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비드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쁜 꿈을 잊듯 그녀를 잊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다듬고 꾸미고 나자, 그날 현관에서 그녈르 보았던 사람들은 일부러 재빨리 그녀를 잊어버렸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살고 사랑에 빠졌던 사람들은 잊는 데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녀가 했던 말을 한마디도 기억하거나 되풀이할 수 없게 되었고,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도 그녀를 잊어버렸다. 기억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어디서, 혹은 어째서 웅크리고 있었는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 물속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이었는지 그들은 영영 알지 못했다. 그녀의 턱밑에 난 미소에 대한 기억이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남지 않은 곳, 그곳에는 걸쇠가 걸렸고, 그 금속 걸쇠에는 이끼가 푸른 사과 빛깔의 새순을 붙여놓았다. 빗물이 빗발친 자물쇠를 손톱으로 열 수 있겠다는 새악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 시간을 나누고 쪼개지 않고 사는 여자.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과거의 악몽, 잔인한 미래에의 상상 대신 오늘을 사는 세서의 이야기. 악몽과 상상 중 어느 것도 택할 수 없는 지점에서 쓰임새 없이 노래하는 글자들. 그 글자들은 글씨가 되어 나를 오랫동안 휘감았고 나는 그 무용한 것들이 도리어 유용해지는 물결을 지켜보았다. 강물이라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을 것이었고 바닷물이라면 그래서 도리어 영원히 달이 이끄는 순환에 몸을 맡겼을 것인데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이것이 강물도 파도도 아닌 그 속에 발을 담근 사람의 이야기였다. 강물의 흐름과 파도를 지나쳐 그 안에 발을 담근 사람을 보는 힘. 나는 그것을 토니 모리슨의 도도한 문학적 성취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그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





 작가의 상상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건으로부터 이러한 들여다보기가 시작되었다.

 1856년, 켄터키 주 노예 마거릿 가너는 도망 끝에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에게 붙잡히기 직전, 두 살짜리 딸을 칼로 베고 다른 자식도 죽이려다 실패한다. 체포 후 재판에서 예상 밖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형사법과 재산법의 갈등이었다. 마거릿 가너를 인간으로 보고 살인죄를 적용하여 처벌할지, 아니면 도망노예법을 적용해 잃어버린 재산으로 간주, 무죄방면할지를 고민했다는데 마거릿 가너 본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녀는 끝까지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죽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유를 찾아주다가 노예의 삶을 피하는 차선으로 아이를 죽이는 마거릿 가너의 이야기는 흑인이 신문지상에 나타날 수 있는 접점, '아무것도 아닌' 것과 '유혈이 철철 넘쳐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것의 중간 지대에 있어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는데, 이것이 어쩌면 제도와 권력의 맹점이 아닐까. 이 눈먼 지대에 가장 먼저 있는 것은 제도. 토니 모리슨이 그녀의 인터뷰에서 지적하듯, 노예제는 무척 예측 가능한 무엇이다. 노예제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오히려 작가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제도가 있었고, 이런 일과 저런 일이 있었고, 이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토니 모리슨은 무척 진실하게 탐구했던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머리와 마음을 거쳐 손끝으로 나온,

그 목소리는 이러한 것들.


죽은 아기들의 원혼으로 가득한 집.

어느 날 돌아온 아는 남자.

그 남자를 맞이하는 도망 노예 여자와 그녀의 딸.

그 여자가 생사를 알 수도 없는 그녀의 남편.

결혼식 없는 그들의 결혼식.

남편이 평생의 돈을 내어주고 자유를 얻어준 그의 어머니.

어느 날 돌아온 그 남자는 몰랐던 그 여자의 살인.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손금도 없이 빛을 뿜는 빌러비드.





 형용사 빌러브드가 명사 빌러비드로 변하는 순간, 이야기는 빛을 발한다. 

 이 빛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세서, 결혼식도 없는 결혼을 하고 여자 흑인 노예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겪고, 즉, 살아남기를 자처하며 딸 덴버를 낳고, 덴버가 어머니와 죽은 아기 언니를 지켜보는 일. 

 하늘이 파랗거나 검은데 피부가 없는 사람이 물 위에서 다리 위에서 왔다가 사라지고 좋은 몇몇 백인이 있으나 나머지가 남은 일. 이 사이를 훑는 것은 토니 모리슨의 열정과 질척거림을 없앤 형용사와 동사, 명사다. 그것은 그저 증오에 차거나 그저 결의에 찬 것이 아니다. 그 안의 모든 단어가 발버둥 치거나 소실점을 향하여 가기만 했다면 이 소설은 하나의 한풀이에 그쳤을 텐데, 마지막까지 그러지 않는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그 집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 원혼을 견디며 살았지만, 1873년에 이르자 집에 남은 희생자는 세서와 그녀의 딸 덴버 뿐이었다.





 소설의 첫머리를 여는 것은 124번지. 그 집은 작가의 시선이 열리고 독자의 마음이 머무는 곳인데 하나의 숫자로만 나타난다. 

나는 모르지만,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 열린다. 

다른 곳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곳, 이 특별한 집은 124번지이다. 



 소설의 첫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소설이 집이라면 모두가 드나들고 가장 크고 육중한 대문이 있을 것이다. 곁문이나 뒷문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별채가 있을 수도, 헛간이 있을 수도 있다. 독자는 초대장을 들고 그 집 대문을 통해 정원을 걷고, 현관문을 열고 집주인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처음부터 집 대문을 쉽게 열어주지는 않는다. 작가의 시선이 집의 특정 부분을 보여주었다가 감출 때, 독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는 쪽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124번지, 갓난아이의 독기, 그 집 여자들, 세서, 덴버라는 정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때, 독자는 이 소설을 읽으려면 나름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 어떤 형용사도 없는 124라는 숫자 앞에서 자기 집 주소를 가진 흑인이 가질 당당함, 123번지나 125번지와 다를 무엇을 느끼기도 전에 드러나는 것은 한이 서린, 갓난아이의 독기, 이런 설명이다. 무엇도 아닌 나름의 '특징'을 가진 집. 언어가 가는 그 길을 벗어난 언어로 이루는 문학에는 제도가 아닌 인간이 서 있다. 일상을 느끼고, 그 일상이 깨어지거나 부서지는 것을 보고, 그 혼란을 딛고 일어나려 애쓰고, 어떻게든 무서운 기억을 잊으려 애쓰고,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도 해보고, 기억이 가하는 생생한 협박에 무릎을 꿇기도 하는 한 개인의 경험. 통제하면서 놓아주는 일. 노예 생활 이전에 개인의 경험. 그 생각의 생생한 무서움과 두려움, 재갈을 물려도 생생해지는 눈빛, 애써 가져오려 했던 귀고리, 아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그런 것. 





 세서에게 미래는 과거의 접근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녀와 덴버가 살고 있다고 믿는 '더 나은 삶'이란 단순히 과거의 삶이 아닌 삶이었다.

 폴 디가 바로 '그 과거의 삶'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잠자리로 기어들어왔다는 것도 더 나아진 일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 혹은 그가 없다 해도 미래라는 생각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덴버를 위해서도, 세서가 해온 대로 여전히 그애를 기다리고 있는 과거부터 그애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거릿 가너 사건이 대표하는 역사성에서 출발한 소설가 토니 모리슨은 그 한 여자를 책임감, 자유, 위치, 본질, 의미를 찾아낸다. 세서는 모든 것을 아는 여자, 하나의 열쇠 구멍이었다. 빌러비드라는 열쇠가 매끄럽게 들어가서 여는 잠긴 문이기도 했다. 맞는 열쇠를 찾을 것. 작가의 끈질긴 펜은 변명도 수치도, 당당함 마저 없이 아주 자명하게 모든 것을 고스란히 떠맡는 세서를 보여준다. 자식들에게 같은 삶을 되풀이하게 할 수 없어서 자식의 머리를 붙잡고 톱질을 할 수밖에 없는 엄마. 가너 부인에게 결혼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묻는 노예 여자. 학교 선생이라 불리는 노예 주인에게 수치스러운 취급을 당하는 노예 하나. 폭행, 성폭행, 매질을 당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녀는 커졌다가 줄어들고, 티끌만큼 작게 사라졌으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세서의 생각은 매우 단호했다. 자유가 지금과 같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촌스럽게까지 들리는 지금에 와서 판단하건대 세서 이전의 마거릿 가너는 토니 모리슨의 판단처럼 '지성과 잔혹성, 그리고 자유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불사할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그녀 앞에 빌러비드가 나타난다. 묘석에 디얼리 빌러브드 를 새길 수 없어서, 십 분 동안 몸을 허락하고 빌러브드라고만 새긴 묘석의 주인공이 나타나던 날, 세서는 죽도록 오줌이 마려웠고 양수가 터지듯 오줌 줄기를 뿜던 그때 빌러비드는 사막을 건너온 듯 물을 켠 다음 죽음에 가까운 잠을 잔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만 바라볼 수는 없는 관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였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파괴적인 관계. 그 관계의 사슬이 마침내 끊어지고 빌러비드가 진짜 빌러비드가 되는 것은, 세서의 얼음송곳이 빌러비드가 아닌 울타리 너머 아른거리는 모자를 향할 때였다. 단 하나,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간절했을 뿐이다. 자식에게 무서운 기억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의 목을 향했던 톱이 그 날을 다른 쪽을 겨눌 때, 이것은 기억하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잊기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바깥, 뉴욕 타임즈와 1987년 했던 작가 인터뷰를 보면 아래와 같은 회답이 드러난다.





''There are certain emotions that are useful for the construction of a text, and some are too small. Anger is too tiny an emotion to use when you're writing, and compassion is too sloppy. Almost everything that makes you want to write, or feel like writing, is not useful in the act of writing. So it's the mediation between those two states, the compulsion and all those feelings, that make you compelled.''


"소설을 구상할 때 몇가지 유용한 감정이 있지만 어떤 것은 너무 작아요. 분노는 글을 쓸 때 너무 사소해 보이고 연민은 질척거리죠. 사람들이 쓰고자 하거나 아니면 쓰고 싶어하는 거의 대부분은 사실 글을 직접 쓸 때엔 그리 유용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대부분의 느낌과 충동 사이를 잘 조절할 때 글이 나옵니다."

-토니 모리슨, 1987년 8월 26일, 뉴욕 타임스 인터뷰.




 육천만 명 혹은 그 이상. 소설의 앞장에 있는 그 숫자 앞에 생략된 단어는  devoted to 이기도, written by이기도 하지만 그 숫자는 어떠한 단어 없이도 오롯이 혼자서 그 힘을 다한다. 내쫓고 내쫓기지만 요요처럼 돌아오는 역사 앞에서, 그 과거가 미래로 연결되는 것은 오로지 세서가 과거의 정면으로 부딪쳐 자기 힘으로 돌파해 나가는 순간이다. 아기 유령처럼 불쑥불쑥 찾아와서 들여다보기만 해도 거울이 깨지고, 케이크 위에 작디작은 손자국 두 개가 찍히는 과거. 읽고 나면 세서의 텅 빈 눈빛 뒤로 작은 의문이 떠오른다. 

 당신에게는 그런 과거가 없습니까?



 


 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124번지 뒤로 흐르는 시내 근처에는 그녀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발자국은 아주 친숙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발을 대어보면, 꼭 맞을 것이다. 발을 빼면,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발자국은 다시 사라진다. 

 곧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발자국뿐 아니라 물과 그 물 아래 있는 것 전부가 잊힌다. 남는 건 날씨뿐이다. 기억에서 지워지고 행방이 묘연한 이들의 숨결이 아니라 처마를 스치는 바람, 혹은 너무 빨리 녹는 봄의 얼음이다. 그저 날씨뿐. 물론 키스를 바라는 아우성도 없다.


Beloved.








따옴표 속 인용은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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