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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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책 읽는 속도가 한없이 느려졌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 씨 서재에서 알게 된 책인데, 같이 샀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한참을 책장에서 적적하게 보내다 어제 새벽에야 다 읽어내린 책이다. 게다가 번역의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원문을 읽지 못하는 답답함도 사뭇 가중되어 가고 있는 때에, 흡사 재즈처럼 글을 써내려갔다는 흑인 여자 작가의 글이라니. 활자화된 한국어는 아무리 리듬을 붙여보아도 전혀 재즈같은 구석이 없었다. 그럼 원서를 읽어야 하나? 재즈도 잘 모르는 내가, 재즈풍의 문체를 이해할 리 만무다. 게으르고 조금은 짜증나는 기분으로 <재즈>는 몇 번에 걸쳐져 책갈피를 끼운 채 책장과 내 손을 들락거렸다.

책을 펼쳐들었을 때 이미 모든 일은 끝난 후다. 나이를 쉰씩이나 먹은 늙은 남자와 그의 정부인 어린 소녀, 그리고 남자의 아내. 조는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유 따위로 그녀, 도카스를 총으로 쏴 죽여 버리고 그의 아내인 바이올렛은 질투에 눈이 멀어 도카스의 장례식에 쳐들어가 칼로 그녀의 얼굴을 난도질한다. 도카스가 죽고 난 후 조는 하루종일 통곡하고 바이올렛은 남편을 잃어버린 기분에 도카스가 어떤 애였는지 알아보기 시작한다니. 심지어 도카스의 이모인 앨리스는 바이올렛과 은근슬쩍 친해지고, 얼핏 더러운 치정 사건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이야기는 가느다란 실핏줄처럼 점점 뻗쳐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 번역을 탓하고 있었다. 역자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역시나 이런 소설의 '맛'은 원어로 읽을 때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책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별 거 아닌 것 같은 소설로 느껴지는 것은 내 무식 때문은 아니라고 말이다.

아무튼 시큰둥하게 휙휙 책장을 넘겨가면서도 그럭저럭 3분의 2를 읽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새벽, 불면의 밤에 시달리다 잠이나 좀 자자는 기분으로 <재즈>를 펼쳐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저 '재즈'라는 말이 붙으면 왠지 멋있다고밖에 느끼지 못하는 내가 그 속에 담겨있는 긴긴 흑인의 역사와 정서를 이해하는 것은 역시 무리다. 무리지만, 그래도 꼭 무언가를 배워야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재즈처럼 흐느적거리고, 우울하고, 한없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도 그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음악 같은 경우엔 특히 말이다. 책 속에는 사실 '재즈'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롭게 즉흥 연주를 하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는 그 음악처럼, 처음엔 단지 신문 한 구석퉁이에 실릴 법한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던 그들은 자신의 음색으로 삶을 연주하고, 그들의 삶과 일상,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왜 그들이 그랬는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때 이 끔찍한 사건 역시 그저 삶의 일부분, 일상으로 편입한다. 조는 아직도 사랑하는 법에 대해 잘 모르고, 도카스는 죽음을 편하게 선택하고, 바이올렛은 도카스를 알아가고, 도카스의 친구인 펠리스와 부부가 함께 한 자리에서 그 묘한 화음은 책 전체로 울려퍼진다.

그리고, <재즈>를 다 읽고 나서 너무 놀라면 안 된다.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소설, 화자는 제멋대로 등장인물에 대해 입을 놀리고, 도대체 왜 이런 얘기를 하나 싶던 백 년쯤 전 옛이야기까지, 그리고 마지막 조와, 바이올렛과, 펠리스의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은 저절로 명료해질 테니까. 이걸 반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황당함은 어쩌면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기분과 일맥상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즈>는, 그런 소설이다. 이제야 비로소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나는 <재즈>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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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꼬네집에 놀러올래
이만교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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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리뷰, 하필이면 이만교의 이 소설이라니. 게다가 알라딘에서는 품절인가 보다. 헉, 왜 그렇지? 이만교 스스로도 좀 분해하긴 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만만하게, '걸작'으로 추켜세우던 자기 작품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같이 영화로 만들어져 친숙하고 제목도 알아들을 정도로만 도발적인 작품들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나? 나는, 이만교의 작품이라곤 '그녀, 번지점프 하다'라는 짧은 단편밖에 생각이 안 난다.

대한민국의 입심 혹은 입담 좋은 작가, 하면 누가 있을까. 이윤기같이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무기로 구변을 늘어놓는 작가 말고, 왠지 호탕하게 웃어제낄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마련해주는 재미나는 작가. '재미' 하면 대개 성석제, 아니면 김영하 라인을 떠올릴 거다. 성석제의 어눌한 듯한 말투는 실소를 머금게 하고 김영하의 글은 약간 뒷맛이 쓴 냉소를 남긴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 박민규는 어떤가. 그 책을 읽은 사람들 대부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기다!'하고 인정하지만, 아무래도 주류의 감성과는 어긋난 뒤틀림과 낄낄댐의 웃음,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과 뻘쭘한 사람으로 독자층이 확 나뉘지나 않을런지. 그럼 대체 누가 남아 있지. 그럴 때 내가 내세우는 것이 이만교라는 작가다. 이만교의 작가는 숨막히게 웃기지 않으나 늘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평을 써준 이윤기의 말로는, 그건, 일부러 가장한 가벼움, 혹은 가벼움으로써 나타나는 무겁고 깊음이라지만, 아무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골아프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슬렁슬렁 넘겨가며 읽기 딱 좋은 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는 완전 '뻥'투성이 소설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애인이 갑자기 살아나서 친구와 결혼하고(알고 보니 그 여자에게 이별 통고를 받고 나서 주인공이 그런 상상을 한 거였다), 멀쩡하게 같이 살고 있는 매형이 1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뻥을 치고, 시공간에 관한 그 형이상학적인 '뻥'들로 점철되어 있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너무나 자연스레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 책 역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뻥'과 '오버'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책 전체에 스며있는 위대성 때문에 독자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묘한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게 만들었다면, 이만교의 이 책은 참 편하다. 그는 대놓고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이름을 끌어와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을까봐 걱정이라느니, 하며 표절(내지는 오마쥬)를 저지르고 소설이 다 끝나고 나서 작가의 말에서도 책을 읽고 나서 전화를 하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다며, 천연덕스레 <호밀밭의 파수꾼> 흉내를 낸다.

소설가가 내세우는 대표작과 독자가 꼽는 대표작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 소설 역시 작가 자신, 엄청 노력하고 뒤집고 꼼꼼히 다듬어가며 만들어낸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과연 모든 독자가 곧이곧대로 그 모든 것을 흡수해줄지는 미지수이다. 이만교는 너무 '이만교 식'에 빠져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뻥은 무척이나 시의적절하게 유효하다. 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뭔가 궁금해서 뒤에 서봤더니 어느 새 학교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는 주인공의 '뻥'처럼,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IMF처럼, 요즘 뉴스만 보면 다들 힘들다고 난리고, 대학을 나와봤자 할 일이 노는 일밖에 없어 큰일이라는 한숨 투성이이인데, 이럴 때 소설 아니면 못 칠 뻥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아니, 비록 구체적 도움이나 천 배의 힘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런 뻥을 담아내는 그릇, 소설이 있다는 것, 지금도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마지막에 둥둥 떠있는 아기, 머꼬를 보며 별로 남은게 없는 이 소설을 덮었으나, 글쎄? 꼭 뭐가 남아야 하나, 싶다. 무릎을 쳐대며 웃지 않아도, 이 소설가의 현란한 '뻥'은 며칠동안 계속 나를 즐겁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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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건너뛰기
존 그리샴 지음, 최수민 옮김 / 북앳북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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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명작 혹은 걸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존 그리샴이라는 작가의 이름에 어느 정도 단단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변호사 출신(사실 변호사는 일종의 종신직이지만)의 그리샴이 법정 스릴러가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제법 멋들어지게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헐리우드에서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거꾸로 그의 책들을 읽으면 헐리우드의 힘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지독히 상업적이고 너무나 비슷하며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적당한 유머와 적당한 난관과 어김없는 해피엔딩을 버무려 놓은 어찌보면 천편일률적인 그 영화들이 왜 흥행에는 가장 쉽게 성공하는지, 그런 대중성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일순 나는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세상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싶게 하는 위대한 이야기만 있을 수는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안 될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죽어도 평범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평범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라고 나도 생각했었다. 이제 얼마쯤 나이를 먹고 나니 그게 가장 위대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런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책 속의 루터는 이 지긋지긋한 크리스마스, 모두가 떠들썩하고 야단을 피우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크리스마스에서 용감히 탈출하려고 결단을 내린다. 심지어 마을의 명물이 된 플라스틱 눈사람 '프로스티'도 동네에서 혼자 세우지 않아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열심히 밀고 나간다. 단 하루를 위해 한 달 월급을 쏟아붓는 남들을 비웃으면서 그는 바다 위에서 유유히 유람을 즐길 계획, 이었다. 헌데 사랑하는 외동딸이 이브날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약혼자라는 페루 의사를 대동하고, 그에게 전통적인 미국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모두 보여주고 싶다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이 역전된다. 루터가 팔짱을 끼고 수수방관하던 이웃의 행사들과 물건들을 제발 빌려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하던 의기양양함이 어느 새 갑자기 '제발 너희와 같아질 수 있게 우리를 좀 도와주렴' 하는 애원이 된다. 뭐, 배경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어차피 이건 '한겨울밤의 소동'으로 모두가 즐겁게 끝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작가가 루터의 입을 빌어 치밀하게 이곳저곳에 늘어놓았던 냉소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역설적으로 코메디가 된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한 편의 왁자지껄한 헐리우드 가족 영화(그것도 크리스마스 시즌을 대비해 만든)을 비디오로 보고 난 기분으로 책을 덮었는데, 어째 씁쓸하다. 나도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정말 훌쩍 건너뛰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이 책마저 맘에 드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게 결국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듯 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모두가 행복하기로 작정한 축제를 무시하고 온전히 혼자 자유로워지기란, 참 멀고도 험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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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몬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영언문화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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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기분이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사실은 불쾌하기도 했고, 갑자기 머릿속이 뒤숭숭해져서 멍하니 책을 놓고 침대를 구르기도 했다. 누군가의 책장에서 이 재치넘치는 제목만 보고, 와 저 책을 꼭 사서 읽어 봐야겠다, 해놓고 맨날 '짝짓기' 부분만 읽으며 간접적인 성교육만 받다가 -_-; 통독을 하고 난 지금, 이 책이 어떤 종교 단체들에게는 금서로 찍혀 화형당했다는 얘기도 일견 수긍이 간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다른 책 <인간 동물원>에서는 '현대 인간'의 양태가 결국 동물원에 가둬둔 동물들과 똑같다고 한다던데, 이건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암튼 그 책도 읽고 나면 어딘가 께름칙칙할 것 같긴 하다.

얼마 전 언제 봐도 재밌는 시트콤 [프렌즈]를 동아TV로 보고 있는데 피비가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로스가 그걸 증명하느라 애쓰는 장면이 나왔다. '사이언스 가이' 로스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냐는 식인데 피비는 그 옛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사실도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냐며 오히려 여유만만이다. 뭐 꼭 증거 때문이 아니라 난 별로 그 이론을 믿을 수 없어, 하는 피비에게 로스가 우리 조상들(!)의 유골까지 가방째로 가져와 그녀를 설득하는 모습은 우습기는 한데, '혹시?'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쩜 피비 말이 맞는 게 아닐까.

아니다. 진화론은 엉터리고, 우리는 원숭이와 애초에 다른 종족이라는 이야기를 주장하기에 우리 과학은 너무 많은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이 비죽 솟아오른다. 그 과학이라는 게, 내가 직접 연구하고 공부해서 밝혀 낸 것도 아니고, 남들이 다 해준 것 아닌가. 그럼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을 자유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느님의 존재는 과학적이지 않아도 인정하면서, 하느님이 우리를 유독 택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비과학적이라고 코웃음칠 수 있나? 아니아니,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우리의 모습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도 아니면서 감히 '털있는 원숭이'에게 묘기를 부리게 하고 바나나를 던져줄 자유가 우리에게, 대체, 있는 것이냐고.

아무튼 이 책의 내용들은 사실 별 근거도 없으면서 나 자신을 매우 특별한 개체로 생각하던 내게 발칙했다. 발칙하긴 했지만 결코 그것이 (저자의 말대로) 인간을 비하시키려는 시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놀랍고 경이로울 뿐이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뱀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어딨는지도 알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각종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어머, 쟤네 참 사람 같네' 라고 굴었던 것이 얼마나 뻔뻔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알게 된다. 털없는 원숭이는 가장 큰 성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이렇게 건방지다니, 하고. ^^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만하게 살아왔는지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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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1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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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은 상당히 일본적이다. 사촌간의 결혼이 가능한, 우리나라로서는 왠지 꺼림칙한 풍습이 있는 것도 그렇고 엄청나게 많은 절마다 풍경을 걸어놓곤 하는 그네들 나라를 떠올려 볼 때 이미 성황당이나 장승 따위가 사라져버린 우리 나라보다 오히려 더 미개한 야만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네들이 아닌가 싶다. 이상하게도 지리적으로도 더없이 가깝고,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몇십 년간 통치하에 둔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국의 죽음에 대한 가치는 이상할 정도로 상극인 듯 하다. 시체와 사체의 개념도 그렇고, 보통 죽은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각종 요괴와 설녀, 도깨비, 이런 것들에 훨씬 집착한다. 이질감과 거부감이 들기 십상인 그들의 문화에 대해 내가 조금 의외의 마음으로, 가볍고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이 <백귀야행>이다. 좀 특별한 만화이다.

대대로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리쓰네 집안의 죽은 할아버지 이이지마 가규(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다)를 위시하여, 그의 딸과 아들들의 삶이 얼핏얼핏 비치고, 심지어는 행방불명된 리쓰의 삼촌이 몇 십년만에 '저쪽 세계'에서 돌아오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부렸던 용 모양의 요괴 아오아라시(두번째로 좋아하는 캐릭터)는 가규와 맺은 계약 때문에 리쓰를 충실하게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지킨다.

이런 류의 만화들-<세상이 가르쳐준 비밀>이나 <펫샵 오브 호러스>가 으레 그렇듯, 또 요즘의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나 이야기들이 늘 그렇듯, 그들의 사정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줌으로써 영문을 알 수 없던 괴사건들은 하나씩 차곡차곡 스러져 간다. 그리고 다른 것들보다 유독 <백귀야행>이 돋보이는 것은 섬뜩한 느낌이나 오싹한 공포감 하나 없이도 요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러면서도 경계에 대한 은근한 눈짓을 계속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시간이 겹쳐지며 일어나는 사건들,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쓱 생략되어 있는 이야기 방식(작가는 정신없이 마감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곤 하지만)은 어딘가 모르게 시적이고 여유롭다. 그래서 <백귀야행>을 읽을 때는 이야기 한 편마다 두 세번씩 읽고서야 넘어가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보다, <백귀야행>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향과 촉감 때문에, 더욱 오래 이 만화가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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