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쪽에서 부는, 남서쪽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에식스로 가게 됩니다. 북해를 횡단하려면 바람이 줄곧 서쪽에서 불어줘야 하지요. 하지만 프랑스로 가려면 바람 북쪽에서 불어줘야 하는데, 그런 바람이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변덕스러워서요."



 곧 잃고

 곧 쓰러지고
 다시 잃을 것이었다가
 나는 그러나 이미 잃었음을 깨닫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작품.



 줄리언 반스의 'levels of life'는 그러한 길에 올라선 여행자의 한숨. 



 영국 맨부커상과 프랑스 메디치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상을 휩쓴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작품을 떠올려 본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온도의 사랑 이야기. 혹은 세상에 없는 이의 그림자. 모든 것이 허물어진 후 도착한 끝의 시작, 삶과 이 세계가 이끈 교집합과 합집합.

 

 

  

 사랑을 이야기할 때 느끼는 관계의 심연(내 말 좀 들어봐). 글쓰는 사람이 풀어야 하는 숙제(플로베르의 앵무새).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자신의 갈 길을 갈 때 인간이 느끼는 울먹거림의 회한, 그 다양한 층위(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단어의 분명한 뜻과 장르의 다양한 얼개, 통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글 대부분은 '팻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로 시작했다. 



 헌사의 주인공 팻 카바나가 단 한 번도 등장하 않는, 그녀 뒤에 남겨진 줄리언 반즈의 이야기.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라는 한글 제목으로 나온 'levels of life'는 영국을 대표한 문학 에이전트이자 줄리언 반스의 평생의 문학적 동지인 팻 카바나의 죽음을 읽는 줄리언 반스의 지도이다. 양피지에 쓰인 모르스부호와도 같은 지도. 겪지 않은 이는 볼 수 없다. 알 수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 팻 카바나가 죽은 다음 줄리언 반스가 남긴 자취를 '언젠가 내게도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참조해야겠다'라고 간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나도 검은 양복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위도와 경도의 자취. 아무런 도움도 주고받을 수 없는 고립된 자의 말소리.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닥칠 것에의 예언.
 이미 겪은 일의 기록. 
 이야기 세 개가 이 픽션-논픽션에 있다. 

 '비상의 죄'에서는 사진과 비행을 함께 시도하여 땅 위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본 풍경을 선사했던 나다르의 이야기가, '평지에서'로 페이지를 넘기면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와 모험가이자 군인인 프레드 버나비의 가상의 사랑 이야기가. 그다음 이어지는 '깊이의 상실'에서 반스가 하는 이야기가 팻 카바나의 것이다. 이 마지막 챕터에 이르면 앞서 우리가 바라본 하늘과 땅이 지하로 연결된다. 이 챕터 세 개, 이야기 세 개, 커플 세 쌍이 우연을 되풀이한다. 그림자의 춤이 겹쳐서 줄리언 반스와 팻 카바나의 손을 이끈다.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사라 베른하르트와 프레드 버나비가 언젠가 기구에 올라타듯, 첫 번째 이야기의 나다르가 사라 베른하르트를 사진기에 담듯, 나다르가 헌신적으로 아내를 간호하듯, 반스가 카바나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듯. 




 '팻에게 바친다.'로 시작하여 2012년 10월 20일 런던에서 줄리언 반스'로 끝맺는 기억.
 그 기억 도중, 반스는 여전히 죽은 아내와 장난을 친다. 죽은 아내는 도로 그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뭔가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이끈다. 죽었으나 여전히 나타나 장난스레 그림자를 잡아채다 사라지고 몇몇 지엽적인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팻은 떠돌고 있다. 그녀는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반스를 통해 나타난다.
 죽은 그녀의 그림자는 집안 곳곳에, 그가 숨 쉬는 공기에 머문다. 그녀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고 그는 살았으나 살아있지 않다. 



 살아있는 사람이 먼저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나서 느끼는, 자신도 모를 어느 공간의 이야기. 읽노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파스칼 키냐르가 떠오른다. 중심도, 길도,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 생을 느끼는 일. 뒤섞인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하나에 흡수되어 어떤 글도 쓸 수 없는 때를 살아가는 일이라고 뒤라스가 말했었다. 저 세상은 여기처럼 견고하지 않아, 당신 나룻배는 이미 썩었지만 바람 말고는 만질 것이 없다고 말했던 마랭 마래의 죽은 아내가 파스칼 키냐르의 손끝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 지독한 상실 한 묶음 앞에서 위로는 길 잃고 기억은 더욱 난폭해진다. 견고해서 난폭하고 난폭해서 날카로워지는 미래의 역사. 



우리는 사라 베르나르가 빗방울 사이를 피해 다닌다고 주한 것처럼 총알 사이를 피해 다닌다. 그러나 언제나 느닷없이 목을 찔러오는 창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랑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몇 가지 층위가 서로 스며들어서 세 번째 이야기,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들린다. 비탄이 바꾸는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영속성. 반스가 말하는 상실의 사막, 무심의 호수, 황무지가 된 강, 자기연민의 습지, 기억의 (지하)동굴. 반스는 이 지도를 가지고 선 자는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내장이 더 많이 파열된 쪽이 누구인지의 문제도 여기서는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오로지 부조리함 밖에 느껴지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반스가 내세운 메타포는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나다르가 카타콤에서 찍은 사진, 두 번째 이야기의 소파 쿠션을 집어삼켜 총에 맞아 죽은 보아 뱀이었으나 결국, 그 자신은 메타포조차 필요치 않은 경우임을 느낀다. 이전에는 아내의 것이었던 열쇠고리에는 집 현관 열쇠와 묘지 뒷문 열쇠가 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이게 내 인생이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속으로 내려가고, 또 기억 속으로 내려간다. 그렇다. 예전의 기억은 과연 돌아온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두려움을 배우고, 다시 찾은 기억이 원래 그대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는가. 당시 거기 있었던 사람이 더 이상 확증을 해줄 수 없게 되었는데. 우리가 한 것, 우리가 간 곳, 우리가 만난 사람들, 우리가 느낀 감정을. 우리가 함께하게 된 사연을,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씻겨가고 이제 '나'만 남았다. 쌍안경의 기억은 단안경이 되었다. 



 상실의 슬픔 앞에서 아니 에르노는 애간장이 끓는다, 마음이 벼랑에 내몰린 것 같다, 이런 표현을 떠올린다. 줄리언 반스는 프랑스어로 이미 죽은 팻의 안부를 묻는 이에게 답하면서 '내가 이걸 이제 프랑스어로까지 말해야 한다니.' 라고 생각한다. 지독한 아픔을 느낀 이가 혼자가 아님을 떠올리는 아니 에르노와 이런 상황에서조차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줄리언 반스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것인가. 앞서 말한 비교가 쓸데없이 지는 지도인데.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인가, 내일이 어제였던가. 휘청이고 들끓다가 땅속으로 푹 꺼지는 이 지도를 들여다보면 언젠가 바람이 내 속에서 멈추었던 날이 있기나 했었나 의아해진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깊이가 궁금해진다. 곧,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건만 막상 알고 나면 고개를 젓는 존재 역시 인간이 아니었던가.




 균형, 속살, 끝. 놓치지 않는 기억 한 자락.

 

 

 

 이 책의 감정적인 중심이면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천칭 같은 무게중심을 잡는 챕터가 가장 마지막 챕터임을 마지막 장에 이르른 독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앞서 하는 이야기 두 개는 물론 어떤 이들의 앞선 경험은 기름과 물처럼 겉도는 것이 아니라 수채화의 덧칠처럼 함께 어우러지고 스미는 것임을, 반스의 나지막한 음성이 이야기한다. 반스는 애도와 슬픔의 위험한 매혹까지 붙잡는다. 신중하게 선별해서 조심스레 드러나는 명확한 감정과 또렷한 표현. 이 책이 술자리 돌림노래 같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제 나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힘은 바로 이런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우주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우주가 그렇게 끝낸 일의 부산물이다. 어쩌면 비탄 또한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그 아픔과 싸웠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슬픔을 극복했고, 우리의 영혼에서 녹을 긁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때는 비탄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린 때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그 모든 건 어디선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산들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는가? 에식스로? 북해로? 만약 이 바람이 북풍이라면, 그래서 운이 좋으면, 우리는 프랑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따옴표 글은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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