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나는 이런 책이 싫다. 자그맣고 표지가 예쁘장하고, 세계 곳곳에서 잘 팔렸다는 책. 이런 책들은 대개 누구나 뻔히 아는 이야기에다 달콤한 꿀을 묻혀서 '어머, 이런 맛은 처음이야!' 하고 감탄하게 만들게 마련이고, 혀를 짭짭 다시다가도 결국 배는 여전히 고프고 혀는 무디어지는 결과를 낳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책 좀 읽는 중학생들(귀여니의 소설 수준은 넘어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파올로 코엘료라는 이야기에 더욱 시뜩했다. 읽지 않아도 책의 내용이 훤했다. 주인공은 적당히 고난을 겪다가 -누구나 감동할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행복해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연금술사'라는 그 신비로운 단어의 힘이 컸다.
연금술사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왜 요즘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을까 하고 아쉬워했을 정도로. 보통의 보석들은 그 반짝반짝하는 빛과 아름다운 색깔 덕에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금은 다르다. 차갑고 딱딱딱한 금은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다. 금은, 그 스스로가 영원성과 불멸을 증명하기에 다른 보석들을 훌쩍 뛰어넘어 최상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그런 금을 만들어내는 직업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설사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망상이라 할지라도 나는 연금술사라는 이름이 주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더없이 온순하고 상냥한 직업, 양치기 산티아고다.(<별>에서 스테파네트 아씨를 지켜주던 양치기를 떠올려보자) 자신의 양을 따뜻하게 돌보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알던 젊은이는 알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늙은 왕과 집시 노파는 그에게 지침이 되어주고, 그는 중간중간 발걸음을 멈칫하는 순간을 겪지만 결국은 자신의 보물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믿는 피라미드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 여정의 문제점은, 아무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 이제 주인공에게 행복이 찾아온다는 흔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에, 우리는 산티아고에게도 그런 충고를 해주고 싶지만, 이 책은 거기서 약간 방향을 틀게 된다. 크리스털 가게 주인의 말처럼, 사막을 넘어가면 성지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지 않음으로써 꿈을 지탱해나갈 수 있는 삶도 분명 있는 것이다. 완벽은 세상에 없지만,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완벽한 노력은 있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산티아고가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조언할 수 없고 당황하게 된다.
결국 그는 피라미드에 닿지만 그 곳엔 아무것도 없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고자 노력한 자가 얻는 것이 이것이란 말인가, 허탈해할 즈음 지나가던 사람이 내뱉는 한 마디 말로 산티아고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고, 자신을 늘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며, 우리가 운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표지(혹은 상징)는 언제나 곁에 나타나 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자아의 신화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없이는 신화 자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 여인에게, 산티아고는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한다. 바람이 그들을 맺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연금술이란 이런 것이다. 납이나 철 따위 쓸모없는 금속도, 금이다. 금과 같다. 단지 그것이 누구 운명의 지표인지, 누가 이뤄야 할 자아의 신화인지가 다를 뿐이다. 흔히 성공한 사람에게 우리는 '신화'라는 이름을 붙이며 부러워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신화를 완성할 여유를 놓친 것은 아니었던지. 이미 반짝거리고 있던 금을 놓치고, 금을 만든답시며 온갖 재료만 배합하다 운명의 비정함을 탓하지는 않았던지.
템포가 상당히 느리고 극적인 긴장감도 떨어져 자칫 지칠 수도 있는 책이고,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러나 이 책은 당신도 아름다운 금 한 조각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진정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운명에 귀기울일 때, 온 우주가 당신을 도와준다는 만고불변의 평범하고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