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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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의 매력

이 세상에 혼자 떠드는 것처럼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것은 혼자 술마시는 것에 버금가는 불행한 사태다. 민주주의의 기초가 바로 상호인정과 상호소통에서 비롯됨을 생각해보면, 대화의 중요성은 실로 막중하다. 그것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담의 매력은 쌍방성에 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상호긴장과 갈등의 산물이 바로 대담이다. 대담의 미덕은 대중성에 있다.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학문적 체계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삶의 진솔함과 일상적 언어의 사용을 통해 쉽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한편 대담이 일상의 잡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펼쳐놓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엄청난 내공이 쌓여야 한다. 신문이나 잡지에 한 두면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책으로 묶어낼 정도의 내용을 담으려면 그 사상의 깊이와 넓이가 확보되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주된 저술을 대화체로 쓴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리라.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도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깊게 읽히고 쉽게 읽힌다.


■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대담

최근 들어 읽은 대담집으로 탁월한 한 권을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를 꼽는다. 인문학자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비평이론)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생물학)이 '생명공학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테마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벌인 10차례의 대담과 4차례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전체 분량이 600쪽을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이유는 두 학자의 내공도 기여하지만, 대담의 주제가 바로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는 생명과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말을 하자면, 인문학적 소양은 어느 정도 갖추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자연과학은 거의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인문학과 생물학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인문학적 주제와 자연과학적 주제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도 매우 궁금한 사안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홍만의 K1 대회보다 훨씬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대담자는 유전자와 문화, 복제와 윤리, 창조와 진화, DNA와 영혼, 육체와 정신, 신화와 과학, 인간과 동물, 아름다움과 과학, 암컷과 수컷,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종교와 진화, 사회생물학과 정신분석학 등 13개 주제를 종횡무진하면서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서로에 대해 감탄하면서 성숙의 창을 열고 있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터운 세계’에 대한 도정일의 도저한 열망과 ‘생명’에 대한 최재천의 치열한 열정을 만날 수 있다.


■ 동양철학자과 서양철학자의 대담

최근에 나온 책은 아니지만 대담집 다운 대담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국내 책은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이다. 공교롭게도 위의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휴머니스트라는 출판사가 썩 괜찮은 곳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작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짐작이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 쌓았던 내공과 판매의 성공에 힘입어 󰡔대담󰡕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한다.


주제는 좀 산만하게 펼쳐지지만 시원한 편집과 사진의 이용, 현장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긴박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실력은 대담집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대담자들이 철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김용석 교수와 이승환교수라는 점도 책의 깊이를 주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철학이 추상세계를 떠도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세계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학문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다.


■ 어려운 사람일수록 대담집을 찾아라


이쯤에서 나의 독서 비결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데, 철학자 행세를 하며 산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는 행세를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대해준다. 고맙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자찬이라 쑥스럽지만, 나의 철학적 삶의 미덕은 쉬움에 있다. 내 직업이 학생을 상대로 하는 강사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다. 그런 재주가 갑자기 쌓이는 것은 아니지만, 비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강연집이나 대담집을 찾아 읽는 것이다. 운수가 좋으면 수십권을 읽어도 모를 수 있는 사상의 핵심을 몇 줄만에 캐치할 수도 있다. 그때의 기분이란……. 그렇게 깨달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원서-물론 한글로 번역된 것-에 접근하면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이, 흩어진 구슬이 꿰어지듯이 술술 착착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접근했던 학자들이 현대철학자들인 질 들뢰즈였고, 미셸 푸코였으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였다. 모두가 어려운 철학하기로는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나는 그들의 사상을 대담을 통해서 큰 줄기를 이해한 후, 접근하기 쉬운 책부터 한 권씩 독파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그들의 학문적 진지함과 치열함을 배웠고, 깊이와 넓이에 감탄했으며,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좀 더 실감나게 만들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푸코의 맑스󰡕라는 책에 부록2에 실려 있는 대담은 푸코가 고등학생과 대화를 나눈 이야기를 수록한 것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나는 그 대담을 통해 푸코가 결국 하고자했던 작업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번 읽어보라. 

나는 출판문화 속에 대담의 형식이 널리 과감히 정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학문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아주 필요한 사안임과 동시에, 대중의 학문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공부 역시 아주 어린 아이들과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기를 소망한다. 학문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려 있을 터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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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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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와 만남

사람들은 현실성 없는 도덕교과서 같은 말을 할 때, “공자님말씀 같은 소리만 하고 않았네.”라고 비꼬거나,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공자님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네.”라고 말한다.

두 말에 모두 공자님이 들어가 있지만, 썩 반가운 어조가 아니다. 게다가 ‘공자’도 아니고 ‘공자님’이란 호칭이 비꼼이나 비난의 어조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런 표현을 억양법이라고 하나?

어쨌든 공자는 우리의 삶에 문화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 뿌리에는 유교적 잔재가 깊이 남아있다. 근거 없는 선후배 의식이라든지, 전근대적인 위계서열, 사라지지 않는 남녀차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뿌리가 깊은가? 명절만 되면 목숨 걸고 움직이는 귀향행렬도 공자님 덕분이다. - 공자의 말은 우리 지식의 구성요소로서는 낡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성인으로 공자의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질문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왜? 󰡔논어󰡕를 읽고 안 읽고로 구별할 수 있는 현실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성서󰡕를 읽고 안 읽고는 예수쟁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종합영어󰡕를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는 영어실력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수학의 정석󰡕을 기본편을 뗐느니 종합편을 뗐느니 실력편을 뗐느니에 따라 수학실력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논어󰡕는 그러한 기준을 가르는데 별무소용이다.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도 짧은 감옥생활이 아니었다면 󰡔논어󰡕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감옥의 장점(?)은 무한정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의적 게으름이 아니라 타의적 게으름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감옥에서 지혜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단연 으뜸은 독서다. 빨리 읽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소명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낮잠을 자도 상관이 없고, 교도관 몰래 간식내기 도박을 해도 되지만, 나는 독서를 시간보내기 방법으로 택했다. 그것도 일상에서는 전혀 안 읽을 것 같은 책, 두꺼워서 손이 가지 않는 책,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을 책,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결코 안 읽었을 책의 목록을 적어 그 책을 구입하였다. 󰡔주역󰡕, 󰡔맹자󰡕, 󰡔근사록󰡕, 󰡔금강경󰡕, 󰡔대학,중용󰡕 󰡔소학󰡕의 목록에 󰡔논어󰡕도 끼여있었다. 이른바 유교경전인 사서삼경과 불교경전이라 칭하는 서적들이 나의 타겟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는 것이다. 읽다가 지치면 안 읽으면 그만이고, 읽다가 흥이 나면 계속 읽으면 그만이다. 본문뿐만 아니라 본문 밑에 있는 주석도 꼼꼼이 챙겨 읽고, 한자도 노트에 써가면서 읽어나가는 것이다.

󰡔논어󰡕의 시작은 이러했다. “배우고 때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 멀리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무릇 모든 책의 시작은 그 책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동양의 최고 고전이라는 책의 시작이 이렇게 밍밍하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도 없고, 무엇을 실천하겠다는 결기도 없다. 공자의 웃음만이 책의 서두에 가득하다. 그윽한 웃음의 세계. 나는 이 대목을 읽은 날 밤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여보, 공자의 책을 읽고 있어요. 참 재미난 노인네더군요. 처음부터 즐거움으로 시작해요. 학문은 즐거운 것이다. 친구를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즐겁게 살면 된다. 이렇게 말이요. 그래서 나는 공자의 󰡔논어󰡕에 부재를 나 스스로 달아보았다오. 즐거운 학문이라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도 음미할만해요. 즐거워야 공부다. 즐거워야 친구다. 즐거워야 사는 것이다. 대우로도 생각해봐요. 즐겁지 않으면 공부가 아니다. 즐겁지 않으면 친구가 아니다. 즐겁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 몸은 갇혀 있지만 명상놀이는 즐거워요. 당신도 즐기구려. ……” 

물론 󰡔논어󰡕에는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도 아쉬움도 체념도 슬픔도 있다. 하지만 나를 압도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즐거움이다. 책의 겉표지가 책을 보호하듯이 논어의 첫머리가 논어 전체를 감싸고 있다.

만남의 첫 인상이 중요하듯, 나는 공자를 그렇게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고리타분한 인간이 아니라 웃는 인간이다.

   

■ 장자와 만남

동양 최대의 이야기꾼을 꼽으라면, 최고의 허풍쟁이를 꼽으라면, 최상의 독설가를 꼽으라면, 최고의 판타지 작가를 꼽으라면, 그 교집합에 장자가 위치한다.

처음부터 허풍으로 시작한다.

“북쪽 끝 바다 검푸른 곳에 수천 리에 달할 만큼 거대한 곤(鯤)이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이 물고기가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로 변했는데, 그 크기 역시 수천 리에 달했다. 붕이 힘껏 날아오르면 활짝 펴진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 같았다. 이 새는 풍랑이 일면 천지(天池)라는 이름의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곤(鯤)은 본래 작은 물고기의 이름이다. 피라미 정도를 상상하면 된다. 그런데 장자는 뻥을 친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너 피라미라는 물고기 알아? 그 물고기 크기가 5천 킬로미터야. 재밌지. 그런데 더 재밌는 건 그 물고기가 새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거야. 이 새가 한 번 날잖아 그러면 수 천 미터 오른다. 날개를 펴면 그 길이가 또 5천 킬로미터야. 이런 새 본적이 있어? 없지. 나는 봤는데. 지금 어딨나고? 천지에 가 있다고 하더라고. 진짜야. 진짜라니까. 히히히.”

우리 아들놈이 친구들과 나누는 허풍 수준이다. 왜 우리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했잖은가. 남산타워로 빛을 비추면, 그 빛이 63빌딩으로 반사되고, 반사된 빛이 한강에 비추면 한강물이 둘러 갈라지면서 마징가제트가 나올거라는 시시껄렁한 농담. 그래서 세상을 구할거라는 허황된 이야기말이다.

논어가 미소(微笑)를 우리에게 선사한다면 장자는 폭소(爆笑)대잔치다. 장자의 세상에서 권위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권위는 조롱거리가 된다. 위대한 성현의 말은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장자는 아내의 주검 앞에서 춤을 추는 미친놈이다. 신체불구자, 범죄자, 쓸모없는 자, 못생긴 자, 미천한 자, 버려진 나무나 주목받지 못하는 물고기 등이 주인공이다. 󰡔장자󰡕라는 책은 그 광인과 소수자들이 벌이는 난장판이다. 푸코가 󰡔장자󰡕를 읽어보았을까? 읽어보았다면 아마도 ‘형님’하며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자체로 즐기면 된다. 게그콘서트를 보면서 진지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관람객의 자세가 아니다. 웃을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장자를 그렇게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도 진지하게 끼어들려는 자가 있다면 장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냅둬, 난 이렇게 살다가 죽을거야. 내가 이렇게 사는데 니가 보태준 거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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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밖에 난 철학 귀속에 든 철학
채희철 지음 / 리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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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책을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나도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산다.

이번에 산 책은 우선 책 제목이 재미있다. 󰡔눈 밖에 난 철학 귀 속에 든 철학󰡕. 출판사에서 책을 대박치는 경우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단다. 이른바 3T. 우선 시기가 맞아야 하고(Timing), 읽는 독자층이 분명해야하고(Target), 그리고 제목이 좋아야한다(Title).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적어도 두 가지는 성공한 듯 하다.

우선 전국적으로 논술붐이 일면서 동시에 철학에 대한 수요가 많이 생겼다. 서점이 가서보면 다시금 철학의 시대가 온 것 같다. 타이밍이 맞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약하기는 하지만 타이틀이 눈에 들어온다. 대구를 이루는 철학책 제목으로는 아마도 이진경의 󰡔상상 속의 철학, 상상 밖의 철학󰡕이 시작이 아닐까. 어찌되었든 철학서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간 이 책을 상상하면서 피식 웃으며 책을 들었다. 그 다음은 목차를 볼 차례.


큰 제목만 일별하면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2.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눈-이성의 탄생. 3. 관조하는 세상, 참여하는 세상 : 눈-이성에서 눈-신체로. 4.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눈-신체. 5. 댄스, 댄스, 댄스 : 니체의 '귀-신체' 철학.6. 음악은 왜, 어떻게 정치적인가? : 음악과 정치사상. 7. 드러난 현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현실 : 가상과 음악. 8. 욕망의 미시학 : 리토르넬로, 리듬과 존재의 생성. 9. 스노우보드처럼 변화의 흐름을 타자.

가장 눈에 띠는 것이 눈과 귀, 이성과 신체의 대비이다. 이정도 목차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은 저자가 나름대로 철학을 재정리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녹여낼 수 있는 내공이 있다는 증거. 눈-이성이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표현이라면 귀-신체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어들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모더니즘적 사고를 반성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를 권장하고 있는 셈. 그도 그럴 것이 근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에 이성과 감성, 서양과 동양, 인간과 자연, 백인과 유색인,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정상과 비정상, 과학과 미신, 문명과 야만 등 이분법적인 구도를 그려놓고 전자들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써 후자를 소외시켰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소외된 소수자들을 복원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태도를 모색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이성중심적 흐름에 소크라테스-플라톤-스콜라학파-데카르트-칸트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릴 수 있다면, 중간에서 새로운 방황을 모색한 흐름으로 스피노자-후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학자들을 꼽은 후,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흐름을 창조한 철학자로 니체-들뢰즈-가타리를 저자는 꼽는다.


이 정도쯤 되면 이 저자가 어떤 인물일까도 궁금해진다. 책 날개를 봤더니 “지은이 채희철은 웹진 'BOOKERS'에서 인문과학 분야의 서평을 담당했으며, '자율평론', '진보누리'를 비롯한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논객으로 활약해왔다. 2005년 현재 기업의 윤리경영 컨설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풀밭 위의 식사>가 있다.”라고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어색하다. 자율평론과 진보누리는 어울리는데, 현대 기업의 윤리경영 컨설팅은 안 어울린다. 구입이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지적 호기심이 망설임을 앞선다. 산다.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우선 그의 책은 술술 읽힌다. 가끔 너무나 많은 깨알 같은 주석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 주석조차도 정성들여 필자가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더 유익한 것은 저자가 아주 쉽게 철학사의 큰 특징들을 정리하면서 현대철학의 화두가 되는 새로운 경향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철학사조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해보는 이 어떨까 권하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 서평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철학개론서들은 다양한 사조를 평면적으로 설명하는데 주력하느라 필자의 색깔을 알아채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은 필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책 속에 녹아있다. 솔직한 책이라는 생각. 그러한 책을 나는 좋아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책.


한편 철학사의 가장 큰 특징 들을 눈-이성, 눈-신체, 귀-신체로 과감하게 3단계로 정리한 그의 독창적인 - 물론 많은 부분 현대철학자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다. 이 정도로 과감하게 정리하려면,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턱없이 무식하거나 용감하게 유식한 경우. 나는 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필자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젊은 철학도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아이디어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글도 자신감이 넘친다. 가령 :


타인에 대한 윤리의 니체적인 첫번째 명제는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도취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자의식에 집중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의 정념에 도취되어야 하고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죽도록 좋아서 '무아지경'에 이를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지 못하는데 타인이 내 몸에 깃들 수 있겠는가. 자의식에 기초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의식을 상대에게 투사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런 사랑은 대상에게서 의미를 찾게 되어 있고, 필연적으로 좌절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주인공 조르바의 춤을 떠 올렸고, 술이 얼큰하게 취한 후 노래하며 춤을 추는 경동이의 춤도 떠올랐다. 그리곤 한 번도 나 자신을 죽도록 좋아하지 못하여 한번도 ‘무아지경’에 빠져보지 못한 나를 안타까워했다. 신경의 끈을 놓지 못해서 제대로 취해본 적도 없는 나는 얼마나 불행한 존재인가. 언감생심. 춤이라니.


나는 춤추는 자의 용감함, 그 대책 없는 안면몰수의 과감함과 당당한 몸짓이 너무도 부러웠으나 한 번도 제대로 내 몸을 부려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나는 나의 눈뿐만 아니라 타인의 ‘눈’이 너무도 부담스러워서였으리라. 이렇게 나 자신을 생각해보니, 나는 머리로는 모던을 넘어서 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몸으로는 모던을 넘어선 적이 없었으니, 결국 모던 밖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은 먹물에 지나지 않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을 조금만 더 읽어보자.


철학을 한다는 것,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항상 다수자에서 소수자로 이동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들뢰즈나 가타리는 다수가 어떤 것이고 소수자가 어떤 것인지 항상 주위를 둘러보라고 한다. 그리고 “소수자가 되어라!”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창의력으로 가득한 즐거운 소수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자는 것, 그것이 욕망의 미시철학이다. 소수자가 되는 것이 왜 즐거울까? 바로 거기에 다수자의 가치와 척도에서 벗어나는 생성과 창조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지적하는 다수자는 자본주의의 다수자들이다. “자본주의의 다수자는 이윤이라는 가치와 척도에 의해 획일화된 다수자들이다.” 그러니까 필자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좌파적 흐름을 생성하고 싶은 것이고, 그 흐름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소개하고 싶은 것일게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 대박 터지는 책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 말했었다. 타이밍, 타이틀, 타겟. 그리고 나는 타이밍과 타이틀에서 좋은 점수를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 남은 것은 타겟. 즉 적절한 독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타겟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어렵고, 일반독자가 읽기에는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많이 팔릴 것 같지 않다.

그래서이다.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안 팔리는 철학책을 쓴 나로서 동지애를 발휘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고, 철학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처세술과 돈벌이 서적이 판치는 출판계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좋은 책은 읽혀야 한다. 나는 그래서 채희철의 책을 여러분에게 권한다. 채희철과 나는 술 한 잔 나눈 적도 없지만, 얼굴 한 번 마주친 적도 없지만, 이렇게 선전해봐야 나한테는 한 푼도 돌아오지 않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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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적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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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인휘형은 말이 많다. 그 말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열정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안재성형은 말이 없다. 그의 침묵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열정 또한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인휘형은 바쁜 사람이다. 처음에 그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냉소했으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게 벌써 6년 전 이야기다. 지금 이인휘형은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 안재성형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일상의 노동 속에 움크려있다가 어느 샌가 소설을 써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 둘은 최근 󰡔내 생의 적들󰡕과 󰡔경성 트로이카󰡕라는 책을 냈다. 하나는 일인칭 주인공시점의 경어체로 시종일관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전지적 작가시점의 냉냉한 평어체이다. 둘 다 보통 사람들이 쓰기에는 불가능한 소설을 썼다.

이인휘형이 처음 자신의 소설의 초고를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경어체의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장편소설이 나올 수 있을지 나는 의심했다. 그러나 끝까지 소설은 경어체를 지키고 있었다. 불가능한 시도지만 이인휘형은 가능하게 만들었다. 놀라웠다. 안재성형의 소설은 조선공산주의운동사의 본령을 다루고 있다.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인 이재유, 이현상, 김상룡, 이주하 박헌영 등 일제 치하의 쟁쟁한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소설을 통해 살아났다. 남부군의 이현상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박헌형을 제외하고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소설은 진행되고 있으나 일제치하의 사회주의운동사가 이처럼 총체적으로 조명되기는 아마도 이 소설이 처음일 것이다. 불가능한 시도지만 안재성형은 가능하게 만들었다. 놀라웠다.

이 두 형의 특징은 노동과 노동운동에서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후일담 문학이라는 형태를 통해 7-80년대의 격동기를 다루어왔느나 대부분의 소설은 사상적 퇴조기에 등장하는 ‘개인’이라는 화두에 주목했던 반면, 이 둘은 역사의 무거움을 그대로 지금까지 밀어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이 두 소설가로 인해 역사는 다시금 되살아나 우리에게 무거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세월이 변했다고? 무엇이 변한 것인가? 살기 좋아졌다고? 누가 살기 좋아진 것인가?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고, 그로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번도 반도를 떠나지 않고 투쟁해온 사람들이 비참한 생애를 살다가 생을 마감했거나 지금도 비참한 생을 유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역사는 얼마나 변한 것인가?

두 소설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곡법을 택한다. 변방에서 변죽을 울리지 않고, 중심에서 세상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벗어날 길을 잃게 된다. 도피처를 잃게 된다. “이곳이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 보라! 여기에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추어라!”


존 스튜어드 밀은 󰡔자유론󰡕에서 “전체 일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자유의 권리는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유에는 당연히도 사상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사상적으로 자유로운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남북한을 통털어 사상의 자유를 온전하게 누려본 적이 없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의 쟁취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온전한 역사의 복원인 것이다. 권력에 의하여 조정되고 조절되는 불구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히 누려야할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싸움의 격발장치가 󰡔내 생의 적들󰡕과 󰡔경성 트로이카󰡕이다.


󰡔내 생의 적들󰡕은 김광훈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아주 평범했던 한 사람이 어떻게 국가보안법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무력하기만 했던 주인공이 어떻게 싸움의 대열에 나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적 결말의 낙관성이 치기어린 것이 아님은 싸움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삶의 현실이 주인공을 넉넉히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소망이 아니라 역사의 소망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세상은 이미 환하게 밝은 아침으로 변해 있습니다. 창 밖을 보니 나무들의 몸에서 연초록 새순들이 움트고 있습니다. 이제 곧 꽃눈처럼 활짝 피어날 저 소중한 생명들. 나는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내 눈이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그들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생명의 온기로 가득찬 노래가 아침을 눈부시게 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도 그 뜨임과 열림은 싸우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 뜨임과 열림은 아픔과 각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 아픔과 각성을 위해 우리는 󰡔경성 트로이카󰡕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왔던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생을 통해서 자신의 열망을 끝까지 밀고 갔던 사람들, 모진 고문과 투옥생활, 뼈를 깎는 추위와 아픔, 가난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파괴되어갔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살아있어 물리적 생애의 마감을 조용히 준비하는 그들과 손가락을 걸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경성 트로이카의 생존인물 이효정 여사(지금은 돌아가셨다)는 같은 생존자 이병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병희 아주머니, 참 이상해. 요즘 들어 그 애들의 얼굴이 더 선명해지는 건 왜일까? 보고 싶어. 내가 죽을 때가 된 걸까? 너무나 보고 싶어. 그 애들이 아직도 이북에 다 살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정말로 너무너무 보고 싶어…….”


이효정 여사가 보고 싶은 것이 옛동료만이었을까? 나는 책을 덮고 밀의 󰡔자유론󰡕을 다시 읽는다.


“거짓과는 달리 진리는, 오직 진리만이 지하 감옥과 화형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진리를 향한 인간의 열정이 뜨거운 것은 아니다. 법적 제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회적 제재라도 충분히 가해지기만 하면 진리나 거짓을 향한 열정은 중단되고 만다. 진리가 가진 진정한 이점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생각이 옳다고 치자. 이 진리는 한 번, 두 번 또는 아주 여러 번 어둠에 묻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때로는 좋은 환경을 만나 박해를 피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모든 박해에 맞서 싸워 이길 만한 힘을 가지게 될 때까지, 그것을 거듭 어둠 속에서 태양 아래로 끄집어내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이것이 진리가 가진 힘이라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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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경제 너머를 꿈꾸다 - 공플 철학교실 1
윤영실 지음 / 디딤돌(단행본)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1.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자본주의 이전에는 어떠한 삶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헤친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이 있지만, 이 책은 워낙 어렵기로 소문이 나있어서 선뜻 손에 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는 것은 오랜 변혁운동의 과제였습니다. 그러한 과제는 사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면서 많이 좌절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운동의 중심은 합리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의 개선을 위한 시민운동일지도 모른다는 좌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근본적인 비판보다는 현실가능한 대안을 내놓으라는 엄포와 함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딴 세상의 얘기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2.

과연 그런 것일까요? 저는 무기력과 좌절, 또는 방향을 잃은 분노 대신에 우리가 선택해야할 것은 근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성찰에 해당하는 이러한 활동은 학자들의 몫이 아니라 억눌린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민중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상황을 돌파하는 힘은 방법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힘에 있습니다. 방법론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소개하는 책은 학생들을 위해서 저술되었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도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영실이 쓴 󰡔선물-경제 너머를 꿈꾸다󰡕(디딤돌)은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입니다.

물론 저는 이 책이 우리 삶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자 역시 그런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의 형식(동화 형식)과 분량(220쪽 안팎) 상 한계를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미덕은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책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겠지만, 충분히 맛있는 첫술이 되리라 믿습니다.


3. 

이 책은 질문의 책입니다. 그 질문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꿈을 꾸며 살아갈까?” 하나같이 경쟁에서의 승리와 경제에서의 부유를 꿈꾸는 것은 과연 인류의 삶에서 정상적인 것일까? 그에 뒤이은 질문들은 이렇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가난하게 하는가? 발전이란 무엇인가? 신의 땅은 어떻게 인간의 소유가 되었는가? 경쟁만이 살 길인가?


어찌 보면 어렵고 딱딱한 질문들은 네모를 주인공으로 하여 다양한 동화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갈피를 찾고 답들을 찾아갑니다. 그 답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경제용어를 덤으로 익히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이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4. 

이 책의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적 행위로 ‘선물’을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대안 같은 이 ‘선물’ 요법은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실현되었고, 실현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한 곳으로만 축적되는 자본의 역사와는 다른 순환과 축제가 가능한 선물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선물은 기계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너머 총체적 세계관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다음 글을 읽어볼까요.


“원주민들은 하우란 선물되는 물건의 영이자, 조상의 영이자, 숲의 영이라고 여기지. 여기에는 모든 자연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깃들여 있는 것일세. 이런 믿음을 단순히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네. 과학적 이성에 바탕을 둔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인 거지. 그건 경제가 삶의 다른 부분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건 물론이요. 인간과 자연, 정령이 분화되지 않은 총체적 세계관이라네. 하우를 믿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말을 한다고 여긴다네. 신도, 정령도, 새와 들짐승도, 풀과 나무와 꽃도, 하다못해 들판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 머리를 스치는 바람 한 점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일세.”


저자는 ‘존재가 선물이 되는 세계를 꿈꾸며’ 동화여행을 마칩니다. 여행의 시작은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여행의 끝은 꿈으로 끝납니다. 그 질문과 꿈의 세계가 또한 우리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5. 

이 책은 읽고 나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해줘도 좋을 듯싶습니다. 물론 중고생 정도는 되어야겠지만요. 게다가 아이들과 함께 각각의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역통화운동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에드가 킨 지음/ 아르케)를 이어 읽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 간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다른 경제를 실천하고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아마도 지역운동이나 빈민운동 등을 전개하는 실천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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