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살아남기
줄리아 워츠 지음, 김보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새벽 3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

파자마 차림으로 크래커를 씹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날은 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에 지문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내가 다녀와 본 곳, 가보지 못한 곳, 앞으로 가볼 곳. 첫인상으로,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그곳의 사람들로 채워진 지문은 하나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뉴욕의 지문과 캐리 브래드쇼가 가진 뉴욕의 지문은 다르다. 같은 공간과 시간, 어느 특정 도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도화지처럼 깔린 경험의 깊이가 다르기에 백 명이 백 개의 화두인 것처럼, 도시는 제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뉴욕에서 살아남기'의 줄리아 워츠는 우중충한 생활을 청산하고 거지 같은 생활을 펼친다. 상상 속의 산뜻하고 매끄러운 샌프란시스코의 생활을 청산하고 스타일리쉬한 뉴욕으로 하는 이사. 현실의 악몽같은 부업, 빌털터리 생활, 마약 중독자 오빠를 두고 얼어 죽거나 쪄 죽고, 에어컨도 개판, 집세는 지붕을 뚫고 사라지는 뉴욕이라. 그녀는 뉴욕을 예찬하지도, 샌프란시스코를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도시를 비교하거나 정치관을 피력하거나 젊음의 패기를 자랑하는 것은 이 책의 특징이 아니다. 이 책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만화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에 앞서 등장하는 작가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았을 때 나는 뉴욕을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를 두서없어 세 페이지나 늘어놓았다. 내가 쓴 글은 뉴욕의 매력을 묘사하려는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곤 하는 실수처럼 빤한 이야기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가득했다. 뉴욕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웃음거리가 되기 쉬운 바보짓 같았다. 그래서 글은 접어두고 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히 뉴욕에는 '이상적인 젊은이가 대도시로 와서 어려운 일을 겪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안타깝지만 이 책의 내용도 거의 그렇다. 나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라서 내 인생이 전개된느 그대로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나만큼이나 이런 이야기에 신물 난 이들이 있다면 사과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독자들이 공감하리라 기대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또한 고향을 떠나 쓰레기 같은 집을 비싸게 얻고, 취직했다가 해고당하길 반복하며 예기치 않은 백수가 되기도 햇던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는 나쁜 선택을 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결과를 얻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첫해를 견딜 수 있는 팁이 한 가지 있다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는 글 중에서.





  그리하여 이 그래픽 노블을 펼치면 가장 먼저 접하는 이미지. 바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에서 새벽 세 시, 파자마 차림으로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줄리아 워츠의 모습이 한 페이지 가득하다. 이상과 현실의 갭이 가장 클 때, 그녀는 그 틈새로 도망칠 줄 아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다. 즐거운 일자리, 오크 마루와 커다란 창문의 집, 화목한 가족과 완벽한 남자친구가 아닌 구질구질한 서빙, 침실을 세주고 큰 벽장에 들어가 잠자야 하는 집, 마약 중독자 오빠와 장거리 연애 때문에 생기는 짜증이 나는 일들. 다른 누군가가 그 도시를 꿈꾸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는 그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장소를 바꾼다 하여 문제의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이동하는 것에 따른 책임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줄리아 워츠의 만화를 읽으면, 어쩌면 장소는 어떠한 문제의 근원이 아닌 문제의 조력자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작가 자신이 겪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단, 그 장소 안에 똑같은 작가가 몸담고 있어도 장소는 드러내지 않고 뒤에 숨어서 어떤 일은 하게 해주고, 어떤 일은 은근슬쩍 가려주기도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을 슬쩍 내어놓기도 한다. 물론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 혹은 이하이다. 상상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는 세상에 없는 원더랜드 아닐까. 이 상상의 이상과 이하가 차례로 펼쳐지는 것이 줄리아 워츠의 만화.






 작가 자신이 2007년 챕터에서 비교한 바에 따르면, 맛있는 베이글과 피자, 맛없는 인도음식, 사계와 거미줄 같은 지하철,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며 바쁜 듯한 현지인, 그리고 덤으로 꼬질꼬질한 작가 자신이 있는 도시, 뉴욕으로. 그곳에서 얻은 첫 번째 집은 재앙이었고 두 번째 집은 거지 소굴이었다. 거지 소굴이라. 자학이라는 장치는 참으로 기괴한 멋을 지녀서,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으면 그 기회를 놓친 타인에게는 이해와 공감이라는 감정만이 남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런 거지 소굴에 왜 왔나' 하며 이리저리 뒤척인다. 마침내 밤을 새우고 아예 비상계단으로 나가 뉴욕의 일출을 보며 하는 생각. '샌프란시스코가 그리워.' 아, 만약 작가가 청년다운 패기를 내세우며 멜팅 팟이 어쩌고 했다면 화가 날 뻔 했다. 그는 스스로 '부끄럽지만, 이 만화는 그렇게 기발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솔직한 감정이 더 기발해 보인다. 모두가 정성껏 치장한 무도회장에서 폴리냐크 부인의 수수한 모습을 본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스스로가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 작은 일에 화내다가 신문 정치면을 보고 스스로 얼간이라고 자책하는 광경. 





 그래서 그는 저녁 7시에 벌써 잠을 자느냐는 말에 '실패만 하는 인생인 너무 피곤해서'라고 답하며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일자리를 구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뉴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사는 것이다. 특별한 일 없이 꾸려가도 종종 하루하루가 매달 서른 하나, 혹은 서른 개의 다른 얼굴로 보일 때. 죄책감이나 기다림으로 일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다가도 기다리던 전화 한 통에 '정말 다행이에요! 윽, 배고파.'라는 말이 나올 때. 그의 만화는 때때로 우습거나 불경스럽다. 비행기를 타기 전 소지품 검사를 너무 꼼꼼히 하는 직원, 엄마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앞서 집안에서 엄마가 보아선 안 될만한 소지품을 죄다 침대 밑에 밀어 넣지 못했을 때의 그녀는 난처한 미소를 띠고 있다. 클린턴이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텔레비전 앞에서 그녀는 '에이, 했네'라고 말하고 산타클로스 퍼즐이 정치와 같다는 점을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정치적으로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다는 점에서 온건한 자의식을 보인다. 다른 사람의 우울증에는 효과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우울증에는 놀랄 만큼 형편없이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서는 다른 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묘한 위로를 보여준다. 몰라서 안하는 게 아니랍니다. 뱃살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말이 주는 자학의 딜레마, 굳이 하려고 하지도 않고 건네는 작은 일상의 동질감.






 밤 아홉 시의 이웃집 음악 소리에 짜증을 내고, 텔레비전 재방송, 라디오 들으며 그림 그리기, 와인 한 병과 함께 일찌감치 침대에서 팝콘을 먹으며 책 읽기. 해고된 다음 드는 차라리 후련한 감정. 이따금 탈출해서 가장 퀴퀴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놀고 있는 그의 뇌,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돌아오는 오래된 지갑.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닌 장소를 각인시키는 각각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뀌거나 이어지는 배경과 풍경, 장소가 사람에게 말을 걸기까지는 걸리는 시간. 곧, 지문이 인식되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채우는 느낌과 생각. 중요한 것은 흐르지 않는다. 어떤 것은 쌓여서 역사를 만든다. 그는 2009년에는 전업 만화가가 되어 웨이트리스의 앞치마를 더 이상 입지 않게 되었다. 가족은 다른 방향으로 회복되고 있으며 술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어른이 될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물론, 어질러진 방의 소파에 앉아 피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읽는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은 변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게 변한다. 내 생각으로는 줄리아 워츠는 후자 쪽이다. 







 때로 잘못된 걸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더 많은 것들이 변하는 것 처럼 보여. 

 하지만 다 같은 곳에 있을거야. 망설이지 마. 좋아하는 곡을 틀어. 뭘 좋아하는지 말해줄래? 

 계속 해. 머리카락은 그대로 늘어뜨려도 돼. ... 곱슬머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해. 

 가끔은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괜찮아. ... 




 이미 해봐도 가질 수 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네가 원하는 걸 해. 

 너는 어디선가 너 자신을 찾겠지. 어디선가,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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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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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0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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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0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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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2 0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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