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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몬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영언문화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기분이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사실은 불쾌하기도 했고, 갑자기 머릿속이 뒤숭숭해져서 멍하니 책을 놓고 침대를 구르기도 했다. 누군가의 책장에서 이 재치넘치는 제목만 보고, 와 저 책을 꼭 사서 읽어 봐야겠다, 해놓고 맨날 '짝짓기' 부분만 읽으며 간접적인 성교육만 받다가 -_-; 통독을 하고 난 지금, 이 책이 어떤 종교 단체들에게는 금서로 찍혀 화형당했다는 얘기도 일견 수긍이 간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다른 책 <인간 동물원>에서는 '현대 인간'의 양태가 결국 동물원에 가둬둔 동물들과 똑같다고 한다던데, 이건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암튼 그 책도 읽고 나면 어딘가 께름칙칙할 것 같긴 하다.
얼마 전 언제 봐도 재밌는 시트콤 [프렌즈]를 동아TV로 보고 있는데 피비가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로스가 그걸 증명하느라 애쓰는 장면이 나왔다. '사이언스 가이' 로스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냐는 식인데 피비는 그 옛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사실도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냐며 오히려 여유만만이다. 뭐 꼭 증거 때문이 아니라 난 별로 그 이론을 믿을 수 없어, 하는 피비에게 로스가 우리 조상들(!)의 유골까지 가방째로 가져와 그녀를 설득하는 모습은 우습기는 한데, '혹시?'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어쩜 피비 말이 맞는 게 아닐까.
아니다. 진화론은 엉터리고, 우리는 원숭이와 애초에 다른 종족이라는 이야기를 주장하기에 우리 과학은 너무 많은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이 비죽 솟아오른다. 그 과학이라는 게, 내가 직접 연구하고 공부해서 밝혀 낸 것도 아니고, 남들이 다 해준 것 아닌가. 그럼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을 자유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느님의 존재는 과학적이지 않아도 인정하면서, 하느님이 우리를 유독 택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비과학적이라고 코웃음칠 수 있나? 아니아니,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우리의 모습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도 아니면서 감히 '털있는 원숭이'에게 묘기를 부리게 하고 바나나를 던져줄 자유가 우리에게, 대체, 있는 것이냐고.
아무튼 이 책의 내용들은 사실 별 근거도 없으면서 나 자신을 매우 특별한 개체로 생각하던 내게 발칙했다. 발칙하긴 했지만 결코 그것이 (저자의 말대로) 인간을 비하시키려는 시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놀랍고 경이로울 뿐이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뱀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어딨는지도 알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각종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어머, 쟤네 참 사람 같네' 라고 굴었던 것이 얼마나 뻔뻔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알게 된다. 털없는 원숭이는 가장 큰 성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이렇게 건방지다니, 하고. ^^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만하게 살아왔는지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