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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때로 진실은 인간을 괴롭게 한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따위에서 희화화된 인간을 보면서는 희희낙락, 즐거워하며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을 테지만 정말 진지한 자세로 인간이 처해 있는 현 상황을 응시하다 보면,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샤워꼭지에서 나오는 살충제를 온몸으로 맞으며 파리나 모기처럼 죽어간 대학살의 이야기가 고작 한두 세대 전 일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쭉 끼치고 말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뇌와 성기가 가장 크다는 인간이 맨 처음 직립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유구한 문명이라는 것이 고작 그런 정도의 수준이라니. 진실은 인간을 괴롭게 하고 함몰된 역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쥐>는 두 개의 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버지 블라덱이 들려주는 아우슈비츠까지의,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만화를 그리는 아트와 아내 프랑소와즈, 블라덱과 재혼한 아내 말라 간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이다. 대개 하나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생존자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군요' 하는 해피엔딩으로 얼버무려지기가 일쑤이지만, 블라덱이 고집불통에 구두쇠 노랑이, 인종차별적인 늙은 유태인이 되어 별의별 자잘한 것들에 대해 아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모습은 실소와 함께 독자에게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해 준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 블라덱의 아내 아냐가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말없이 자살하게 된 것, 그녀의 가슴 가장 밑바닥에는 아들을 잃고 수용소에서 살아남고 나서도 극복되지 못한 무언가가 늘 응어리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쥐>에는 다양하고도 뛰어난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는데, 아무래도 나는 전문가가 아닌지라 그런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다만 그림이 매우 독특하다, 고만 생각했었다. 단순히 독특하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붉은 색 표지에 흘러내리듯 쓰인 '쥐'라는 글자는 섬뜩하기조차 했다. 그리고 빼곡이 들어찬 쥐들. 줄무늬 죄수복을 입고 별을 달아야 했던 유태인들을 쥐로 묘사했다는 것, 그리고 독일인들은 고양이가 되어 있는 것. 그저 먹고 먹히는 천적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려니 생각하다가 책의 몇몇 부분에서 나는 무릎을 탁 칠만큼 감탄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도 간첩을 꼬리가 살짝 삐져나온 쥐로 그려서 지하철 곳곳에 안보 광고를 붙여놓지 않던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폴란드인(돼지)인 척하는 모습은, 정말 <쥐>라는 제목 속에 함축된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반전이라고까지 이름붙이기엔 뭣하지만 아냐가 유태인인 것을 들킬까봐 불안해 하는 장면과 블라덱이 폴란드인인 것처럼 짐짓 태연하게 행동하는 장면들은, 이 끔찍한 이야기가 왜 굳이 만화라는 장르로 이야기되어야 했었는지 확연하게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짧은 콧수염을 붙이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던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속 히틀러와는 또다른 강한 충격이다.
똑같이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저 협잡꾼에 가까웠던 한 사내가 셀 수 없는 인명을 구하는 회색톤 이야기와 아들을 위해 전쟁마저도 코미디(comedy,희극)으로 돌변시키는 위대한 부정의 이야기라는, 깊은 간극을 지니고 있었다면 <쥐>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이야기이다. 마치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이 그랬듯. 진실은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 결코 진실 그 자체를 재현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이니까. 그러나 이토록 생생하게 과거를 전달해주고 현재를 잊지 않는 작가가 있는 한, 결국 인간은 가장 잔인한 짐승일 뿐이라는 슬픈 진실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이라는 낙인을 이마에 찍고 늘 되새김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