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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ㅣ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대담의 매력
이 세상에 혼자 떠드는 것처럼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것은 혼자 술마시는 것에 버금가는 불행한 사태다. 민주주의의 기초가 바로 상호인정과 상호소통에서 비롯됨을 생각해보면, 대화의 중요성은 실로 막중하다. 그것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담의 매력은 쌍방성에 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상호긴장과 갈등의 산물이 바로 대담이다. 대담의 미덕은 대중성에 있다.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학문적 체계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삶의 진솔함과 일상적 언어의 사용을 통해 쉽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한편 대담이 일상의 잡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펼쳐놓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엄청난 내공이 쌓여야 한다. 신문이나 잡지에 한 두면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책으로 묶어낼 정도의 내용을 담으려면 그 사상의 깊이와 넓이가 확보되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주된 저술을 대화체로 쓴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리라. 담헌 홍대용의 의산문답도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깊게 읽히고 쉽게 읽힌다.
■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의 대담
최근 들어 읽은 대담집으로 탁월한 한 권을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를 꼽는다. 인문학자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비평이론)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생물학)이 '생명공학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테마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벌인 10차례의 대담과 4차례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전체 분량이 600쪽을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이유는 두 학자의 내공도 기여하지만, 대담의 주제가 바로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는 생명과학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말을 하자면, 인문학적 소양은 어느 정도 갖추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자연과학은 거의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인문학과 생물학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인문학적 주제와 자연과학적 주제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도 매우 궁금한 사안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홍만의 K1 대회보다 훨씬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대담자는 유전자와 문화, 복제와 윤리, 창조와 진화, DNA와 영혼, 육체와 정신, 신화와 과학, 인간과 동물, 아름다움과 과학, 암컷과 수컷,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종교와 진화, 사회생물학과 정신분석학 등 13개 주제를 종횡무진하면서 때로는 논쟁하고 때로는 서로에 대해 감탄하면서 성숙의 창을 열고 있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터운 세계’에 대한 도정일의 도저한 열망과 ‘생명’에 대한 최재천의 치열한 열정을 만날 수 있다.
■ 동양철학자과 서양철학자의 대담
최근에 나온 책은 아니지만 대담집 다운 대담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국내 책은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이다. 공교롭게도 위의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나는 이 책을 읽고 휴머니스트라는 출판사가 썩 괜찮은 곳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작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짐작이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 쌓았던 내공과 판매의 성공에 힘입어 대담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한다.
주제는 좀 산만하게 펼쳐지지만 시원한 편집과 사진의 이용, 현장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긴박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실력은 대담집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대담자들이 철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김용석 교수와 이승환교수라는 점도 책의 깊이를 주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철학이 추상세계를 떠도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세계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학문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책이다.
■ 어려운 사람일수록 대담집을 찾아라



이쯤에서 나의 독서 비결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데, 철학자 행세를 하며 산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는 행세를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대해준다. 고맙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자찬이라 쑥스럽지만, 나의 철학적 삶의 미덕은 쉬움에 있다. 내 직업이 학생을 상대로 하는 강사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다. 그런 재주가 갑자기 쌓이는 것은 아니지만, 비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강연집이나 대담집을 찾아 읽는 것이다. 운수가 좋으면 수십권을 읽어도 모를 수 있는 사상의 핵심을 몇 줄만에 캐치할 수도 있다. 그때의 기분이란……. 그렇게 깨달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원서-물론 한글로 번역된 것-에 접근하면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이, 흩어진 구슬이 꿰어지듯이 술술 착착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접근했던 학자들이 현대철학자들인 질 들뢰즈였고, 미셸 푸코였으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였다. 모두가 어려운 철학하기로는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나는 그들의 사상을 대담을 통해서 큰 줄기를 이해한 후, 접근하기 쉬운 책부터 한 권씩 독파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그들의 학문적 진지함과 치열함을 배웠고, 깊이와 넓이에 감탄했으며,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좀 더 실감나게 만들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푸코의 맑스라는 책에 부록2에 실려 있는 대담은 푸코가 고등학생과 대화를 나눈 이야기를 수록한 것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나는 그 대담을 통해 푸코가 결국 하고자했던 작업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번 읽어보라.
나는 출판문화 속에 대담의 형식이 널리 과감히 정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학문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아주 필요한 사안임과 동시에, 대중의 학문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공부 역시 아주 어린 아이들과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기를 소망한다. 학문의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려 있을 터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