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글쎄, 녹스는 것보다는 낡아서 못 쓰는 게 낫지! 그리고 난 사실 놀라울 정도로 건깅해. 감사할 따름이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루이틀 아무 일 없이 생각이나 하며 지내는 것도 참 괜찮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블란치가 말했다.

 조앤은 웃음을 터뜨렸다. 구슬이 굴러가듯 작고 유쾌한 소리였다. 

 "생각거리야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조앤이 말했다.

 블란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은죄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생각할 수 있지!"

 "맞아, 그래." 조앤은 내키지 않았지만 예의상 맞장구쳤다.

 블란치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너라면 그 일을 오래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고는 인상을 쓰면서 불쑥 말을 이었다. 

 "그러다 선행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네 인생에 주어진 축복들을 생각할 테고! 흠......모르겠다. 좀 지루하지 않을까. 궁금하네......" 블란치는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사람이 사는 시간이 모여 한 채의 집으로 눈에 보인다고 상상해 본다. 바닥을 반듯하게 만들고 고른 막을 입힌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뼈대를 세우고 벽을 세운다. 어떤 벽은 외벽이 되고 어떤 벽은 칸막이가 될 것이다. 지붕은 안전하게 머리 위에 있고 바닥은 발아래. 그러나 그 외의 것. 이를테면 창문이라든지 커튼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집에는 굴뚝이 있나? 페치카가 있을까? 빅토리아 시대의 구조인가, 혹은 바우하우스의 입김이 서렸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삶이 한 채의 집이라면 모든 집에 다른 색을 입히는 특별한 개성, 영혼의 울림 같은 창의 위치와 크기는 어떻게 이렇게 제각각일까? 그 창문을 우리는  옳고 그름의 영역에서 볼까, 아니면 아름답고 추함의 영역에서 바라볼까? 




 애거서 크리스티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여섯 편의 소설 중 한 편, '봄에 나는 없었다'를 읽노라면 이런 두 가지 영역이 조용히 서로 스미는 것이 느껴진다. 소설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만나는 미추의 미학적 구조와 영역, 주제라는 측면에서는 가치판단의 영역.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넘보지 말지어다'하는 명상과도 같은 잠언을 넘어서는 소설의 주제. 물론 작가가 빠른 속도로 쌓아올린 이 메시지를 책장을 덮고 나서는 머리에 보관할지 마음에 보관할지 손끝에 보관할지는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었으니, 이는 소설가가 꿈꾸는 최후의 마침표가 아닐까. 그 마침표는 주인공 조앤이 기차에서 만나는 동창 블란치와의 대화로, 그녀가 회상하는 어떤 사건으로, 낯선 곳에서 쓰는 편지로 마침표 이전의 안개로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바버라에게

 이번 여행에는 별로 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월요일 저녁 기차를 놓쳤고, 여기서 며칠 발이 묶일 것 같다. 하지만 평화롭게 햇볕이 좋아서 난 무척 행복하단다.


조앤은 손을 멈췄다. 이제 무슨 말을 쓰지? 아기? 아니면 윌리엄의 안부? 바버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던 블란치의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래! 블란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블란치는 바버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척 이상하게 굴었다.

 마치 바버라의 엄마인 조앤이 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바버라는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을 거야."이 말은 바버라가 그때까지 괜찮지 않았다는 뜻일까?




 기차를 기다리며 낯선 곳에서 발이 묶인 중년의 여성 조앤의 생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구불구불한 비단길처럼 사막을 헤엄치다가 어느 순간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일평생 하지 않던 일, 뒤돌아보기를 거쳐 마침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까지 알아가는 길을 애거서 크리스티는 속도감 있게 드러낸다. 쓰는 이의 펜 끝에서 이루어졌던 속도감이 읽는 이의 눈 끝에서 기분 좋게 겹치는 순간. 추리 소설이 아닌 서정 소설의 외피를 썼지만 추리 소설 작가로서 발휘하는 겹겹 쌓인 단어가,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였던 여자 메리 웨스트매콧의 책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앞서 나온 어떤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앞서 나타났던 징조가 끝부분에 다시 나타나니, 독자는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도 앞으로 다시 돌아가 그 낱말, 그 단어, 그 목소리를 마침내는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가 경험하기 전 이미 조앤이 경험했던 일. 즉 그 생각의 구불구불한 길에서 언뜻 마주치는 첫모습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런던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타운, 성공한 변호사의 아내 조앤. 정원을 잘 가꾸고 봉사활동을 하며 삼남매를 둔 중년의 여자. 성공한 변호사인 남편 로드니, 일찍 결혼한 에이버릴, 최근 중병에 걸렸으나 조앤의 간호를 받았던 바버라, 변호사가 되지 않은 것이 좀 아쉽지만 하고 싶은 농장 일을 하는 토니. 




 그렇다면 이런 대화는 어떨까. 

 





 "빌어먹을 사무소!" 로드니가 투덜거렸다. 

 "아, 로드니, 당신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무소를 싫어하지 않아요."

 "아니, 난 싫어해. 오 년 동안 거기서 일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는 내가 똑똑히 잘 알아."

 "적응할 거에요. 게다가 이제 사정이 다르잖아. 아주 달라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결국은 업무에-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관심을 갖게 될 거에요. 두고봐요, 로드니. 결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질 테니까."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판단하는 이상한 대화라고만 보기에는 더 많은 무엇을 담은 단락이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속단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는 분명, 다른 정체가 불명확한 어떤 도마뱀이 드나들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조앤이 애써 막고자 했던 생각의 어떤 흐름이 독자에게도 스며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부분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을 빛이 가로지른다면, 그 빛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어둠이 곧 우리의 진짜 모습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다 보면 마주치는 길 끝. 결국, 문제는 나머지 밝혀지지 않은 어둠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가 아닐까? 




 미궁에 갇힌 이가 손끝에 잡은 가느다란 실 처럼 애거서 크리스티가 내미는 실낱같은 의혹을 따라 이 책을 읽어내려가 보면, 공간과 사유가 어우러진 미묘한 이중주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이중주는 짝수가 아닌 홀수이며 협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이다. 또한, 피아노와 목소리로만 허공을 떠돌다가 어느 순간 목소리만 남아 물방울처럼 귀를 조심스레 두드린다. 




 그 물방울은 불쑥 왈칵 조앤의 마음을 두드린다. 도마뱀은 물방울이 만든 구멍을 드나든다. 사막에 고립되어 생각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조앤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허물었다가 세우고, 그림자를 바라보고 그 허무한 그림자 속을 걷게 된다. 생각은 물살처럼 흔들리고 특별한 것이 없어도 묘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기억한다고 믿었던 사건과 실제 있었던 사건이 다르다는 것을, 애거서 크리스티는 조앤이 바라보는 신기루를 통해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비유로 읽는 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 중반에서 조앤이 신기루를 보며 신기루 하면 나무나 마을이 떠올랐지만, 지평선 너머 물살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훨씬 더 구체이고 생생한 무엇이라고 깨닫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블란치가 했던 말이 허공을 떠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다시금 떠오르는 이 말은 인간이 얼마나 얄팍한지, 그리고 사람이 제각각 얼마나 다른 생각의 층위를 지녔는지를 말하는 중요한 실마리이기도 하다. 조앤과 같이 세상을 규정한 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지닌 규율, 의무, 가치, 판단, 소속감이 세상 한 부분의 지축을 지탱한다면 블란치와 같은 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내는 삶의 다양한 층위, 드러나지 않았던 어두운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조앤의 남편 로드니가 드러내는 삶의 진실, 존중, 통찰력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인데,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무척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바위섬이 모래의 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구조를 레고 블럭처럼 하나씩 쌓아올려 조앤이 만든 것이 실은 커다란 허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겪었던 사건을 하나하나 해체하면서 보여준다. 스러지면서 일으켜 세우는 한 사람의 어떤 집.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변화를 독자가 기대하는 찰나 로드니의 슬픈 혼잣말이 들린다. 꼭 그래야 한다는 필연, 인간이 자기 삶을 온갖 변수로부터 보호하려는 통제력, 자신의 삶을 안전함으로 도배하려는 오만함.

그 이전에 의식 밑바닥에 깔린, '판타지'로 분류하는 빛이 비치지 않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앤에게는 안전한 삶으로 존재한다. 타인의 겉을 보고 속을 판단하려는 자의 치기 어림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이 이야기는 조앤이 마침내 성찰 끝에 다시 기차를 타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왜 하필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런 대화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일까?




 에이버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앤은 정신을 차렸다.

 "기차에서 만난 부인도 그런 말을 하더구나.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어. 아주 지체 높은 부인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듯했어. 난 믿기지가 않는구나. 히틀러는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거야."

 "글쎄요, 모르죠......" 에이버릴이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아무도 전쟁을 바라지 않는단다, 얘야."

 "네, 하지만 사람은 때로 바라지 않던 일을 당하기도 해요."

 "나는 이런 대화가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을 집어넣거든." 조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에이버릴은 미소만 지었다. 



 소설 속에서 남편 로드니가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구절을 물어볼 때 머뭇거림 없이 전 소절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도 조앤, 에이버릴이 유부남 의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른의 단순한 지혜로 에이버릴을 뜯어말리던 사람도 조앤, 로드니가 레슬리를 잘 도와주는 것에 흡족해하던 것도 조앤.

 소네트를 그렇게 암송하고 시와 소설을 탐독하면서도 작가가 숨긴 뜻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던 것도 조앤, 에이버릴이 그토록 탐닉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통찰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사람도 조, 실은 로드니가 레슬리를 그토록 사랑했으며 자신에게는 넌더리가 났다는 사실에서 도망치던 것도 조앤.




 이 끝에 드러나는 얕은 한숨이 로드니의 것이라는 것이 독자로서 슬프다면, 아, 다시 탄식. 




 어떤 이에게 성찰은 공간을 옮겨가거나 상황을 급반전시켜야만 가능해지기도 한다. 조앤이 사막에 가서야 자기가 도망쳐왔던 진실을 마주할 때 변화를 감지했건만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 밝고 유능하며 분주한,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조앤을 볼 때 나오는 로드니의 중얼거림은 곧 독자를 향한 것이었다. 책장 속의 조앤은 그렇게 특출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당신을 닮은 사람입니다.' 라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펜을 내려놓으며 하는 혼잣말이 들리기에 독자는 다시금 의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진실과 감당할 수 있는 허울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우리는 잘 판단해야만 하지만, 이것 역시 관성의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리라. 







-따옴표는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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