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건너뛰기
존 그리샴 지음, 최수민 옮김 / 북앳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이런 책을 명작 혹은 걸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존 그리샴이라는 작가의 이름에 어느 정도 단단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변호사 출신(사실 변호사는 일종의 종신직이지만)의 그리샴이 법정 스릴러가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제법 멋들어지게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헐리우드에서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거꾸로 그의 책들을 읽으면 헐리우드의 힘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지독히 상업적이고 너무나 비슷하며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적당한 유머와 적당한 난관과 어김없는 해피엔딩을 버무려 놓은 어찌보면 천편일률적인 그 영화들이 왜 흥행에는 가장 쉽게 성공하는지, 그런 대중성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일순 나는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세상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싶게 하는 위대한 이야기만 있을 수는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안 될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죽어도 평범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평범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라고 나도 생각했었다. 이제 얼마쯤 나이를 먹고 나니 그게 가장 위대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런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책 속의 루터는 이 지긋지긋한 크리스마스, 모두가 떠들썩하고 야단을 피우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크리스마스에서 용감히 탈출하려고 결단을 내린다. 심지어 마을의 명물이 된 플라스틱 눈사람 '프로스티'도 동네에서 혼자 세우지 않아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열심히 밀고 나간다. 단 하루를 위해 한 달 월급을 쏟아붓는 남들을 비웃으면서 그는 바다 위에서 유유히 유람을 즐길 계획, 이었다. 헌데 사랑하는 외동딸이 이브날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약혼자라는 페루 의사를 대동하고, 그에게 전통적인 미국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모두 보여주고 싶다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이 역전된다. 루터가 팔짱을 끼고 수수방관하던 이웃의 행사들과 물건들을 제발 빌려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하던 의기양양함이 어느 새 갑자기 '제발 너희와 같아질 수 있게 우리를 좀 도와주렴' 하는 애원이 된다. 뭐, 배경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어차피 이건 '한겨울밤의 소동'으로 모두가 즐겁게 끝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작가가 루터의 입을 빌어 치밀하게 이곳저곳에 늘어놓았던 냉소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역설적으로 코메디가 된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한 편의 왁자지껄한 헐리우드 가족 영화(그것도 크리스마스 시즌을 대비해 만든)을 비디오로 보고 난 기분으로 책을 덮었는데, 어째 씁쓸하다. 나도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정말 훌쩍 건너뛰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이 책마저 맘에 드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게 결국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듯 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모두가 행복하기로 작정한 축제를 무시하고 온전히 혼자 자유로워지기란, 참 멀고도 험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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