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떠날 것이라는 말과 겹쳐질 때. 끝을 묻지 않았던 말끝이 끝을 닮아있을 때. 아니 에르노는 그 순간을 칼같이 써내려간다. 질문과 추측. 확신과 대답. 귀에 닿는 노크처럼 무언가의 확신이 아니 에르노의 머릿속에서는 경험과 지식, 교양, 직업, 이 모든 것이 연결된 글쓰기라는 작업을 거쳐 자기 자신에게 투사된다. 타인에게 전달되는 이 글쓰기는 그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며 글쓰기가 끝이 났을 때 개인은 풍경과 사건 뒤로 숨고 보이지 않는다. 그 뒤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곧 글을 읽는 나 자신을 보는 일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의 골을 견뎌내지 못해 커피, 냅킨, 접시 수집, 자동차, 개인의 성취, 애완견 등의 주제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그녀는 이해한다. 그러나 늘 그녀가 택하는 것은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이 아니다. 노 저어 올 수 있는 잔잔한 호수가 아닌 쉽사리 넘보지 못할 풍랑이 몰아치는 격한 감정의 상태. 죄수가 간수의 호출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듯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그녀를 알아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남자의 그 여자는 그런 의미에서 끝까지 잘 먹고 살 살아주어야 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된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에르노는 그녀를 발명해 내야 했을 것이다. 나비의 날개 같은 란제리, 성적 충동을 새롭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사건, 가장 힘든 때에 쓰는 연애편지, 혹은 자신의 다른 남자 등으로.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위태로움과 균형을 아니 에르노는 겪는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이미 입에 든 약을 삼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듯. 그러니 결코 이길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었다. 그들 마음속의 진흙탕과 무지개는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끝내 겨우 그것에 닿았다 생각할 무렵 진흙탕은 굳고 무지개는 사라진다.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책 속에서
아니 에르노에게는 뒷걸음질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순수한 지적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될 앎에의 기쁨을 '그 여자'의 연락처를 찾아내며 느낀다. 그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방이 수화기 너머 아니 에르노가 만들어낸 침묵에 공포를 느낄 때 원시인이 사냥에서 느꼈을 법한 쾌감을 얻는다. 아니 에르노의 질투는 물끄러미 속을 응시한다. 그 속이 비지 않았음을 알아낸다. 심연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심연에 동화되는 과정을 용케 피해 가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실재하는 실재처럼 쌓아나간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이때 그 남자가 아니며 그녀가 질투하는 것은 그 여자가 아니다. 에르노는 성적인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만족감 너머의 무한함. 그 무한함이 글쓰기로 재현될 때 그녀는 그것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단순하게 바라본다.
상대방의 말에서 공백을 찾아내어 빈틈을 파고든다. 감각과 반응을 추적하여 아니 에르노는 질투를 다시 확인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과 글쓰기를 눈앞으로 불러내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작 당장 글을 쓰는 그녀 자신을 이기지는 못할 것인데 에르노의 글쓰기는 언제나 실재를 의식한다. 작은 쪽. 말 한 마디. 사소한 이야기.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말. 모든 것이 그녀의 실재하는 무엇이 된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끝내 혀끝에 맴도는 말 한마디가 아닌 눈앞에 보이는 공허감이었다. 사람이 마땅히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아니 에르노는 써내려간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가엾고 순진한 한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보고 싶은 유혹에는, 우물 안으로 몸을 수그려 저 깊숙한 곳에서 떨고 있는 자신의 영상을 바라볼 때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무시무시한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도, 어쩌면 바늘을 꽂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강렬한 의식. 그때 지각할 수 있는 사랑이 허락하는 공간 허용과 감정 격차. 아니 에르노는 그의 신체와 감정이 그녀에게 반응하는 순간을 잊지 않는다. 그 순간 그곳에는 언제나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이 있었다. 늘 그렇듯,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처럼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을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고 불러내어 재현한다. 어느 순간 자신의 그 놀라운 집중력이 사그라진 다음 남는 자명한 사실. 내가 무엇을 했나. 내 얼굴에 그때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던가. 거울에 비친 낯선 사람이 아닌 내가 보고 느끼고 알아온, 내 일생을 통해 일구어낸 생생한 형상으로서의 나 자신. 아니 에르노는 그런 존재를 발견해낸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나는 그 시기에 가졌던 욕망, 감각, 행위들을 추적하여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내가 겪은 대로의 질투를 써나가고 있다. 내게는 그것만이 이 강박관념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본질적인 무언가를놓칠까봐 두려워한다. 요컨대, 실재에 대한 질투로서의 글쓰기.
-책 속에서
가상의 그 여자를 당해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순간 누구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그 무엇보다 빠르게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순간이면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머릿속과 내 모든 신체 기관이 어떤 한 존재로 채워지는 때가 있다. 집중력과 사고력이 단 한 점을 향해 달려갈 때 나는 사라져버린다.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순간의 마지막 남은 나, 혹은 겨우 닿을락 말락 사투를 벌이던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를 오감으로 느끼기를 지나쳐 한없이 단순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세계는 늘 끝나 있었다. 가장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은 보내지 않은 편지를 내 서랍에서 발견할 때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토록 다양한 모습의 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니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일상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타인을 통해 다시 검사하고 바라보아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을 차근차근 일러준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지금 이 순간을 명확히 바라보기 위해 필요하다면, 아니 에르노의 화살표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성적 쾌락에서 모든 것을, 쾌락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사랑, 융합, 무한, 글쓰기의 욕망. 이제껏 내가 그에게서 얻어냈다고 여기는 최상의 것. 그것은 냉철함으로, 감상주의에서 탈피해 갑자기 단순하게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책 속에서
Whistler,
Nocturne in Grau und Gold, Schnee in Chelsea
Oil on panel. 1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