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평전
강대석 지음 / 한얼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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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시쓰기를 멈췄다.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를 읽은 이후, 그러니까 그때가 1987년이었다. 가령 이런 시를 읽을 때였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종과 주인> 전문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랬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육체였고 칼이었고 피였다. 그후 나는 김남주 시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출소한 이후에 한국노동당 청년위원회에서 개최한 여름 수련회에서 였다. 나는 시인에게 술 한 잔 올리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에는 투쟁이 선생님의 시 주제였는데, 감옥에서 나오시니 세상이 많이 변했지요. 이제는 무슨 주제로 시를 쓰시렵니까?” 그때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에 대해서 쓰고 싶소.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하여.”  그 소망을 이루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였다는 것은 나는 확신한다. 그는 한 순간도 타협하지 않았고,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체 게바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체 게바라처럼 그는 누리지 않았고 싸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죽었다. 게바라는 적의 총에 맞아, 시인은 암과 싸우다가. 그가 죽은 지 벌써 10년. 나는 그를 잊고 살았다. 나의 몸은 불었고 나의 사상을 물러졌고 나의 행동은 더디어졌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더 이상 싸움에 현장에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왠 느닷없는 만남이란 말인가. 10년도 지났는데, 김남주가 다시 나에게 다가 왔다. <<김남주 평전>>이란 이름으로. 그는 말한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지, 동지는 이미 변했소. 동지는 진보를 말하고 불의와의 싸움을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있소. 좋소.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오. 주로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수사학이지. 관념의 수사학 말이오. 동지는 이미 육체를 잃었소. 머리만 둥둥 떠 다니고 있구료. 진보라고? 무엇을 위한, 누구와 함께 하는, 무엇을 버리는 진보란 말이오. 불의와의 싸움? 정의를 위한 투쟁? 도대체 어떠한 불의, 누구를 위한 정의란 말이오. 싸움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 머리로 관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근본뿌리를 흔들지 못하는 투쟁, 정치가들 몇몇을 욕하고 바꾸는 싸움, 공명한 선거. 평화로운 시위.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공명이고, 무엇을 위한 평화란 말이오. 차라리 나는 이제 자본주의의 개가 되었다고 말하시오. 추상적으로 말하지 마시오. 누구를 죽일 것이고 누구를 살릴 것이며, 누구와 함께 할 것이고, 누구는 절대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시오.”


아하, 이를 어쩔 것인가? 나는 화려하게 포장된 악취 나는 정신을 가진 대신에 피 터지고 땀 흘리는 육체를 잃었구나. 그랬었구나. 그래서였구나. 10년 만에 만난 김남주가 이렇게 낯설은 것이. 두려운 것이.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해버려서 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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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살이 2004-04-08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주 시인의 삶과 시는 10년이 지나도 뭇 사람들에게 그 치열성을 상기시키는군요.
 
Writing Quotient 글쓰기 능력지수
최병광 지음 / 팜파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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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은 ‘동화읽는 아빠모임’날이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피 뽑고, 가슴사진 찍고, 심전도 검사를 했다. 6개월마다 한 번 씩 있는 정기검진이다. 내일이면 결과가 나온다. 나는 결과를 뻔히 알고 있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을 것이다. 의사는 술과 담배를 끊고 과로를 하지 말고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대한민국 모든 성인에게 내려지는 만병통치의 처방을 늘 입에 달고 있다. 그러한 처방은 대한민국 성인의 90%이상이 실천할 수 없는 항목이다. 나 역시 실천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건강을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과욕은 금물이다. 나는 과욕하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검진을 마치고 후곡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 푸른숲>으로 향했다. 오늘은 변경수 목사님이 어린이의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동화책을 선정하여 오셨다. 반쯤은 읽었던 책이고 반쯤은 처음보는 책들이다. 레오 톨스토이가 쓴 󰡔세가지 질문󰡕(달리출판사),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와(풀빛), 가브리엘 뱅상의 󰡔떠돌이 개󰡕(열린책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햇살과나무꾼), 그리고 프레데릭 바크의 󰡔위대한 강󰡕(두레아이들) 등의 책들을 돌려가며 읽고 소감을 나누었다.

 

동화읽는 아빠모임 회원인 정종호 청어람미디어 사장이 늦게 도착했다. 정 사장은 아이들에게 교양이나 가치관 정립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글쓰기이며, 글쓰기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 분야에 교재를 만들어보자고 지나가듯이 이야기했다. 시간이 없어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계획하고 있는 일이었다. 대학입시의 ‘논술’이라는 것 역시 오랜 독서와 사색과 훈련의 결과이지, 단시일내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릴 적부터 읽고 발표하고 글을 써본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도 자신의 생각을 더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쓰고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 글쓰기는 대학입시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도 필수적인 사항이 되고 말았다. 특히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쓰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누구나 글을 잘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최병광의 <RQ-글쓰기 능력지수>(팜파스)를 구입했다. 얇은 책자지만 알찬 내용이 담겨 있다. 저자는 최카피연구실(www.choicopy.com)의 대표이면서 여러 대학에서 광고와 관련된 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에이스침대, 영창피아노, 로케트밧데리 등의 광고작품과 공익광고 다수를 제작한 경력자이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하다. 글쓰기의 능력이 성공을 좌우하고 그런 의미에서 RQ(Writing Quotient)는 생존지수라는 것이다. RQ는 IQ(지능지수)와 EQ(감성지수), VQ(시각적 감각지수)와 NQ(네트워크 지수)를 유기적으로 합쳐놓은 능력이라 말한다. 그러한 RQ가 높은 ‘말짱, 글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예언한다. 쉽게 읽히고 체계적이면서 설득력도 높다. 가볍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피스트가 쓴 글쓰기에 대한 맛깔스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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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을 읽다
김경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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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 전에 알베르트 망구엘의 <나의 그림 읽기>(세종서적)과 김경일의 <사서삼경을 읽다>(바다출판사)를 사서 기분내키는 데로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이 책들을 그렇게 읽어도 괜찮은 책들이다. 책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구성상 독립된 부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두 책 모두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은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책이다. 한 쪽마다 새로운 정보와 참신성이 넘쳐난다. 게다가 그림을 소개하는 책이니 흥미도 만점이다. 이 책은 사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는 나의 <예술 강좌>에 보탬이 될까 해서 산  책인데 굳이 그러한 실용적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야만했던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경일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인 책제목으로 한 때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교수이다. 이번의 <사서삼경을 읽다>는 그의 이전 책과 같이 대중적인 문체로 쓰여진 것인데, 고전의 원문해석 역시 고리타분하지 않고 참신하다. 예를 들어 <논어>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를 평범하게 번역하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히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가 되겠지만, 저자는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미련을 떨게 되고, 생각만 키운 채 배우지를 않으면 사고 치기 십상이다.”로 번역해 놓는다. 이러한 번역의 문제는 저자가 그저 자신을 튀게하기 위하여 고안해 놓은 수사학이 아니라 당시 문화의 흐름을 중시하는 이른바 ‘추체험적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도처에 이러한 해석이 널려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통쾌함을 느낀다. 게다가 ‘사서삼경’이라는 경서를 현실의 적실성 여부에 맞춰 비판하는 모습에서 신뢰를 보낸다.

 

오늘날 고전의 문제는 해석의 진위 여부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자라는 세대 누구도 고전을 읽지 않다는 데 있다. 김경일의 책을 청소년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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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word 2004-04-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이 읽기에는 너무 문제가 많은 책이란 생각이 드네요.
논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忠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저자입니다. 위에 예로 드신 學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을 못했다고 봅니다. 똑같은 내용을 말만 바꿔 놓았다고 해서 좋은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는 여전히 學이 책을 펴놓고 암기하는 것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논어에서 배운다는 의미는 책을 통해 익히고 그것을 실천을 통해 체득한다는 의미이지 배우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논어 學而편을 제대로 해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예로 든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밝히려면 學而편에 나와있는 [학이시습지~~]의 해석이 선행되야 하겠지요. 저자 맘대로 생각하고 해석한 책은 정말 위험합니다. 그런 만큼 엄청난 오해도 불러 일으킬 책입니다.

Lucy 2004-09-1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바이워드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물론 한학과 동양사상과 사서삼경 모두 매우 탁월하게 통달하신 분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바이워드님이었다면 위의 리뷰밑에 구태여 코멘트를 달아가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쓰신분을 바보로 만드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학문이든 나와 다른 생각과 나와 다른 해석을 가진 사람이 있을진데 어째서 하나의 관점만을 강요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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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서일기를 쓴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4일은 술을 마셨다.

2권의 책을 샀고 읽었다.

박홍규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미토)와 제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민음사)

청어람미디어에 들려 올 해에 쓸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1권의 책을 기증받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뇌를 단련하다>(청어람미디어)인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지적 충격을 받았고 나의 지식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었는지 절감했다. 저자는 도쿄대학 불문학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최첨단 과학이론에 대하여 꿰뚫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철학하는 자의 임무임을 나에게 각성시켜 주었다. 그는 지(知)의 구조변화가 모든 것을 움직인다고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의 원뜻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인데, 이는 글자 그대로 지(知)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 교단에서 철학을 강의하거나 철학서를 쓰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오로지 보다 제대로 된 ‘지’를 추구하며 인생의 태반을 보내온 사람으로서 참된 필로소피아를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른바 철학자가 하고 있는 것은 <‘철학’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참된 필로소피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필로소피아라면 좀 더 다양한 것을 알고 싶어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현대는 지의 체계가 대부분 사이언스로 짜여지고 있으므로 사이언스에 열중하지 않을 수고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철학자들은 대개 사이언스에 무지합니다. 현대에는 사이언스를 모르는 필로소퍼는 참된 필로소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50쪽)


청어람미디어 사장은 지금이 출판계의 춘궁기인데, 이 책 때문에 보리고개를 넘는다고 했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인문서적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니 우리나라 독자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이야기. 내 책의 판매부수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단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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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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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현(絃)의 노래>(생각의 나무)를 읽다. 이 책은 그의 소설 <칼의 노래>와 묘한 화음을 형성한다. <칼의 노래>가 무인(이순신)의 실존과 전쟁의 이야기라면, <현의 노래>는 예술가(우륵)의 실존과 전쟁의 이야기이다. 쇠(金)와 금(琴). 칼과 악기. 전쟁과 예술의 세계이다. <칼의 노래>가 전쟁에 대한 명상이라면, <현의 노래>는 예술에 대한 명상이다. 이 소설은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기실 우륵의 입을 빌어 말하는 김훈의 예술론이다. 소설의 곳곳에서 단문의 형태로 김훈은 자신의 예술론을 펼치고 있다. 보자.


- 니문아, 내가 비록 여러 고을들의 소리를 챙겨서 금(琴)에 담았다고 하나, 소리는 본래 나라가 없는 것이다.(224쪽)


- 가야는 지옥이다. 신라는 더 깊고 더 뜨거운 지옥일 것이다. 그리로 가야 살 수 있다. 때가 거의 되었다. 니문아, 금을 들고 더 깊은 지옥으로 가자(226쪽)


- 너의 소리가 그리도 절묘하냐?

- 나의 소리가 아니라, 본래 스스로 흘러가는 소리요.

-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

-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260쪽)


- 니문아, 내가 죽거든 저 열두 줄을 신라로 보내라.

니문이 섬뜩 고개를 들었다.

- 어찌 하필 신라로……

- 악기란 아수라의 것이다. 금을 신라로 보내라. 거기가 아마도 금의 자리이다.(282쪽)


예술은 주인이 없다. 누가 지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국경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은 아수라의 것이다. 현실이 비참하면 할수록 예술은 그곳에 있어야한다. 칼이 도륙한 그곳을 금(琴)으로 어루만지며 살아야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보다는 종교에 가깝다. 김훈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이 글은 세상의 한 움큼이라도 어루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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