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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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워낙 수군수군, 이 책에 대한 평이 좋아서 덜컥 산 책이다. 솔직히 나는 에프라임 키숀이라는 유태인 작가에 대해서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고 이 책 이름도 금시초문인데, 리뷰들은 주르륵 끝이 보이질 않고 다들 별 다섯을 펑펑 주시길래 솔직히 많은 기대를 하고 책을 들었다.

어머, 꽤 두껍네? 하고 집어든 책의 첫번째 이야기는 너무 푸짐한 스테이크를 아까워하던 그와 가족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개한테 준답시고 싸가는 스테이크가 결국 골칫거리가 되는 에피소드다. 책을 소리내어 웃으며 읽을 수 있다는 건 참 크나큰 복인데, 나는 첫번째 이야기부터 너무 흥분했었나 보다. 와하하, 너무 웃긴다! 시원하게 웃고 나서 점점 이상하다, 싶더니 결국에는 약간씩 지루하고 좀이 배겼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재밌는 책이다, 별 넷 이상은 된다. 그러나 첫 이야기부터 너무 재밌었고, 첫 이야기가 가장 재밌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까.-_-;

그리고 은빛 페인트로 집을 칠하는 둥의 이야기는 왠지 재미를 위해 억지로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들었고, 체치라는 이름의 젖꼭지에 환장하는 막내딸의 이야기도 조금 작위적이었다. 탈출을 감행하는 용감한(!) 세탁기의 이야기는 황당해도 재밌었지만, 아무래도 옥의 티는 옥에 있기 때문에 더 눈에 잘 띄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구매하겠지만, 과연 소장용이었나 싶어 조금 멋쩍다. 아무래도 나의 유머 감각은 미세하고 광범위한 대신, 조금 까다로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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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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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이렇게 화려한 제목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책 겉껍데기를 슬쩍 살펴보니 이건 뭐 가관이다. '혼돈의 도시를 부유하는.. 중국과 일본, 관능과 이성의 두 멘터리티가.. 운명의 바둑판 위에서 벌이는 비극적 사랑의 이중주'란다. 이러한 수식어가 약간 머쓱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실 책의 문체는 좀 무미건조하고 시들하다. 그건 정말로 정말로, 중국에서 태어나 프랑스 문학을 쓰고 있는 젊은 작가 샨사 때문이 아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역자 탓(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어로 씌어진 글을 한국어로밖에 읽을 수 없는 독자의 무식함에 있다. '진주들만 남도록 끝없이 낱말들을 줄이려는 결벽증'이 있다는 작가의 원문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란. 반 정도를 휙휙 넘겨가며 아, 재미없어, 하고 속으로 투덜대던 나의 괴로움이란 또 얼마나 짙은 것이었는지.

바둑은 아주 묘한 게임이다. 각자 정해진 포지션과 역할이 있는 장기나 체스와 달리, 수없이 많은 흰 돌과 검은 돌, 그것도 똑같이 생긴 납작하고 동글동글한 것들이 판을 꽉 메울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게임이며 고작 361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주제에 나올 수 있는 판의 모양은 수만 수십만 경우가 되는 복잡다단한 게임이다. 차르륵, 하고 바둑돌을 손 안에서 쥐고 굴릴 때의 기분, 그리고 딱 하는 경쾌한 소리로 돌을 착점할 때의 기분은, 이상하게도 매우 야릇한 흥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미끄러지는 돌들 사이를 누비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책이 있다.

사실 주인공인 두 남녀는 아주 느릿느릿, 그것도 각자의 사랑과 일상에 쫓겨(일상이래봤자 전장 한복판에서의 일상이지만) 정신없는 와중에 만난다. 그들이 삶을 잊고 동시에 삶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바둑이다. 비록 그들이 바둑을 두는 목적은 다르지만 검은 핏방울로 흘러내리는 아이를 잊기 위해, 끝없이 죽고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참혹한 전쟁을 잊기 위해, 그들은 바둑을 두며 그 누구보다 온전히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매우 잘쓴 소설이다, 라고 하기엔 약간 망설여진다. 그건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가 공들여 쓴 소설 속 아름다운 문체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불행에서 비롯된 것도 크다. 그러나 한 수 한 수 번갈아가며 두듯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속에서 우리는 바로 다음 수를 알 수 없는 바둑같은 이야기를 읽는다. 내가 이렇게 두면 저쪽에서 어떻게 둘 것이라는 대강의 짐작이 있어야 바둑은 성립되지만, 그렇게 짐작한 대로 되어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바둑이다. 바둑을 두지 않는 사람들(게다가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판되었으니 그 쪽 독자들에게는 중일 전쟁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도 주석이 필요했을 것이다)을 위한 것인 듯, 혹은 작가도 바둑은 두지 않는 듯, 바둑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하지만 언어를 통해 판 하나를 탄탄하게 짜낸 작가의 솜씨는 칭찬해줄 만하다. 특히나 허무하고 맹랑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막판의 긴장 가득한 전개도, '이야기' 의 힘은 역시 '문체'보다는 '스토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두고두고 곁에 두며 뒤적일 책은 아니지만, 특히 바둑에 관심있는 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어쩌면 다음 수를 읽는 눈이 깊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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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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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이 싫다. 자그맣고 표지가 예쁘장하고, 세계 곳곳에서 잘 팔렸다는 책. 이런 책들은 대개 누구나 뻔히 아는 이야기에다 달콤한 꿀을 묻혀서 '어머, 이런 맛은 처음이야!' 하고 감탄하게 만들게 마련이고, 혀를 짭짭 다시다가도 결국 배는 여전히 고프고 혀는 무디어지는 결과를 낳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책 좀 읽는 중학생들(귀여니의 소설 수준은 넘어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파올로 코엘료라는 이야기에 더욱 시뜩했다. 읽지 않아도 책의 내용이 훤했다. 주인공은 적당히 고난을 겪다가 -누구나 감동할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행복해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연금술사'라는 그 신비로운 단어의 힘이 컸다.

연금술사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왜 요즘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을까 하고 아쉬워했을 정도로. 보통의 보석들은 그 반짝반짝하는 빛과 아름다운 색깔 덕에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금은 다르다. 차갑고 딱딱딱한 금은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다. 금은, 그 스스로가 영원성과 불멸을 증명하기에 다른 보석들을 훌쩍 뛰어넘어 최상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그런 금을 만들어내는 직업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설사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망상이라 할지라도 나는 연금술사라는 이름이 주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더없이 온순하고 상냥한 직업, 양치기 산티아고다.(<별>에서 스테파네트 아씨를 지켜주던 양치기를 떠올려보자) 자신의 양을 따뜻하게 돌보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알던 젊은이는 알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늙은 왕과 집시 노파는 그에게 지침이 되어주고, 그는 중간중간 발걸음을 멈칫하는 순간을 겪지만 결국은 자신의 보물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믿는 피라미드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 여정의 문제점은, 아무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 이제 주인공에게 행복이 찾아온다는 흔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에, 우리는 산티아고에게도 그런 충고를 해주고 싶지만, 이 책은 거기서 약간 방향을 틀게 된다. 크리스털 가게 주인의 말처럼, 사막을 넘어가면 성지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지 않음으로써 꿈을 지탱해나갈 수 있는 삶도 분명 있는 것이다. 완벽은 세상에 없지만,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완벽한 노력은 있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산티아고가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조언할 수 없고 당황하게 된다.

결국 그는 피라미드에 닿지만 그 곳엔 아무것도 없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고자 노력한 자가 얻는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허탈해할 즈음 지나가던 사람이 내뱉는 한 마디 말로 산티아고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고, 자신을 늘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며, 우리가 운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표지(혹은 상징)는 언제나 곁에 나타나 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자아의 신화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없이는 신화 자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 여인에게, 산티아고는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한다. 바람이 그들을 맺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연금술이란 이런 것이다. 납이나 철 따위 쓸모없는 금속도, 금이다. 금과 같다. 단지 그것이 누구 운명의 지표인지, 누가 이뤄야 할 자아의 신화인지가 다를 뿐이다. 흔히 성공한 사람에게 우리는 '신화'라는 이름을 붙이며 부러워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신화를 완성할 여유를 놓친 것은 아니었던지. 이미 반짝거리고 있던 금을 놓치고, 금을 만든답시며 온갖 재료만 배합하다 운명의 비정함을 탓하지는 않았던지.

템포가 상당히 느리고 극적인 긴장감도 떨어져 자칫 지칠 수도 있는 책이고,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러나 이 책은 당신도 아름다운 금 한 조각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진정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운명에 귀기울일 때, 온 우주가 당신을 도와준다는 만고불변의 평범하고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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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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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솔직히 말할께. 처음 널 영화에서 봤을 때 난 내 생애에 있어서 앞으로 너같이 멋진 남자애를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지레 단정지어버렸어. 그렇지 않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의 낯선 의자에 앉아 화면을 통해서 본 넌, 내 잃어버린 열아홉처럼 그렇게 멋지고 쿨하고 기타 등등 멋진 말은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랄 놈이었고, 그건 10대만이 가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결과이기도 했으니, 이제 스물을 넘겨도 이만저만 아닌 이 노땅(!)이, 그 후로 몇 번 남자를 바꿔가며 연애를 하면서도 단 한 번, 화면 너머의 네 눈빛을 접했을 때만큼 강렬하고 짜릿한 느낌은 가진 적이 없었다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야. 어머, 이러고 보니 내가 사쿠라이가 된 느낌이네.
이 책은 네 말대로 네 연애 이야기지. 재일 교포,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너와 순수 토종 일본인 사쿠라이의 연애 이야기. 민족, 혈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연애는 그러나 바로 그런 장애 때문에 멈칫하기도 하고, 늘상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일본 속 한국인에게는 아주 사소한 시비도 네 친구 정일의 죽음처럼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기도 하지. 피가 다르다고? 생긴 것도 엇비슷한 동양의 두 나라, 지독한 반일 감정의 뿌리가 아직 자생하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과 중국인은 피가 더럽다는 생각을 가진 유능한 회사원이 아직 존재하는 일본. 역사는, 굳이 누구를 죽이고 죽지 않더라도 참 끈질긴 거지?
어쨌든 난 그 이야기를 하는 네 태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 그건, 영화하고는 또다른 거지.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낫느니, 영화가 낫느니, 비교하기도 하지만 난 기꺼이 둘 다 별 다섯을 날리겠어. 왜냐고? 왜긴 왜야, 달리는 지하철과 목숨 걸고 경주를 하는 지독한 꼴통인 너, 마르크스를 독학한 전직 복서 아버지 밑에서 자라 니체를 좋아하는 너에게 반해서지. 스기하라, 너 자신은 단지 나에게 다가온 매체만 달랐을 뿐, 똑같은 너잖니.
굳이 난, 너와 이 책에 대한 찬사를 날릴 필요성을 못 느껴. 단지 좀 더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야. 사실 말야, 한국에 사는 일본인들도 극심한 차별을 겪고 있을 거야. 그런데 차별이란 거, 우습지 않니? 나도 차별을 당해. 여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차별하고 따돌리지. 돈이 많고 적다는 이유로, 학교를 많이 다니거나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가문, 명예, 기타 등등 에세트라(etc.) 블라블라블라.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재일 교포 작가가 쓴 한국인의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얘기라구. 그럼 이 책을 통해 그런 차별과 편견을 지닌 나약한 인간들을 이 책의 문체처럼 발랄하고 유쾌하게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잖아. 이긴다? 내가 방금 이긴다고 했니? 네 말이 맞아. 사자는 자신을 사자라고 칭하지 않지. 단지 그렇게 이름붙이는 사람이 있을 뿐. 영원히 사자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테고, 사자를 사자라고 부르는 한 두려움과 공포는 차별하는 자들에게 뿌리깊게 남아있을 거야. 뭐 어떠니, 이건 결국 네 연애 이야기이고, 네 연애만 해피엔딩이면 그만인걸.
너의 아버지가 부러워. 정확히 말한다면, 그런 아버지를 가진 네가 부러워. 난 세상 어디에서도 너의 아버지처럼 사랑스러운 남자를 보지 못했거든. 넌 말야, '이 망할 영감탱이'가 입에 붙었지만 난 그 말조차 귀엽다. 아들에게 팔을 쭉 뻗고 한 바퀴 돌아보라고 시킨 뒤, '원 안에 있으면 안전하지만 권투는 그 원을 뚫고 상대방의 원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빼앗아오는 행위다. 자신 있냐?' 라고 말해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는 줄 아니? 그러고 보면 나도 권투를 배웠어야 했어!
누구는 널 아시아의 홀든 콜필드라고 하더라만, 그런 비교는 정말 반(反)쿨하지 않니? 아마도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남자친구들이 다 시시껍질해져 버린 것처럼, 이 책을 보고 난 버린 지금 당분간 내 눈은 다락같이 높아져 있을 것 같다. 그래도 혹시 아니? 나도 사쿠라이, 또다른 스기하라를 만날지. 너도, 나도, 건투를 빌어.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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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맘 2004-04-28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다 책이 더 괜찮은가요?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2012-03-15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국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3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장경룡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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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골라 읽는 중이다. 고등학교 때 논술 대비한답시고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엉엉 울고 싶었던 기분 이후, 나의 독서 취향은 점점 더 편협해지고 소소해져 갔다. 더 이상은 안 된다, 한 번쯤 줄기를 찾아 똑바로 세울 때가 지났다고 느껴져 허둥지둥 '좋은 책'을 찾아 읽는 요즘 색다른 기분이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그렇고, <오만과 편견>도 그렇고, <백년동안의 고독>도 그렇다. 제목이 주는 생소함 때문에 오래도록 외면하던 책들, 아니, 이런 책을 못 읽고 죽었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야금야금 책들을 아껴읽다가 그래, 이젠 아시아권까지 발을 넓히자, 하며 집어든 책이 <설국>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정서는 '하나'로 요약된다고 한다. [러브레터]에서 부재(不在)하는 죽은 연인을 향해 '오겡끼데스까~' 하고 소리치는 여자, [철도원]에서 역 하나만 지키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사는 역장 남자, 사랑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오히려 그 불완전함을 완전성으로 바꾸는 묘한 일본의 정서. 흰 눈 위에 벚꽃 잎처럼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 할복을 하고 내장을 드러냄으로써 깨끗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믿는 그들. 굳이 식민지 시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본인이 추구하는 '깨끗함, 불완전함, 하나, 상실, 사라짐' 의 가치들은 구성진 판소리 가락 구비마다 맺힌 한(恨)을 안고 사는 우리 민족과는 역시나 꽤 동떨어진 듯 보인다.

그러나 내가 <설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경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민족적 가치관의 간극 때문이라면 그건 진짜 세상에서 제일 값싼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나는 어리둥절했다. 과연 이것이 번역의 미비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고 일본에 대한 내 배경 지식이 형편없기 때문일까 자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설국>을 겨우겨우, 그야말로 숨막혀가는 기분으로 간신히 인쇄된 활자를 다 읽어내고 나자 도저히 <이즈의 무희>와 <금수>를 읽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 이럴까.

미술 시간에 배운 그 숱한 개념들은 모두 까먹은 지 오래지만, 아이들과 쪽지를 주고받으면서도 늘 우스개처럼 지껄이는 말이 하나 있다. 여백의 미(美), 한국화의 흥취라면 역시 여백에서 나오는 멋스러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설국>이야말로 여백으로 가득한 소설이었다. 서사도 묘사도 없이, 문장 사이의 간격이 한 뼘은 되는 듯, 인물들은 별다른 감흥 없이 인형극 속의 인형들처럼 간간이 얼굴을 내비추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조차 자신이 없다. 나는 여백은커녕 씌어져 있는 글자들조차 제대로 해독해 내지 못한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소설에 대해 혹평 혹은 악평을 날리는 것은 스스로만 바보 만드는 짓일 게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눈을 흘겨주고 싶은 욕망을 어쩔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글쎄, 이건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 만고풍상을 겪는다 해도 절대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일 거라고 해두자. 삶의 깊이와 지식의 한계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어떤 정서적인 '벽' 앞에서 나는 문을 찾거나 그 벽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게 도움닫기를 하느니, 그냥 스스로의 무지와 무식을 탓하며 홱 돌아가버리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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