매트릭스의 과학
글렌 예페스 엮음, 이수영·민병직 옮김 / 굿모닝미디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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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 주간 베스트 18위 정도 되는 책의 첫 리뷰어가 될 줄이야.

[매트릭스]의 매력은, 사실 영화 관객보다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다는 데에 있다. [매트릭스]만 본 사람들은 그리 시끄럽지 않다.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 이상의 것을 보려는 사람들은 다들 모여들어 와구와구 한 마디씩 하는 데 바쁘고, 이 책도 어쩌면 그 틈바구니에서 마침 생성된 부산물 같은 거다. 매트릭스 3:레볼루션의 전세계 동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더욱 깊이있고 푸짐한 감상을 위해서 혹시나 한 번쯤 읽어볼까나, 하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자신있게 말린다. -_-;

슬라보예 지젝 방한 후 그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져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의 인기도 살짝쿵 올라갔으리라 짐작되지만, 처음 이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가 너무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탓에 슬라보예 지젝이 엮은 저 책은 거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물론 이것은 메이저 언론에 국한된 얘기다,독자들의 선택은 다를 것이므로) 아, 역시나 알라딘에서는 <매트릭스로..>가 3위에 올라있는 것 같다.

아무튼 책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독자는 마치 빨간 알약을 먹을까 파란 알약을 먹을까 고민해야 하는 그들처럼 두 권의 책 중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지도 모르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제대로 된 '아젠다' 하나 세우지 못하고 조각배처럼 망망대해를 한없이 떠도는 산만함이다. '단 한 편의 글밖에 읽을 시간이 없다면 이 글을 읽어라' 라고 권하는 맨 첫번째 글을 읽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마치 내가 시간을 일부러 죽이고 있는 양, 시간이 아까워진다. 음. 내가 왜 이 글을 읽어야 하는 거지?

이런 류의 책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깊이 아니면 재미인데, 어느 쪽도 제대로 일궈내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도 굳이 칭찬할 거리를 찾자면 맨 앞에 실린 글은 그나마 매트릭스에 대한 분석적 시각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정도의 흥미와 수준을 보여주는 글이 그 한 편 뿐이라는 점. 뒤로 갈수록 점점 필자들은 초점을 잃어가고, 매트릭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갑자기 우리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신중한 검토로 이어져 어처구니가 없다. 결국 모든 작품의 완성도는 한 끗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한 끗'은 결코 넘을 수 없을 육중한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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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완전판)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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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쥐덫>을 읽고 나서 두근두근하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열 두어살에 만난 루팡은 핸섬하고 '괴도'라는 별명에 걸맞게 금지된 욕망의 실현인 듯 내 속에 꾹꾹 눌러 감추고 싶은 인물이었고, 그보다 후에 만난 홈즈는 뭉툭하고 단단하고 차가운, 흡사 지포 라이터처럼 정확하고 명료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음울함에는 마력이 있었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 모두와 달랐다.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또렷한 눈동자를 뜨고 있었다. '범인은 이 중 하나야!' 라는 말은 <소년탐정 김전일> 류에서 너무 많이 리바이벌되어 이제는 되려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한 플롯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 폐쇄성과 밀폐된 공간에서의 심리적 긴장을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인다. 확실히 그녀는 즐기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공간과 시간들은, 단지 하나의 사건을 위해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주체'로서 작용한다. 그래, 아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살인은 들러리일 뿐, 사건 자체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는 듯한 섬뜩함,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자유로운 의지로 행동할 수 없다. 다만 모든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로 약속된 듯 정확하게 톱니바퀴를 맞추며 시간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한 명씩 한 명씩 죽어나가다 종국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김전일이 죽는다니,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그리고 '통상적이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틀을 훌쩍 넘어 그녀는 단 한 편의 에필로그로 이 모든 사건을 깔끔히 정리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오른쪽에 남은 종이의 분량은 거의 바닥을 향해 가는데 도저히 범인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뭐든 범인이 밝혀지면 사건이 끝나는 숱한 이야기들에 너무 익숙해진 터라, <쥐덫>의 새파랗게 젊은 경사처럼, 품위있고 교양있는 베라를 끝까지 주시하던 나는 그녀가 목을 매달아 버리는 순간 허탈한 한숨을 쉬어야 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진정성은 물론 정교하고 잘 짜맞춰진 구성에 있지만 그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 묘사는 여지껏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독특하고 섬세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가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영국 여왕에게 Dame 작위를 받은 이 깐깐하고 꼿꼿한 여인은(-그런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책날개에서 본 나는 약간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깐깐하기보다는, 무척 푸근한 인상이었다.) 인물들 하나하나의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고 독자에게 전해주며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질식할 듯한 압박을 느끼다가도 다시 처음부터 책을 읽어보면 그녀가 곳곳에 심어놓은 씨앗들이 어떻게 싹을 틔워올리고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 아름드리 나무와 같이 성장하는지에 다시 한 번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들고 탈탈탈 아무리 털어보았자 불필요한 단어 하나 삐져나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슬프게도 흥미 위주와 깊이 위주의 소설이 난립하여 섞여드는 요즘, 제대로 된 추리소설은 읽기가 힘들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인화가 <영원한 제국>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와 같이 날카로운 필치로 인간 내부 깊숙한 곳의 욕망과 죄의식을 건드린 작가는 단연코, 없다. 그것은 물론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 혹은 스타일의 문제겠지만, 아무튼 애거서 크리스티 이후로는-그리고 이전에도, 감히 그녀와 같은 영역에 손을 대본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히 고전이 갖는 의미 이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체 이 이야기에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으면 세상 어떤 추리소설에 별을 준단 말일까. 아니, 과연 별 다섯 개로 충분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 독자를 완벽하게 농락하는 이 탁월한 작가에게 오히려 별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나 아닐까, 하는 걱정 반 존경 반으로 어쨌든 최고의 별점을 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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