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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이 이렇게 화려한 제목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책 겉껍데기를 슬쩍 살펴보니 이건 뭐 가관이다. '혼돈의 도시를 부유하는.. 중국과 일본, 관능과 이성의 두 멘터리티가.. 운명의 바둑판 위에서 벌이는 비극적 사랑의 이중주'란다. 이러한 수식어가 약간 머쓱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실 책의 문체는 좀 무미건조하고 시들하다. 그건 정말로 정말로, 중국에서 태어나 프랑스 문학을 쓰고 있는 젊은 작가 샨사 때문이 아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역자 탓(이라고 하기에도 뭣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어로 씌어진 글을 한국어로밖에 읽을 수 없는 독자의 무식함에 있다. '진주들만 남도록 끝없이 낱말들을 줄이려는 결벽증'이 있다는 작가의 원문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란. 반 정도를 휙휙 넘겨가며 아, 재미없어, 하고 속으로 투덜대던 나의 괴로움이란 또 얼마나 짙은 것이었는지.
바둑은 아주 묘한 게임이다. 각자 정해진 포지션과 역할이 있는 장기나 체스와 달리, 수없이 많은 흰 돌과 검은 돌, 그것도 똑같이 생긴 납작하고 동글동글한 것들이 판을 꽉 메울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게임이며 고작 361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주제에 나올 수 있는 판의 모양은 수만 수십만 경우가 되는 복잡다단한 게임이다. 차르륵, 하고 바둑돌을 손 안에서 쥐고 굴릴 때의 기분, 그리고 딱 하는 경쾌한 소리로 돌을 착점할 때의 기분은, 이상하게도 매우 야릇한 흥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미끄러지는 돌들 사이를 누비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책이 있다.
사실 주인공인 두 남녀는 아주 느릿느릿, 그것도 각자의 사랑과 일상에 쫓겨(일상이래봤자 전장 한복판에서의 일상이지만) 정신없는 와중에 만난다. 그들이 삶을 잊고 동시에 삶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바둑이다. 비록 그들이 바둑을 두는 목적은 다르지만 검은 핏방울로 흘러내리는 아이를 잊기 위해, 끝없이 죽고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참혹한 전쟁을 잊기 위해, 그들은 바둑을 두며 그 누구보다 온전히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매우 잘쓴 소설이다, 라고 하기엔 약간 망설여진다. 그건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가 공들여 쓴 소설 속 아름다운 문체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불행에서 비롯된 것도 크다. 그러나 한 수 한 수 번갈아가며 두듯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속에서 우리는 바로 다음 수를 알 수 없는 바둑같은 이야기를 읽는다. 내가 이렇게 두면 저쪽에서 어떻게 둘 것이라는 대강의 짐작이 있어야 바둑은 성립되지만, 그렇게 짐작한 대로 되어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바둑이다. 바둑을 두지 않는 사람들(게다가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판되었으니 그 쪽 독자들에게는 중일 전쟁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도 주석이 필요했을 것이다)을 위한 것인 듯, 혹은 작가도 바둑은 두지 않는 듯, 바둑 자체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하지만 언어를 통해 판 하나를 탄탄하게 짜낸 작가의 솜씨는 칭찬해줄 만하다. 특히나 허무하고 맹랑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막판의 긴장 가득한 전개도, '이야기' 의 힘은 역시 '문체'보다는 '스토리'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두고두고 곁에 두며 뒤적일 책은 아니지만, 특히 바둑에 관심있는 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어쩌면 다음 수를 읽는 눈이 깊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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