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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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와 만남

사람들은 현실성 없는 도덕교과서 같은 말을 할 때, “공자님말씀 같은 소리만 하고 않았네.”라고 비꼬거나,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공자님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네.”라고 말한다.

두 말에 모두 공자님이 들어가 있지만, 썩 반가운 어조가 아니다. 게다가 ‘공자’도 아니고 ‘공자님’이란 호칭이 비꼼이나 비난의 어조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런 표현을 억양법이라고 하나?

어쨌든 공자는 우리의 삶에 문화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 뿌리에는 유교적 잔재가 깊이 남아있다. 근거 없는 선후배 의식이라든지, 전근대적인 위계서열, 사라지지 않는 남녀차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뿌리가 깊은가? 명절만 되면 목숨 걸고 움직이는 귀향행렬도 공자님 덕분이다. - 공자의 말은 우리 지식의 구성요소로서는 낡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성인으로 공자의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질문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왜? 󰡔논어󰡕를 읽고 안 읽고로 구별할 수 있는 현실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성서󰡕를 읽고 안 읽고는 예수쟁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종합영어󰡕를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는 영어실력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수학의 정석󰡕을 기본편을 뗐느니 종합편을 뗐느니 실력편을 뗐느니에 따라 수학실력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논어󰡕는 그러한 기준을 가르는데 별무소용이다.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도 짧은 감옥생활이 아니었다면 󰡔논어󰡕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감옥의 장점(?)은 무한정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의적 게으름이 아니라 타의적 게으름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감옥에서 지혜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단연 으뜸은 독서다. 빨리 읽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소명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낮잠을 자도 상관이 없고, 교도관 몰래 간식내기 도박을 해도 되지만, 나는 독서를 시간보내기 방법으로 택했다. 그것도 일상에서는 전혀 안 읽을 것 같은 책, 두꺼워서 손이 가지 않는 책,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을 책,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결코 안 읽었을 책의 목록을 적어 그 책을 구입하였다. 󰡔주역󰡕, 󰡔맹자󰡕, 󰡔근사록󰡕, 󰡔금강경󰡕, 󰡔대학,중용󰡕 󰡔소학󰡕의 목록에 󰡔논어󰡕도 끼여있었다. 이른바 유교경전인 사서삼경과 불교경전이라 칭하는 서적들이 나의 타겟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는 것이다. 읽다가 지치면 안 읽으면 그만이고, 읽다가 흥이 나면 계속 읽으면 그만이다. 본문뿐만 아니라 본문 밑에 있는 주석도 꼼꼼이 챙겨 읽고, 한자도 노트에 써가면서 읽어나가는 것이다.

󰡔논어󰡕의 시작은 이러했다. “배우고 때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 멀리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무릇 모든 책의 시작은 그 책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동양의 최고 고전이라는 책의 시작이 이렇게 밍밍하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도 없고, 무엇을 실천하겠다는 결기도 없다. 공자의 웃음만이 책의 서두에 가득하다. 그윽한 웃음의 세계. 나는 이 대목을 읽은 날 밤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여보, 공자의 책을 읽고 있어요. 참 재미난 노인네더군요. 처음부터 즐거움으로 시작해요. 학문은 즐거운 것이다. 친구를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즐겁게 살면 된다. 이렇게 말이요. 그래서 나는 공자의 󰡔논어󰡕에 부재를 나 스스로 달아보았다오. 즐거운 학문이라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도 음미할만해요. 즐거워야 공부다. 즐거워야 친구다. 즐거워야 사는 것이다. 대우로도 생각해봐요. 즐겁지 않으면 공부가 아니다. 즐겁지 않으면 친구가 아니다. 즐겁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 몸은 갇혀 있지만 명상놀이는 즐거워요. 당신도 즐기구려. ……” 

물론 󰡔논어󰡕에는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도 아쉬움도 체념도 슬픔도 있다. 하지만 나를 압도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즐거움이다. 책의 겉표지가 책을 보호하듯이 논어의 첫머리가 논어 전체를 감싸고 있다.

만남의 첫 인상이 중요하듯, 나는 공자를 그렇게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고리타분한 인간이 아니라 웃는 인간이다.

   

■ 장자와 만남

동양 최대의 이야기꾼을 꼽으라면, 최고의 허풍쟁이를 꼽으라면, 최상의 독설가를 꼽으라면, 최고의 판타지 작가를 꼽으라면, 그 교집합에 장자가 위치한다.

처음부터 허풍으로 시작한다.

“북쪽 끝 바다 검푸른 곳에 수천 리에 달할 만큼 거대한 곤(鯤)이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이 물고기가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로 변했는데, 그 크기 역시 수천 리에 달했다. 붕이 힘껏 날아오르면 활짝 펴진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 같았다. 이 새는 풍랑이 일면 천지(天池)라는 이름의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곤(鯤)은 본래 작은 물고기의 이름이다. 피라미 정도를 상상하면 된다. 그런데 장자는 뻥을 친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너 피라미라는 물고기 알아? 그 물고기 크기가 5천 킬로미터야. 재밌지. 그런데 더 재밌는 건 그 물고기가 새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거야. 이 새가 한 번 날잖아 그러면 수 천 미터 오른다. 날개를 펴면 그 길이가 또 5천 킬로미터야. 이런 새 본적이 있어? 없지. 나는 봤는데. 지금 어딨나고? 천지에 가 있다고 하더라고. 진짜야. 진짜라니까. 히히히.”

우리 아들놈이 친구들과 나누는 허풍 수준이다. 왜 우리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했잖은가. 남산타워로 빛을 비추면, 그 빛이 63빌딩으로 반사되고, 반사된 빛이 한강에 비추면 한강물이 둘러 갈라지면서 마징가제트가 나올거라는 시시껄렁한 농담. 그래서 세상을 구할거라는 허황된 이야기말이다.

논어가 미소(微笑)를 우리에게 선사한다면 장자는 폭소(爆笑)대잔치다. 장자의 세상에서 권위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권위는 조롱거리가 된다. 위대한 성현의 말은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장자는 아내의 주검 앞에서 춤을 추는 미친놈이다. 신체불구자, 범죄자, 쓸모없는 자, 못생긴 자, 미천한 자, 버려진 나무나 주목받지 못하는 물고기 등이 주인공이다. 󰡔장자󰡕라는 책은 그 광인과 소수자들이 벌이는 난장판이다. 푸코가 󰡔장자󰡕를 읽어보았을까? 읽어보았다면 아마도 ‘형님’하며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자체로 즐기면 된다. 게그콘서트를 보면서 진지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관람객의 자세가 아니다. 웃을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장자를 그렇게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도 진지하게 끼어들려는 자가 있다면 장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냅둬, 난 이렇게 살다가 죽을거야. 내가 이렇게 사는데 니가 보태준 거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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