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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4년 1월
평점 :
[우리는 사랑하는가](박홍규 지음/필맥)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저술에 관한 책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정작 사랑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부자 아빠’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사랑’은 지나버린 옛 추억이거나 대중가요의 통속적 언어이고, 성공한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월계관 같은 물질적 가치가 되버렸다. 그런데 뜬금없이 갑자기 왠 사랑타령이란 말인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근대사회 속에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탐색하고자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사회분석의 정치한 개념을 제공했지만, 인간의 내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경시했으며, 한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인간본성을 탐구하여 새로운 탐색도구를 마련해주었지만, 지나치게 개인적 측면을 강조함으로 개인의 내면을 형성하는 사회구조적 측면을 외면해왔다. 그것은 소중하지만 부족한 이론이었다. 물론 그가 비판한 것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만은 아니다.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나 근대의 계몽주의사상도 그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는 영혼의 혁신을 설교하고 사회 질서의 변혁을 무시했으나, 이런 변혁 없는 영혼의 혁신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아무런 효과도 갖지 못한다. 계몽운동 시대는 최고 규범으로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판단과 이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정치적 평등을 주장했으나, 정치적 평등이 사회 경제 조직의 근본적 변혁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형제애가 실현될 수 없다고 하는 점을 무시했다. 사회주의, 그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경제적 변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인간 내적 변화의 필요성을 무시했다.”([건전한 사회] 중에서)
그가 보기에 근대사회는 죽음애적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죽음애’는 환경파괴와 전쟁, 인종차별과 국수주의, 사회적 무관심과 자기도취, 사디즘과 마조히즘, 질서숭배, 중앙집권화와 집중화, 권위주의, 인간의 기계화, 소유양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정반대에 있는 것이 바로 ‘생명애’이다. ‘생명애’는 생산적 방향으로 자신을 동화하고 사회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평화와 인류애적 평등, 사회적 연대와 의지적 자기실현, 아나키(자율)와 분권과 자치, 겸손과 용기, 신념과 훈련, 자유와 불복종, 존재양식, 궁극적으로 사랑과 맞닿아있다. 그는 사랑이야말로 종교를 뛰어넘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이다.”([정신분석과 종교] 중에서)
물론 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통속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내적 성찰과 훈련, 자신을 넘어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그리고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사랑의 기술] 중에서)
문제는 그러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야한다. “불복종은 자유를 위한 조건이며, 동시에 자유는 불복종을 위한 조건이다.”([불복종에 관하여] 중에서)
자, 이제 어찌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인물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