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이었다가, 그 사람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히는 순간. 

혹은 '여름을 보내고 나는 우네. 가엾은 내 계절이 사라졌네.' 라고 읊조리는 남자. 열정과 열망 사이 엉거주춤하고 자리 잡은 남자. 평범해서 보편적인 이야기. 오백일의 썸머는 모든 케케묵은 해묵은 악감정을 싱싱한 횟감 건지듯 끌어올리는 영화였다.





 나는 여기서 연애 끝에는 결국 bitch(이 단어는 아예 영화 도입부 나레이션 첫머리에 나온다)가 되는 여자에 관한 이미지라든지 너무 소심한 남자의 표정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안과 밖에서 이야기해서 이미 내가 숟가락을 얹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대신 나는 익숙한 그 집 앞을, 자기연민을, 반성을 생각하고 싶다. 마음이 가난하고 입술이 못생겨 빈집에 사랑을 가두었음을 깨닫는 사람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생각을. 





 그 모든 보편성과 그 모든 특별함은 어디로 갔을까. 자신만이 아름답다는 환상, 자신의 사랑은 더없이 빛난다는 착각. 자신은 누구보다도 고운 결을 가졌다는 난데없는 횡포. 이것이 모여 사랑을 만든다면, 진짜 그것은 어디 있을까.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였다. 이것은 폄하나 곡해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다. 뮤지컬 기법, 쇼트 뒤섞기, 그래픽 사용, 음악을 제3의 화자로 빌려 오기 등. 사랑에 들떠(열정) 춤을 추며 거리를 걷는 톰을 보았는데 그다음 순간 만신창이가 되어 발을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분명 거울 속엔 액션 스타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좀 더 보면 레지나 스펙터의 <히어로>가 나온다. 노래 가사를 적당한 순간에 잘라 대사로 활용하는 기법이야 워낙 많은 영화에 나왔으니 새로울 것도 없으며 뮤지컬은 아예 바즈 루어만의 특기가 아니던가. 사랑은 질리도록 보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내러티브가 개성 없음이 개성인 평범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주목할 만한 연기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아우라가 강하지 않아 상대 배역의 틀을 구속하지 않고(이를테면 키아누 리브스가 이 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백지와도 같아  무엇이든 그 얼굴 표정 위에 쓸 수 있는 배우. 마크 웹 감독은 주이 디샤넬, 조셉 고든 레빗을 투 톱으로 내세우면서 '과연 감독이 원하는 바를 반영할 수 있는 배우란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하는가?'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헐리우드가 지난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찾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이기도 하다. 지난 시대에서 살아남은 어떤 배우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대조가 더욱 극명하다. '레전드', '아웃사이더'와 같은 청춘물을 찍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청춘스타였으나 지금 유일하게 살아남은 톰 크루즈를 보면 그렇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맷 딜런에 기세가 눌렸으나 지금 누가 그들을 주목한단 말인가? 그 극명한 개성이 그를 살렸으나 지금의 조셉 고든 레빗은 완벽히 다른 예를 보여준다. 크리스 파인, 라이언 고슬링, 채닝 테이텀과 같이 개성 또렷한 배우를 뒤로하고 배트맨, 인셉션, 링컨 등의 필모그라피를 기록하는 조셉 고든 레빗을 바라보면, 아마도 그가 다음 세대의 더스틴 호프먼 같이 변화무쌍한 표정을 선보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할 수 없이 지루하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톰이 썸머를 바라볼 때엔 스미스의 노래가 흐른다. 내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 혹은 우리가 어떤 관계냐, 라고 물을 때엔 카롤라 브루니의 'someone told me'가 흐른다. 내러티브의 순차적 구성이라면 클리셰가 되었을 많은 장면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리듬감을 지닌다. 착각과 현실, 꿈과 이상, 시작과 끝. 그 대조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두 사람 각자가 서로가 얼마나 다른가를 최선을 다해 선보이는 작업일 뿐이다. 이 영화가 67회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에 올랐다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마크 웹이 장르의 차용, 사운드트랙의 활용, 장면의 편집과 재배치, 고전 영화 패러디, 화면 분할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테크놀러지는 무엇을 향한 것인가. 더더군다나 모두나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이야기해 더는 새롭기 어려운 로맨틱 코미디에서.








 시작이 어둡다. 급박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분홍빛이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리라 기대하는 순간 시작을 여는 시퀀스는 사랑의 위기. 팬케이크를 먹다가 '우리 이제 그만 보자.'라고 말하는 썸머의 얼굴이 보인다. '네 이야기가 아니야. 이 못돼먹은 엑스' 라는 내용의 자막이 깔릴 때부터 알아보았건만 익숙한 그 공식은 뒤틀린 채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야 사랑의 시작-위기-갈등 해소-행복한 결말이 아니던가. 그 익숙함을 깨뜨릴 때 우리는 건축을 바라보는 듯한 재미까지 느낀다. 극 중 톰이 건축에 관심을 두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썸머의 팔등에 그릴 때 풍겨오던 달달함이 잿빛 도시로 사그라지고, 여름 다음 가을이 올 때 그것을 맞이하는 그가 미소 짓게 되는 것은 마침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시간의 틈이 손끝에 만져져서이지, 그 우연성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닌 앞으로 올 어떤 일이었다. 





  그 앞으로 올 일. 복사기 앞에서의 키스, 회식 자리에서의 노래, 서로의 취향을 바라보기, 영화 함께 보기, 썸머의 집에 가서 그녀가 매일 보는 벽과 천장을 보는 일. 

 

 

 이미 지나간 것. 영화 '졸업'을 보고 우는 그녀에게 거절할 만한 제안만 골라서 하기,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스미스 노래를 틀어주고 알아들을 거라 기대하기, 자신만의 관심을 그녀에게 투사하기.






 운명과 판타지를 착각하는 일이었으니, 그 모든 실수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모든 이미지와 유사성을 지닌 어떤 것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영화의 시작부터 감독이 원했던 것이 분명해진다. 삐걱대는 문과 덜컹대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살인을 암시하듯 이케아 매장을 구경하는 톰과 썸머의 모습, 복사기 앞에서 우스꽝스런 노래를 부르는 썸머와 그것을 들으며 킥킥대는 톰의 모습 등은 분명 행복한 연인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 뼈대이자 동시에 뒤트는 디스크의 통증과도 같은 조각 모음이다. 장르 영화의 공식, 관습, 도상.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 관습, 도상. 즉, 톰과 썸머의 공식, 관습, 도상. 이 세 가지가 500일의 썸머를 겪는 동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다. 처음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즉 그 과정을 겪는 한 사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지 그 감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고백과 토로가 있었다. 그것을 아우르는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오백일의 시간이었다. 연애란 어차피 사람이 맺는 가장 강렬한 대인관계의 일종이다. 아마 복사기 앞에서 키스한 다음 톰의 몸속에서는 도파민, 노레피네프린, 세로토닌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이케아에서 썸머와 함께 가구를 구경할 때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었을 것이다. 온갖 호르몬의 폭발을 겪으며 생각하고, 꿈꾸고, 착각한다.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때가 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톰이 썸머를 몰랐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몰랐음에도 마지막까지 몰랐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 줄리언 반즈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왔던 말, '너 끝까지 감을 못잡는구나. 아예 그냥 그렇게 살지그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지는 찰나, 뒤따르는 고백이 있었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목소리.






 관계 대부분은 다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그 결정이 남지 않는 관계도 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자신과의 로맨스야말로 일생의 로맨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몰랐다는 것을 시인하는 톰의 목소리가 진지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으로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흐름에서다. 오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타인이 남지만, 이해로 끝나는 관계에는 자기 자신이 남는다. 










 환상과 착각, 오해와 등 돌림. 생각과 분석, 돌이킴과 목마름. 사랑했던 그 이유로 미워하거나 증오하고 마침내는 무관심하게 된 다음 어여삐 어루만지게 되는 대상. 기억의 윤색과 보정을 거치면, 사람 마음속에서는 모든 관계가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터널이나 동굴을 통과할 때 뒤돌아보는 자와 뒤돌아보지 않는 자의 귓가엔 아마 다른 소리가 들릴 것이다. 어떤 한 시기가 끝나고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라는 것은 마침내는 돌아보지 않을 때일 것이다. 모든 것에의 이유가 결국,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누군가를 위한 속이 빈 인사가 아닌 자기 자신을 이해한 다음 스스로 건네는 악수 같은 것이 가능한 순간. 종종 사람은 문을 잘 닫기 위해 문을 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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