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밖에 난 철학 귀속에 든 철학
채희철 지음 / 리좀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사람이 책을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나도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산다.

이번에 산 책은 우선 책 제목이 재미있다. 󰡔눈 밖에 난 철학 귀 속에 든 철학󰡕. 출판사에서 책을 대박치는 경우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단다. 이른바 3T. 우선 시기가 맞아야 하고(Timing), 읽는 독자층이 분명해야하고(Target), 그리고 제목이 좋아야한다(Title).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적어도 두 가지는 성공한 듯 하다.

우선 전국적으로 논술붐이 일면서 동시에 철학에 대한 수요가 많이 생겼다. 서점이 가서보면 다시금 철학의 시대가 온 것 같다. 타이밍이 맞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약하기는 하지만 타이틀이 눈에 들어온다. 대구를 이루는 철학책 제목으로는 아마도 이진경의 󰡔상상 속의 철학, 상상 밖의 철학󰡕이 시작이 아닐까. 어찌되었든 철학서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간 이 책을 상상하면서 피식 웃으며 책을 들었다. 그 다음은 목차를 볼 차례.


큰 제목만 일별하면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2. 우리는 현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눈-이성의 탄생. 3. 관조하는 세상, 참여하는 세상 : 눈-이성에서 눈-신체로. 4.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눈-신체. 5. 댄스, 댄스, 댄스 : 니체의 '귀-신체' 철학.6. 음악은 왜, 어떻게 정치적인가? : 음악과 정치사상. 7. 드러난 현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현실 : 가상과 음악. 8. 욕망의 미시학 : 리토르넬로, 리듬과 존재의 생성. 9. 스노우보드처럼 변화의 흐름을 타자.

가장 눈에 띠는 것이 눈과 귀, 이성과 신체의 대비이다. 이정도 목차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은 저자가 나름대로 철학을 재정리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녹여낼 수 있는 내공이 있다는 증거. 눈-이성이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표현이라면 귀-신체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어들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모더니즘적 사고를 반성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를 권장하고 있는 셈. 그도 그럴 것이 근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에 이성과 감성, 서양과 동양, 인간과 자연, 백인과 유색인,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정상과 비정상, 과학과 미신, 문명과 야만 등 이분법적인 구도를 그려놓고 전자들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써 후자를 소외시켰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소외된 소수자들을 복원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태도를 모색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이성중심적 흐름에 소크라테스-플라톤-스콜라학파-데카르트-칸트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릴 수 있다면, 중간에서 새로운 방황을 모색한 흐름으로 스피노자-후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학자들을 꼽은 후,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흐름을 창조한 철학자로 니체-들뢰즈-가타리를 저자는 꼽는다.


이 정도쯤 되면 이 저자가 어떤 인물일까도 궁금해진다. 책 날개를 봤더니 “지은이 채희철은 웹진 'BOOKERS'에서 인문과학 분야의 서평을 담당했으며, '자율평론', '진보누리'를 비롯한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논객으로 활약해왔다. 2005년 현재 기업의 윤리경영 컨설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풀밭 위의 식사>가 있다.”라고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어색하다. 자율평론과 진보누리는 어울리는데, 현대 기업의 윤리경영 컨설팅은 안 어울린다. 구입이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지적 호기심이 망설임을 앞선다. 산다.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우선 그의 책은 술술 읽힌다. 가끔 너무나 많은 깨알 같은 주석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 주석조차도 정성들여 필자가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더 유익한 것은 저자가 아주 쉽게 철학사의 큰 특징들을 정리하면서 현대철학의 화두가 되는 새로운 경향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철학사조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해보는 이 어떨까 권하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 서평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철학개론서들은 다양한 사조를 평면적으로 설명하는데 주력하느라 필자의 색깔을 알아채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은 필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책 속에 녹아있다. 솔직한 책이라는 생각. 그러한 책을 나는 좋아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책.


한편 철학사의 가장 큰 특징 들을 눈-이성, 눈-신체, 귀-신체로 과감하게 3단계로 정리한 그의 독창적인 - 물론 많은 부분 현대철학자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다. 이 정도로 과감하게 정리하려면,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턱없이 무식하거나 용감하게 유식한 경우. 나는 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필자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젊은 철학도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아이디어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글도 자신감이 넘친다. 가령 :


타인에 대한 윤리의 니체적인 첫번째 명제는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도취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자의식에 집중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의 정념에 도취되어야 하고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죽도록 좋아서 '무아지경'에 이를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지 못하는데 타인이 내 몸에 깃들 수 있겠는가. 자의식에 기초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의식을 상대에게 투사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런 사랑은 대상에게서 의미를 찾게 되어 있고, 필연적으로 좌절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주인공 조르바의 춤을 떠 올렸고, 술이 얼큰하게 취한 후 노래하며 춤을 추는 경동이의 춤도 떠올랐다. 그리곤 한 번도 나 자신을 죽도록 좋아하지 못하여 한번도 ‘무아지경’에 빠져보지 못한 나를 안타까워했다. 신경의 끈을 놓지 못해서 제대로 취해본 적도 없는 나는 얼마나 불행한 존재인가. 언감생심. 춤이라니.


나는 춤추는 자의 용감함, 그 대책 없는 안면몰수의 과감함과 당당한 몸짓이 너무도 부러웠으나 한 번도 제대로 내 몸을 부려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나는 나의 눈뿐만 아니라 타인의 ‘눈’이 너무도 부담스러워서였으리라. 이렇게 나 자신을 생각해보니, 나는 머리로는 모던을 넘어서 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몸으로는 모던을 넘어선 적이 없었으니, 결국 모던 밖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은 먹물에 지나지 않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을 조금만 더 읽어보자.


철학을 한다는 것,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항상 다수자에서 소수자로 이동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들뢰즈나 가타리는 다수가 어떤 것이고 소수자가 어떤 것인지 항상 주위를 둘러보라고 한다. 그리고 “소수자가 되어라!”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창의력으로 가득한 즐거운 소수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자는 것, 그것이 욕망의 미시철학이다. 소수자가 되는 것이 왜 즐거울까? 바로 거기에 다수자의 가치와 척도에서 벗어나는 생성과 창조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지적하는 다수자는 자본주의의 다수자들이다. “자본주의의 다수자는 이윤이라는 가치와 척도에 의해 획일화된 다수자들이다.” 그러니까 필자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좌파적 흐름을 생성하고 싶은 것이고, 그 흐름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소개하고 싶은 것일게다.   


내가 이 글의 서두에 대박 터지는 책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 말했었다. 타이밍, 타이틀, 타겟. 그리고 나는 타이밍과 타이틀에서 좋은 점수를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 남은 것은 타겟. 즉 적절한 독자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타겟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어렵고, 일반독자가 읽기에는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많이 팔릴 것 같지 않다.

그래서이다.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안 팔리는 철학책을 쓴 나로서 동지애를 발휘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고, 철학과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처세술과 돈벌이 서적이 판치는 출판계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좋은 책은 읽혀야 한다. 나는 그래서 채희철의 책을 여러분에게 권한다. 채희철과 나는 술 한 잔 나눈 적도 없지만, 얼굴 한 번 마주친 적도 없지만, 이렇게 선전해봐야 나한테는 한 푼도 돌아오지 않지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