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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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어수선한 시절에 나는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2)을 읽는다. 1978년에 발표된 이 글이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 해석에 반대한다등의 글로 우리에게 알려진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다. 그녀의 작품은 현실적 세계에 대한 고발이자 도발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손택은 결핵으로 죽은 아버지를 쉬쉬하던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핵은 당시 뭔가 수치스러운 질병이었던 것이다. 이후 손택은 1976년 유방암 4기라는 판정을 받는다. 이때부터 손택은 의학적으로 지성적으로 질병과 투쟁한다. 1978년 수술과 화약요법으로 완치된 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이 질병을 대하는 태도와 질병을 신비화하는 언어를 쫓아내고자 노력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국에서 출간된 책에는 은유로서의 질병뿐 아니라 에이즈로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쓴 글 에이즈와 그 은유(1988)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에이즈를 도덕적 타락에 의한 천벌로 여기고,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편집증적 정치의 군사적 은유가 넘쳐났다. 인류의 적이라든지, 박멸이라든지, 격퇴라든지 온갖 무시무시한 용어로 에이즈를 정죄했다. 이에 맞서 손택은 질병은 질병이며, 치료해야할 그 무엇일 뿐이라고 말한다. 에이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택은 은유 대신에 투명성(transparency)’을 요구한다. 투명성개념은 온갖 신비화와 은유에 맞서는 손택의 무기이다. 그것은 인간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투명성이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을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이후 그녀는 1998년 자궁암이 걸려 자궁절제 수술을 받았지만, 결코 질병에 굴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생명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일단 사형 선고를 받고 나면, 당신은 태양도 죽음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 할 겁니다. 당신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지요. 그러나 당신의 마음 속에는 끊임없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으로 부른답니다.”

 

나는 이 시절에 용기를 내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다. 질병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지만, 질병을 둘러싼 온갖 은유와 공포가 더욱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이 책은 그 질병의 은유를 파헤치고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또 다른 질병을 치유하게 만드는 책이다.


‘역병‘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질병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적 재앙, 악, 천벌을 나타내는 최고의 본보기로 오랫동안 은유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역병이라는 은유는 질병이란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3쪽)

질병은 삶을 따라다니는 그늘, 삶이 건네준 성가신 선물이다. 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이 두 왕국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나는 법, 아무리 좋은 쪽의 여권만을 사용하고 싶을지라도, 결국 우리는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우리가 다른 영역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곧 깨달을 수밖에 없다.(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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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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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은 온통 거대담론에 경도되다가 오류나 한계가 발견되면 다시 온통 미시담론에 경도된다. 그 전환 사이에 합당 한 비판과 성찰을 찾아보긴 어렵다. ‘거대담론의 시대미시담론의 시대가 있을 뿐이다. 거대담론 시대에 미시담론에 주목하면 반동적 자유주의자로 치부하고, 미시담론 시대에 거대담론에 주목하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라 치부하는 식이다.”라는 김규항의 문장을 빌어 김규항과 나를 비유하자면, 나는 반동적 자유주의자에 가깝고, 김규향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깝다.

내가 김규항의 새책을 읽고 있던 중, 김규항의 글은 기승전-계급이거나 기승전-혁명이라 질린다는 후배 시인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의 견결함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는 그 견결함이 질리나보다. (물론 후배 시인이 이 글을 읽으면, 나의 초점없음을 재비판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책은 저자를 떠나면 독자의 것인 것을.

이번 김규항의 혁명노트를 읽으면서, 나는 예전의 그가 쓴 예수전이 떠올랐다. 두 저작의 거리가 11년이다. 그러나 두 저작의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삶의 정신과 태도를 바꾸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혁명은 예수의 회개(메타노이아)’와 공명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세상을 살면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투쟁을 전개했듯이,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에 나사렛이라는 촌동네에 살면서도 식민지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사람으로 어떻게 살지 종교적, 실천적 투쟁을 벌였다.

예수로부터 2000, 마르크스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 4차산업 혁명을 말하고, 혁신을 말하고, 개혁을 말하고, 민주를 말하는 우리 사회는 살만한가?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모두가 자본의 노예가 되고, 상품을 숭상하는 물신주의가 모든 이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규항은 11년 동안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세상을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단상의 형태로 절차탁마했던 것이다.

이 노트처럼 얇고, 고작 한 두 단락으로 이루어진 글 119개의 모음이 묵직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대한 해석을,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김규항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용기있는 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특히 마르크스의 물신주의라는 개념으로 사회주의 역사, 포스트 이론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제시한 것에서는 무릎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파편화되고 불투명해진 세상을 볼 수 있는 깨끗한 안경 하나를 장만한 기분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읽어서 다 감지하지 못한 부분은, 우려내듯 읽으며 다시 찾아볼 심산이다. 어쨌든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것이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


모든 인간은 개성이나 인격적 면모와 상관없이 다른 모든 상품과 함께 ‘가격’으로 표현된다. 물론 품위나 위엄도 가격 순이다. 높은 가격을 가진 인간은 진심으로 존중받고 낮은 가격을 가진 인간은 진심으로 무시된다. ‘빈곤한 활동가’의 특별한 식견을 가진 이야기보다 ‘개념 있는 부자’의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가 더 깊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 일은 이상할 게 없다. ‘노동자는 왜 자본주의사회를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잃는다. 물신성이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원시인이 자연현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하는 습성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현대인에게 자본주의에서 삶은 해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선 원시인과 다를 바 없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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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 11개의 키워드로 읽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생명이야기
정철현 지음 / 북드라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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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가 높이를 만들어낸다. 구체가 추상을 이긴다. 변이가 적응보다 앞선다. 우연의 패턴화가 필연이다. 생명 자체가 차이이며 다양성이다. 고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할 뿐이다. 자연에 좋고 나쁨은 없다. 완전은 존재하지 않으며 불완전만이 있을 뿐이다.

‘11개의 키워드로 읽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생명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정철현 저 존재하는 것은 무었이든 옳다를 읽으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단상들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위대한 생명과학자이며 진화생물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람이다. 그는 평생을 달팽이 연구에 매진했다. 그 스티븐 제이 굴드의 저술을 읽으며, 생명을 사랑하는 아마추어(amateur)’의 진정한 의미를 구현했던 그를 애정하여 그의 과학철학을 11개의 키워드로 정리한 사람은 대학시절 생명공학과 과학철학을 전공했던 정철현이다. 정철현은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한 것을 밑천삼아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그러니까 한국의 아마추어 과학철학자 정철현이 스티븐 제이 굴드를 사랑한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낸 아마추어리즘의 헌사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아마추어라는 말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위해서 사족을 달자면, 아마추어리즘은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자로서 굴드의 새로운 연구 공식이며, 불완전하고 다양한 생명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굴드는 정해진 시간만 일을 하는 생계형 전문가인 프로페셔널과 자신을 대비하며 아마추어리즘을 찬양했다. 큰 제목만 소개해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아 열거해본다. 구입하여 읽고 굴드의 새로운 과학세상에 흠뻑 빠져 보시길!:

프롤로그 _ 진정한 아마추어, 스티븐 제이 굴드

keyword 1 팡글로스 패러다임: 자연선택에 대한 이상주의

keyword 2 역사적 제약: 장애가 아닌 생명의 도약대

keyword 3 중복성: 생명이 택한 창조성의 장

keyword 4 굴절적응: 불완전성을 향한 진화

keyword 5 단속평형: 자연은 도약한다

keyword 6 발생학: 발생메커니즘의 변화, 불연속을 만들다

keyword 7 대폭발과 대멸종: 새로움을 만드는 불연속성

keyword 8 불연속성: 불연속성이 만든 생명사의 패턴

keyword 9 구조적 제약: 진화의 또 다른 원동력으로서의 생명

keyword 10 우연: 힘들의 충돌이 낳은 예측불가능성

keyword 11 역사적 과학: 우연성의 과학

에필로그 우연한 세계: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옳다



우연한 세계, 다양성 넘치는 생명의 진화 속에서 굴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wonderful life!" "이렇게 근사한 삶들이 있다니!" 개개의 생명이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데, 어찌 누구의 삶을 비천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또 이런 생명체에 누가 하등과 고등의 딱지를 붙인다는 말인가. 굴드가 보기에 이들 모두가 승자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원더풀하게 살아가는 삶의 달인이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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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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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우선은 페미니즘 신학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 데리다를 공부하면서 이 전무후무하게 어려운 철학자를 읽어낼 수 있는 철학자를 찾던 중에 다시 찾은 것이 강남순이었다. ()가 강의하는 내용은 신학에서 철학으로 종횡무진이다. 특히 그()자크 데리다 사상, 코즈모폴리터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과 같은 현대 철학적·신학적 담론들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임마누엘 칸트,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등의 사상과 연계한 코즈모폴리턴 권리, 정의, 환대 등의 문제들에 학문적·실천적 관심을 두고 다양한 국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된다.

데리다를 친절하게 소개해준 강남순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최근 저술을 모두 주문하여 사두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개정판), 배움에 관하여, 용서에 대하여, 정의를 위하여,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등이다.

이번에 대학과 중용 강의를 준비하며 그 책 중에서 배움에 관하여(동녘, 2017)를 찾아 다시 읽었다. 90편의 짧막한 에세이 모음집이라 이론적 치열함은 없지만, 철학적 개념과 삶이 잘 녹아나는 생활글이라 술술 읽힌다. 곳곳에 보석과 같은 문장들이 박혀있다. 두 개만 더 인용해보면 ;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는 을 가져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물음을 묻는 이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해답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좋은 물음 묻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점.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강조하는 것이다.”(126)

진정한 인문학적 배움이란 속에 갇힌 자기충족적 깨달음만이 아니다. -타자-세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며 깨우침이다. 이러한 의미의 배움이란 나의 인식론적 사각지대에 대한 지속적 인식을 통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확장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275)

 

깊은 생각은 섬세한 언어선택을 하게 한다는 것을 강남순 선생의 글을 통해 배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의 보고()이다.


장애인을 지칭하는 한국어는 다른 대안적 언어로 대체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한국어로는 장애인이라는 표현 이외에 별로 대안적 언어를 찾기 힘든데, 영어로는 ‘handicapped’에서 ‘disabled’로, 또 ‘differently abled’ 등으로 여러 번 변화를 거듭했다. 특정한 그룹의 사람을 지칭하는 라벨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한 사회가 지닌 장애인들 존재의 존엄성과 인권 의식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보이는 장애’가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상 장애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다른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라는 ‘differently abled’라는 표현은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것 같다.(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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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꿈 기계의 꿈 북클럽 자본 시리즈 8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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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마르크스의 자본을 다시 읽는다는 것이, 낡은 혁명가의 호사가적 취미이거나, 역사적 고전의 음미를 통하여 교양을 넓히는 일이라면, 하루하루 살기 바쁜 우리에게는 낭비적 생활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고, 현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현재적 실천양식과 미래적 비전이 없다면 독서는 경제적 비용은 적게 들지 모르지만, 시간을 비용으로 환산하자면 커다란 낭비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의 자본이 그리 쉽게 읽을 수 있는 저작도 아니니, 자신의 실존과 관련이 없는 서적이라면 고문에 가까운 일이리라.

하지만 4차산업 혁명 운운하며 인간의 자리를 기계가 빼앗을 것이고, 인간은 더욱 무용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협박삼아 더욱더 노오력을 해야한다는 경쟁적 언설에 넋을 잃은 자라면 이 책은 읽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자본주의는 기계제 생산을 이윤창출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단계로 상정하여 고도의 노동착취를 성취해왔지만, 기계가 반드시 자본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자본은 기계를 반드시 원하지만, 기계에게 자본은 필수불가결하지 않다.

그러니 인터넷과 AI, 로봇과 공장, 그리고 자원을 제공하는 자연이 반드시 자본주의하에서만 작동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낭설이자 환타지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꿈과 기계의 꿈은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유물론적 상상을 조금만 더 현실화시키면 직장을 가지고 임금을 받는 방식의 노동방식이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러리라는 전망은 결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래는 노동시간의 강화와 연장을 통해 꿈꿔지는 사회가 아니라 노동시간의 단축과 자유시간의 증대를 통해 새롭게 단련된 신인류(마르크스는 이를 당대의 언어로 프롤레타라이트라 표현했다.)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이는 자연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고, 상상적 창의와 훈련, 새로운 생산과정을 통해서 지난한 시간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기계의 꿈이 자본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해방과 인간해방을 구상하는 인간의 꿈과 일치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내가 마르크스를, 자본을 다시 읽는 이유이다.


만약 기계가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계가 상품이기를 멈추고 자본(고정자본,불변자본)이기를 멈춘다고 해서 그 작동까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을 크게 감축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었지요. 공장에서 축출되는 노동자는 길바닥에 나앉았고, 공장에 머문 노동자들은 노동일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에 시달렸으니까요. 그러나 생산력 증대가 그 자체로 고통의 이유일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이 줄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노동해방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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