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 - 이 땅의 모든 청소년에게 주는 철학 이야기
윤구병 지음, 이우일 그림 / 보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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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는 미친 나라다. 교육부가 앞장 서서, 보충수업을 강조하고, 자율학습(본질적으로 타율학습)을 조장한다. EBS방송국의 교육내용에서 수능문제가 많이 나온다고 선전한다. 이 모두가 지나친 사교육을 타파하고, 공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란다. 좋다. 그렇게 해서 기형화된 사교육이 사라지고, 사교육비의 부담이 줄어들고, 공교육이 살아난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백 번 찬성한다.

그러나 나는 기대했었다.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의 교육문제의 핵심은 사교육과 공교육의 대립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입시교육이며, 학교 또한 입시교육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온 나라가 입시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온 나라가 입시교육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민족, 민주, 인간화’의 슬로건을 들고 나와 온갖 고초를 겪다가 합법화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아이들을 8시에 불러놓고 10시까지 붙잡아 놓고 있는 교육현실에서 전교조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신문을 살펴보아도 방과 후 특기적성수입이나 자율학습이 사교육비 절감에 지대한 효과를 보고 있다는 선전만 있을 뿐, 방과 후까지 아이들을 잡아놓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항의하는 교육자 한 명을 보지 못했다.

과거에는 입시공화국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인교육이니 참교육이니 외쳐댔지만 이제는 그나마 슬로건이라도 전인교육이나 참교육을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공교육이 정상화되어야 사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지만 학교선생을 아침 일찍부터 불러놓고 밤 10시, 심하게는 12시까지 일시키는 교육현장이 과연 정상화란 말인가? 근래 들어 나는 농담으로 “학교선생 안 하길 정말 다행이야”라고 후배에게 말한 적이 있다. “저렇게 살다간 한 달도 못 버텼을 것이야.” 그렇지만 이러한 넋두리는 결코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다. 내가 윤구병의 <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보리)라는 책을 읽은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정상적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윤구병 선생은 잘나가던 철학교수직을 때려치우고 지금 변산반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용감히 실천할 줄 아는 교육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나는 지금 너무도 당연한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외계의 언어를 보는 것 같다. 시대가 흘렸기 때문인가. 이제 정상이 비정상이 돼버렸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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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문구 - 이문구 문학 일기초 동료작가들이 본 인간 이문구
이문구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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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가장 곤혹스러운 일을 꼽으라면 단연 일기쓰기가 될 것이다. 매번 방학이 되면 방학생활이라는 책자와 함께 과제로 주어지는 것이 일기쓰기였다. 그리고 그 일기는 비밀이 보장되지 않은 제출과제용이었다. 방학기간 내내 놀다가 개학을 며칠 남겨놓고 거의 한달치를 창작해야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일기쓰기는 즐거움이나 자아성찰의 매개가 아니라 고통 그 자체였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제출하는 일기과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기쓰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일기쓰기를 원초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해야할 일기가 남에게 공개되었다고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초등학교 이후로 일기를 쓰지 못했다. 설령 썼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검열의 과정을 밟아야했다. 자신이 자신에게조차 진실해질 수 없을 때, 일기쓰기는 그 의미를 잃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남의 일기를 읽고 있다. 작고하신 이문구 선생의 일기문과 주변지인의 이문구선생에 대한 회상으로 꾸며져 있는 [그리운 이문구](중앙 M&B)를 읽고 있는 중이다. 나같이 생면부지의 사람이 당신의 일기를 읽고 있다면 이문구 선생은 어떠한 생각이 드실까?

물론 일기문이라고 해서 모두 자신이라는 일인(一人) 독자만을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가장 손쉽게 자신의 내면과 주관을 드러내면서도 그 사회적 책임은 가장 약한 글쓰기가 ‘일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문인들은 자신의 사적인 삶과 생각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일기를 택하곤 한다. 장정일의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가 그렇고, 돌아가신 김현 선생의 [행복한 책읽기]도 일기문의 형식을 띤 자아-드러내기이다. 아마도 김현 선생의 표현으로는 ‘내면풍경' 쯤이 되겠지만.

이문구 선생은 [관촌수필], [유자소전], [매월당 김시습] 등의 소설로 유명하신 분이다. 문단사에서 이문구 선생 만큼 축복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가 죽었을 때, 문단사상 초유로 문인협회, 작가회의, 펜클럽 등 3단체가 합동장례식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문단사의 지위는 짐작할만하다. 그러한 분의 내면풍경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재미있다. 거인의 작은 일상사가 어찌 재미없겠는가. 일기문은 그가 돌아가시기까지 3년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투병기와 자식에 대한 사랑, 문단에 대한 염려와 시대에 대한 아픔과 분노가 곡진하게 그려져 있다.

한편 나는 일기문을 읽으며 분노한다. 그것은 이문구 선생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이다. 2000년에 받은 동인문학상 상금 5천만 원은 “도둑질하기 전에”는 결코 만져볼 수 없는 것이고(2000.12.31), 초등학교 교과서에 선생님의 작품이 실리고 받은 돈이 고작 12,360원에 불과하다는 것(2001.7.12), 또한 설문조사에서 순수 소설가로서의 소득’만 적으라는 주문에 3백만 원이라고 적은것. 그것도 '사실은 이것도 과장된 것이다. 발병 이전의 수입을 기준한 것이니까.”(2002.8.26) 라는 문장을 읽을 때다. 유명하다는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이러한 정도이니 다른 소설가들이야 말해야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울며 겨자먹기로 대우가 형편없는 소설쓰기보다는 잡문쓰기를 하고 이를 “팔자 소관이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2000.1.18)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소설가들의 힘겨운 삶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 뿐이다. 그럼에도 위로를 받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접할 때다. 이문구 선생의 명복을 빈다.

“올해는 나의 갑년(甲年)이다.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년이다. 비로소 60객(客)에 접어든다. 1.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2. 갑년을 기념하는 어떤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3. 더욱 겸손하고 겸양할 것이다. 4. 스스로 기(氣)를 접을 것이다. 5. 예년과 똑같이 살 것이다.”(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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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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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선생에 대해서 우선 몇 마디 해야겠다. 우선 이 양반-양반이란 표현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친밀히 부르는 호칭이며 전근대적 신분제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은 영남대학교 법학과 교수다.

그런데 이 양반이 쓴 책을 보면, 법학관련 저술도 다수 있지만, 전혀 법학과 관련이 없는(?) 책이 더 많다. 󰡔월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오노레 도미에󰡕, 󰡔내 친구 빈센트󰡕, 󰡔조지 오웰󰡕, 󰡔자유인 루쉰󰡕, 󰡔카뮈를 위한 변명󰡕,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등은 문학 예술가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1권을 쓰기도 힘든 평전을 학문과의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쓴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놀라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는 책은 자유교육 선구자인 프란시스코 페레의 평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에리히 프롬의 저술을 정리한 󰡔우리는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썼으며, 지금 내가 소개하는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 있는 집)도 최근작이다. 게다가 이 양반은 무수히 많은 책들을 번역했다.

이 정도가 되면 전방위작가라고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한편 박홍규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다작(多作)이라고 해서 섣불리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홍규 선생의 글쓰기는 우선 원자료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단순한 소개가 아닌 심도깊은 분석과 평론으로 완결되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태도는 󰡔우리는 사랑하는가󰡕(필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단순히 원자료의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 나와있는 번역본에 대한 쫀쫀하다 싶을 정도의 꼼꼼한 비교와 분석,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하면, 그의 책쓰기는 여가활동이나 영역외의 활동이 아니라 바로 그의 본업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저술에 등장하는 인물의 공통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룬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당대에 저항하여 당대를 넘어서려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점은 바로 그가 ,박홍규 선생이 당대의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 그것의 올바른 방향을 나름대로 모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소개함으로 자신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자신과 동맹할 동지(독자)들을 규합하려는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나는 당당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박홍규 선생과 나는 사상적인 동지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해서 소개한 선생은, 이제 번역이 아니라 에드워드 사이드의 관점으로 우리내 사회를 삶을, 인식구조를 분석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이다. 이 책이 다른 책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이 책에서 박홍규 선생은 그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실패했다는 데 있다. 다른 책들이 냉정함 속에서 쓰여졌다면 이 책은 분노 속에서 쓰여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 속에 만연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분노의 표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학술서가 아니라 하나의 선동문으로 읽는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리엔탈리즘에 쪄들어 살고 있는 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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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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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마음에 드는 글 하나를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사람의 마음은 본래 저절로 즐겁다. 배움이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으면 즐겁지도 않다. 즐거운 연후에야 배운 것이고, 배운 연후에야 즐거운 것이다.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즐거움이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 배움만한 것이 있는가?”

이 글은 명대 철학자 왕양명의 수제자인 왕심재(王心齋)의 것으로 고미숙 선생이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humanist)에 인용한 것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위의 즐거운 학문을 직접 실천하는 곳이 있다면 믿겠는가? 무질서(chaos) 속에 질서(cosmos)가 있는 카오스모시스(chaosmosis)의 공간이며, 유머의 공간이고, 스승과 친구가 하나가 되는 공간이자, 놀이의 공간이고, 일하고 먹는 일상의 공간이자, 배움터이며, 명상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곳!

고미숙 선생의 인류학적 보고서에는 ‘수유+너머’가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고 선생은 자신이 속해있는 ‘수유+너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했으며, 변화해갈 것이지,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엄청 부끄러웠고 부러웠고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학문과 실천이 동떨어져있고, 일상과 밥벌이가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유혹이란 말인가? 물론 이 유혹에 빠져 들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선악과 시비, 혹은 장단이라는 익숙한 분별을 넘어서는 것. 자의식과 내면이라는 ‘강철갑옷’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 익숙하고 낡은 것을 가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물론 이러한 대가는 하루 아침에 치러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면서 서서히 벗어지는 것들이다. ‘노마디즘’이라 칭할 수 있는 이러한 자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구절을 보자.

“노마드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나 이주민이 아니다. 어떤 불모의 땅에서도 찰거머리처럼 들어붙어 새로운 삶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들이다. 초원이나 스텝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 자리를 초원으로, 스텝으로 만드는 이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 비운다는 것은 그저 욕심을 버리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비운다는 건 소극적으로 내면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외부의 역동적 흐름 속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집착, 지나친 인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한 유목은 불가능하다. 비울 수 있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다!”

올해의 내 목표 중에 하나라면 조그만 연구소(?) 하나를 차리는 것이다.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뭐해서 그냥 󰡔행복한 공부공동체󰡕라고 작은 이름 하나를 마련해 놓았다. 그 공간을 어떻게 운영할 것이지,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에 대하여 구상하면서 참고가 될까해서 산 책이 바로 고미숙 선생이 쓴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이다. 전기로 감염시키는 것 같은 책!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반성하게 만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 책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아하! 이렇게도 살 수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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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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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하는가](박홍규 지음/필맥)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저술에 관한 책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정작 사랑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부자 아빠’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사랑’은 지나버린 옛 추억이거나 대중가요의 통속적 언어이고, 성공한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월계관 같은 물질적 가치가 되버렸다. 그런데 뜬금없이 갑자기 왠 사랑타령이란 말인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근대사회 속에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탐색하고자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사회분석의 정치한 개념을 제공했지만, 인간의 내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경시했으며, 한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인간본성을 탐구하여 새로운 탐색도구를 마련해주었지만, 지나치게 개인적 측면을 강조함으로 개인의 내면을 형성하는 사회구조적 측면을 외면해왔다. 그것은 소중하지만 부족한 이론이었다. 물론 그가 비판한 것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만은 아니다.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나 근대의 계몽주의사상도 그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는 영혼의 혁신을 설교하고 사회 질서의 변혁을 무시했으나, 이런 변혁 없는 영혼의 혁신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아무런 효과도 갖지 못한다. 계몽운동 시대는 최고 규범으로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판단과 이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정치적 평등을 주장했으나, 정치적 평등이 사회 경제 조직의 근본적 변혁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형제애가 실현될 수 없다고 하는 점을 무시했다. 사회주의, 그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경제적 변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인간 내적 변화의 필요성을 무시했다.”([건전한 사회] 중에서)

그가 보기에 근대사회는 죽음애적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죽음애’는 환경파괴와 전쟁, 인종차별과 국수주의, 사회적 무관심과 자기도취, 사디즘과 마조히즘, 질서숭배, 중앙집권화와 집중화, 권위주의, 인간의 기계화, 소유양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정반대에 있는 것이 바로 ‘생명애’이다. ‘생명애’는 생산적 방향으로 자신을 동화하고 사회를 재구성한다. 그것은 평화와 인류애적 평등, 사회적 연대와 의지적 자기실현, 아나키(자율)와 분권과 자치, 겸손과 용기, 신념과 훈련, 자유와 불복종, 존재양식, 궁극적으로 사랑과 맞닿아있다. 그는 사랑이야말로 종교를 뛰어넘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이다.”([정신분석과 종교] 중에서)

물론 프롬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통속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내적 성찰과 훈련, 자신을 넘어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그리고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사랑의 기술] 중에서)

문제는 그러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야한다. “불복종은 자유를 위한 조건이며, 동시에 자유는 불복종을 위한 조건이다.”([불복종에 관하여] 중에서)

자, 이제 어찌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인물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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