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7시에 떠나네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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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을 좋아하는 것은 조금 괴로운 일이다. 나 말고도 그녀의 문체만이 가진 매력에 흠뻑 젖은 이가 너무 많으며, 그에 대한 찬사와 비평적 해석 등은 차고 넘치며, 또 가끔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빈정거림을 만나는 일도, 모두 괴롭긴 매한가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신경숙이 '나의' 신경숙이 될 수 있으며, 혼자 골방에 숨어 책을 읽는 듯한 비밀스러운 쾌감은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이미 환하디 환한 서점에 작가용 코너까지 만들어져 빽빽히 꽂힌 그녀의 소설들은 도리어 나에게 소외감을 안겨준다. 그러니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가장 좋아하는 신경숙 소설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보다는, 가장 정을 많이 주고 정이 든 소설이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것이다.

사실 신경숙 문체의 묘미는 단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대개 그녀는, 이라고 시작되는 그녀의 이야기들은 지지부진하지 않으면서도 한없이 느리고 구질구질한 신파조가 아니지만 애틋하게 슬프다. 딱, 발등이 젖을 만큼만 물 속에 들어간 느낌. 독자를 그렇게 인도한 신경숙은 차근차근 머리를 빗겨주는 듯한 세심한 손길로 이야기들을 풀어 나간다. 그리고 아, 그랬구나, 그렇게 되어버렸구나, 하는 결말이 뚝 끊겨 버리는 단편에서 우리는 담궈 둔 발도 미처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여운 속에서 헤매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편 소설은 조금 유치하고 촌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 아무래도 서사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그녀의 문장들은 특유의 맛깔스러운 향을 지니고는 있지만 군데 군데 서툰 바느질 솜씨처럼 어색한 봉합이 눈에 띈다. 우울한 시절에 학생들이 매달렸던 어떤 운동은 너무 추상적이고 친구가 자신의 남자친구의 아이를 밴 것을 알고 손목을 그어버린 '미란'은 좀 생뚱맞은 캐릭터다. 비밀스러운 암호였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도 어딘가 좀 낡은 파편으로 남아, 기억을 되찾아가는 하진의 여정은 너무 심각하게 생략되어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생각할 때마다 내게 가슴 한 구석에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는,이 이야기가 너무 별볼일없고 수준 미달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 힘들 때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얼마나 얼마나 노력했던가. 사실 이 책 속의 하진은 억세게 운이 좋은 여자이고, 대부분 우리는 잊었다는 사실까지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도 언제까지 잊어야 하나,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 한다. 일어날 일을 미리 알게 되는 하진의 능력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 예지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과거 기억 일부분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는 설정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향 노루.

아내가 죽고 나서 집 안으로 들어온 사향 노루를 부부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키우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죽음도 다시 볼 수 있게 된 하진은 옛적에 잃어버렸던 아이에게 말한다. 난 한 번도 널 잊어본 적이 없단다. 그건 참으로 슬픈 고백이다. 어머, 기억을 잃어버렸다며? 하고 코웃음을 칠 수는 없다. 다 잊었어, 라고 씩씩하게 얘기할 때조차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잊지 못했으며 다만 달라졌을 뿐이라고. 그 시절의 희망과, 사랑과, 미움과, 슬픔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정이 많이 든 소설이라 마지막으로 읽은 지 참 오래되었다. 어쩌면 다시 만나는 하진과 미란은 내 기억과는 영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기억을 되찾아가고, 되찾아갈 여정들은 그녀들만의 소유가 아닐 것이므로 언젠가 다시 책을 펴들 때 나 역시도 천천히 나의 옛날을 기억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 어딘가,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나쁘게 살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하고 믿으면서. 기차가 7시에 떠난다는 비밀을 함께 공유했던 그 사람들의 안부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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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
조갑상 지음 / 세계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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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라는 남자가 별거 중인 아내의 사망 소식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이제 아내와 헤어지기 전의 이야기를 띄엄띄엄 기억해내겠다고 했을 때,나는 이제 겨우 몇 장 넘어간 책을 슬프게 바라보며 아,지루하겠다,라고 지레 겁먹었었다.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는 1년 내내 뼈빠지게 소에게 풀을 먹이고 키우고 직녀는 베를 짜고 칠석날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다던 그들.비극적 연인의 대명사인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훨씬 더 처절한 것이 견우직녀 설화이다.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으로써 하나로 묶여 올라가 저승에서나마 알콩달콩 잘 살았을지도 모르고 혹은 환생해서 각자 다른 남녀와 눈맞아 생을 꾸며갔을지도 모르지만,견우와 직녀는 끝나지 않는 사랑을 형벌처럼 지고서도 그들 사이에 은하수가 있는 한 변심할 수가 없다.건널 수 없으되 건너야 하는 그 깊고 깊은 골의 존재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은 무한(無限)한 사랑에 짓눌려 있다.

김창기를 축으로 소설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아내 안성혜,내연의 관계인 이선재,[여자] 정희옥.특이하게도 이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내내 성(姓)과 이름을 완전히 구비한 채 나타난다.안성혜는,김창기는,하며 딱딱하게 서술되는-그 누군가의 틈입도 허여(許與)치 않는 듯한 철저한 냉정함에 괜히 머쓱해진다. 유일하게 창기의 입을 통해 선재는,이라고 이름만이 호명되는 여자는 그 대신에 모호함과 흐릿한 실루엣으로서만 존재한다.고작 '상가(喪家)집의 화투' 정도의 핑계거리밖에 될 수 없는,불확실한 정부(情婦).그럼 아내는 어떨까?

불륜 사실을 알고 나서,마주앉아 얘기하자며 방석을 놓고 남편을 부르는 안성혜는 남편이 비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하나 있던 아들을 유치원 때 사고로 잃고 성적(性的) 장애에 시달리는 성혜는 늘 결핍 상태인 부부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아들의 방을 남편에게 주며 그녀는 빈 방의 결핍에서는 벗어났지만,부부 간의 각방은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을 그들에게 남기고 마치 부정교합처럼 부부는 어긋나 버린다.창기와 성혜의 첫딸인 수명이 윗턱과 아랫턱의 크기가 달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부정교합을 가진 것은 그러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지하철 승강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반대편 승강장을 바라볼 것이며 그리고 그 반대편에 웬지 마음이 끌리는 이성(異性)이 서있는 것도,있을 법한 설정이다.그런데 창기는 생각한다. 차가 들어오기 전에 저 두 가닥의 나란한 선로를 훌쩍 뛰어넘어 저 예쁜 여자 옆에 설 수 있을까.그러다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지 않은가.어쩌면,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해서가 아니라,안 된다고 안 될 거라고 스스로 거는 자기 최면 때문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건널 수 없음 때문이 아니라 건너지 않음으로 해서만 온전하게 유지되는 사랑의 아이러니를.

그 [여자]를 잊기 위해 스무 살의 창기는 낯설기만 한 월남으로 떠나고 살아돌아가면 영원히 사랑하리라,라고 다짐도 했지만 월남에서 돌아온 그의 겁탈로 [여자]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대신 말기 암이라는 죽음의 경고음을 길게 울리며 잠시 그를 스쳐지나갈 뿐,창기는 그녀의 막내 아들이 자신의 핏줄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그림이 없는 벽면을 보듯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니 이 현실 세계에 까막까치가 머리통 터져가며 놓아주는 오작교 따위는 없는 것이다.다만 이 이별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이쪽에서 소를 먹이고,저쪽에서 베를 짜는 숱한 견우와 직녀만이 존재할 뿐.내가 지루할까 봐 겁먹었었단 이야기를 썼던가? 이 소설은 짱짱하고 잘난 척하는 문장력과 세심한 플롯 없이,사랑 자체에 대해 그저 맨몸으로 사유하는 이야기이다.그러니 가엾은 사랑을 빈 집에 가두고 떠난 이의 훗날을 알고 싶은 이라면 조심히 펴보아도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의 요즘 형편은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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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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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을 거진 다 읽어갈 즈음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학교에서는 훌륭한 문학에 대한 아무런 길잡이도 되어주지 않는 걸까? '문학'이니 '독서'니 하는 과목이 실상 '언어영역 대비'라는 거창한 목표에 이미 휩쓸려 버린, 명목 뿐인 과목들이라는 것을 학교를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제도권에 어려움없이 안착하기 위해서는 고작해봐야 5-6문제가 묶여 나오는 한 지문을 얼마나 빨리 읽고, 얼마나 빨리 오답을 찾아내느냐가 중요할 뿐,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이나 문체의 유려함 따위를 감상하려고 하는 순간 이미 도태되어 버리고 만다.

왜 고등학교에서는 책을 읽어라, 책을 많이 읽어야 언어 영역에 유리하다고 하면서도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얘기해 주지 않는 것이며, 왜 서울대학교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루소의 <에밀>이나 이문열의 <삼국지> 같이 재미없는 소설을 읽으라고만 강요하는 걸까. (물론 <삼국지>는 즐거웠지만,<에밀>을 읽으면서는 정말 눈물이 글썽해지며 토할 것 같았다.) 그러니 <호밀밭의 파수꾼>이 무슨 시골의 마음씨좋은 농부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나의 무식함만 너무 탓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홀든 콜필드. 일단 주인공의 작명은 소설가에겐 아주 뼈아프게 중요한 것이다.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은 곧 소설에서 버림받게 된다. 그리고 내내 물 위의 기름처럼 뱅뱅 돌다가 독자들에게 쓰거운 맛만 남겨주고 책을 덮는 순간 죽어버릴 뿐이다. 그러나 이름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주인공은 책을 덮는 순간 책 밖으로 걸어나와 읽은 이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 번씩 말을 건네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홀든은 후자였다. 완벽한 후자.

샐린저의 유머 넘치는(블랙 유머 쪽이지만) 문체는, 우리 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뛰어난 입담'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잡다한 수다 속에서 홀든은 꾸준히 서사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홀든의 행동들은 스스로의 부박한 영혼을 드러내 보이며 동시에 우리 주위를 둘러싼 숨막힐 듯이 어이없고 삐뚤어진 세상을 까발리고 있었다. 당연시되는 모든 안전한 것들, 그리고 퇴학이나 맞고 다니는 한 불량한 문제학생의 낙인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홀든은 여지없이 깨부숴주었다. 이 책을 통틀어 홀든만큼 순수한 영혼이 있을까. 아, 여동생 피비가 있구나. 그리고 홀든의 죽은 동생 앨리. 홀든 말대로, 죽었다고 해서 좋은 것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이 주위의 산 사람보다 오십 배쯤 뛰어날 때는 더더욱.

왜 이 책을 진작 읽지 못했을까, 후회가 된다. 빌어먹을 언어 영역. 수능에 낼지도 모르는 작품 목록을 이런 소설을 꼭 포함하여 한 3백 권쯤 내 주면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은 전부 읽어낼 것이다. 그렇게 좀 하면 안 되나. 어떻게든 내 동생 세대들에게 꼭 읽혀야 할 책이다.

아이들이 절벽으로 달려갈 때 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리라, 는 홀든의 말과 피비가 끙끙거리며 들고 온 여행 가방이 진부하고 유치하게 감동적이었다면 나는 화가 났으리라.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다시 퇴학맞을 학교로 돌아가는 홀든의 이야기, 그의 의식을 따라간 며칠의 이야기는 대개가 웃기고,때때로 어처구니없었으며 황당했지만,그러나 조금쯤 슬펐다. 홀든에게 파수를 맡길 호밀밭은 아무데도 없는 걸까. 너무 오랜만에, 별 다섯 개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소설을 읽어서 가슴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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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포포 투게더
심승현 지음 / 홍익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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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진다. <파페포포> 시리즈 두 권이 엔간한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1위를 확고부동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면 더욱 그렇다. 대체 나의 감성은 대한민국의 저 수많은 젊은이들과는 아예 동떨어져 버린, 엽기적이거나 선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인가? 그러나 나를 가만히 보자면 무엇보다 '대중적'이라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알고 보면 늘 남들도 좋아하는 것임에 틀림없는 평범한 사람에 분명한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대중적인데, 대중적인 것들 중에는 내가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도 분명 많다. 그래, 이렇게 생각하니 좀 낫다. 나는 무언가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 은 아닌 것이다.

사실 <파페포포 메모리즈>를 보면서는 약간 흥에 겨웠다. 흠, 그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부분이 좀 많았단 뜻이다. 그래, 그랬었지, 라고. 어떤 신문은 너무 순진하고 맑기 때문에 약간 닭살이 돋을지도 모른다고 썼었지만, 그보다는 매우 '표면적'인 감정의 물결만 일으키기 때문에 수면의 진동이 너무 약하다는 얘기가 적절할 듯 싶었다. 그러나 그건 사실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국화꽃향기>에 엉엉 울 수 있다면, 그리고 지나간 자신의 추억을 되씹으며 대입시킬 수 있다면, 아무리 약한 파동이라도 결국은 징징징 진동되어 가슴 속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진동의 강도가 아니라 진동의 유무이다. 가슴 가장 바깥쪽의 표피도 건드리지 못하고 스러져간 그 지옥같이 유치한 숱한 이야기들을 기억해 볼 때 말이다.

그런데 <파페포포 투게더> 속에서 나는 그런 몇 번의 주억거림조차 잃어버린 채 매우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본 것은 전편의 성공에 안주하여 똑같은 이야기에 3D라는 새로운 조미료만 넣어 버무린 젊고 무성의한 작가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전에 넣었던 맛깔스러운 재료들은 약간 쉬어 있었는 것 같았다. 유효 기간이 지난 것이다.

아무튼, [소중한 것을 뺏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흔하디 흔하고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단 한 번 조심스레 꿈지럭거렸을 뿐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가슴에 진동을 느끼고 있을까? 돌기처럼 가슴 곳곳에 난 추억들이 반응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얼마나 딱딱하고 무딘 가슴을 지니고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뭐, 좋다. 이건 정말 선물로도 못 줄 책이군, 하고 휙 던져버림으로써 나는 내 할 일은 다한 셈이다. 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그래도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따위가 1위라면 그것도 나름대로 슬픈 노릇일 거다. 세상에, 굴 따위를 낳고 먹어치우는 얘기가 실린 책을 읽고 낄낄대며 좋아하는 감성의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나라는 정말이지 소름 끼친다. 그러니 차가운 음료수를 먹이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사오는 갸륵하고 조심스런 마음씨에 허걱, 하고 감동하는 순수한 사람들 틈에 내가 껴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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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이윤기 외 대담 / 민음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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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사고 나서 두 가지가 기특했다. 하나는 당연히 이렇게 깔끔한 구성과 편집, 쉽게 읽혀져 내려가는 이야기 속에 담긴 유려한 사유의 흐름이 기특하기 그지없었고, 또 하나는 이런 책을 순전히 '그냥' 읽고 싶어 산 내가 기특했다.

일단 등장인물의 면면을 보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질 만한, 내노라 하는 지성들이 모여 있다는 것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데 책 곳곳에 자리잡은 사진들은 마치 대화의 순간에 독자가 바로 옆에 있는 양 생생하게 분위기를 전달해 준다.어찌 보면 책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활자들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화자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것이 사진들이라고 말한다면,그건 너무 '오버'하는 걸까?

어쨌든 시간 날 때면 틈틈히 읽고 싶은 대담만 골라 읽다 보니 어떤 부분은 몇 번을 읽게 되기도 하고,책을 산 지 꽤 지난 지금도 영 손을 못 댄 부분이 있다.뭐,그게 대담집의 매력 아니겠는가.맨 첫편에 실린 이윤기(소설가이며 번역가이며 신화학자라는 타이틀에 빛나는)와 그 분의 딸 대화가 있는데,딸과의 평범하고 무난한 듯한 대화에서도 이렇게 빛나는 '이야기' 자체를 끌어오는 힘에 그저 탄복할 뿐이다.제목으로 쓰인 <춘아,춘아..>도 이 신화학자(라고 해두고,생략하자) 이윤기가 소개한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춘아,춘아,옥단춘아,너희 아버지 어디 갔니?
우리 아버지 배를 타고 한강수에 놀러 갔다.
봄이 오면 오시겠지?
봄이 와도 안 오신다.
꽃이 피면 오시겠지?
꽃이 펴도 안 오신다. ..

이렇게 이어지는 노래는 끝이 없다고, 이것을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아이 시절에 불렀는데 알고 보니 우리 무가(巫歌) 본풀이였다며 이윤기는 이것이 바로 '신화적 서술'이라고 한다.그러고 보니 다시 한번 융의 원형(Archetype)개념을 곱씹어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도 어렸을 적 '꽃네'라는 여인이 등장하는,일종의 민담인 듯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계속 [참외 줄까? 참외 싫다.00 줄까? 00 싫다.우리 엄마 젖을 다오.우리 엄마 젖을 다오...]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노래를,음도 모르는데 계속 뇌리에 맴돌고 있는 노래를 머릿 속으로 흥얼거리곤 했다.그러니 인간의 공통적인 본질을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우리의 영혼 속에 끝없이 진화하며 새겨지고 있는 어떤 것들에 관하여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그러한 노래를 부르기 위한 훌륭한 악보가 되어줄 것이다.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할지,음은 어떻고 가사가 어떤지,이 시대에는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지금 우리의 지(智)는 어디까지 와 있는지에 대한. 이 기특한 책에 대한 서평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참 한심한 노릇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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