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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꼬네집에 놀러올래
이만교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평점 :
오랜만에 쓰는 리뷰, 하필이면 이만교의 이 소설이라니. 게다가 알라딘에서는 품절인가 보다. 헉, 왜 그렇지? 이만교 스스로도 좀 분해하긴 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만만하게, '걸작'으로 추켜세우던 자기 작품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같이 영화로 만들어져 친숙하고 제목도 알아들을 정도로만 도발적인 작품들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나? 나는, 이만교의 작품이라곤 '그녀, 번지점프 하다'라는 짧은 단편밖에 생각이 안 난다.
대한민국의 입심 혹은 입담 좋은 작가, 하면 누가 있을까. 이윤기같이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무기로 구변을 늘어놓는 작가 말고, 왠지 호탕하게 웃어제낄 수 있는 시간을 우리에게 마련해주는 재미나는 작가. '재미' 하면 대개 성석제, 아니면 김영하 라인을 떠올릴 거다. 성석제의 어눌한 듯한 말투는 실소를 머금게 하고 김영하의 글은 약간 뒷맛이 쓴 냉소를 남긴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 박민규는 어떤가. 그 책을 읽은 사람들 대부분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기다!'하고 인정하지만, 아무래도 주류의 감성과는 어긋난 뒤틀림과 낄낄댐의 웃음,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과 뻘쭘한 사람으로 독자층이 확 나뉘지나 않을런지. 그럼 대체 누가 남아 있지. 그럴 때 내가 내세우는 것이 이만교라는 작가다. 이만교의 작가는 숨막히게 웃기지 않으나 늘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평을 써준 이윤기의 말로는, 그건, 일부러 가장한 가벼움, 혹은 가벼움으로써 나타나는 무겁고 깊음이라지만, 아무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골아프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슬렁슬렁 넘겨가며 읽기 딱 좋은 글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는 완전 '뻥'투성이 소설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애인이 갑자기 살아나서 친구와 결혼하고(알고 보니 그 여자에게 이별 통고를 받고 나서 주인공이 그런 상상을 한 거였다), 멀쩡하게 같이 살고 있는 매형이 1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뻥을 치고, 시공간에 관한 그 형이상학적인 '뻥'들로 점철되어 있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너무나 자연스레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 책 역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뻥'과 '오버'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책 전체에 스며있는 위대성 때문에 독자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묘한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게 만들었다면, 이만교의 이 책은 참 편하다. 그는 대놓고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이름을 끌어와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을까봐 걱정이라느니, 하며 표절(내지는 오마쥬)를 저지르고 소설이 다 끝나고 나서 작가의 말에서도 책을 읽고 나서 전화를 하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다며, 천연덕스레 <호밀밭의 파수꾼> 흉내를 낸다.
소설가가 내세우는 대표작과 독자가 꼽는 대표작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 소설 역시 작가 자신, 엄청 노력하고 뒤집고 꼼꼼히 다듬어가며 만들어낸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과연 모든 독자가 곧이곧대로 그 모든 것을 흡수해줄지는 미지수이다. 이만교는 너무 '이만교 식'에 빠져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뻥은 무척이나 시의적절하게 유효하다. 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뭔가 궁금해서 뒤에 서봤더니 어느 새 학교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는 주인공의 '뻥'처럼,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IMF처럼, 요즘 뉴스만 보면 다들 힘들다고 난리고, 대학을 나와봤자 할 일이 노는 일밖에 없어 큰일이라는 한숨 투성이이인데, 이럴 때 소설 아니면 못 칠 뻥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아니, 비록 구체적 도움이나 천 배의 힘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런 뻥을 담아내는 그릇, 소설이 있다는 것, 지금도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마지막에 둥둥 떠있는 아기, 머꼬를 보며 별로 남은게 없는 이 소설을 덮었으나, 글쎄? 꼭 뭐가 남아야 하나, 싶다. 무릎을 쳐대며 웃지 않아도, 이 소설가의 현란한 '뻥'은 며칠동안 계속 나를 즐겁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