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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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은 온통 거대담론에 경도되다가 오류나 한계가 발견되면 다시 온통 미시담론에 경도된다. 그 전환 사이에 합당 한 비판과 성찰을 찾아보긴 어렵다. ‘거대담론의 시대미시담론의 시대가 있을 뿐이다. 거대담론 시대에 미시담론에 주목하면 반동적 자유주의자로 치부하고, 미시담론 시대에 거대담론에 주목하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라 치부하는 식이다.”라는 김규항의 문장을 빌어 김규항과 나를 비유하자면, 나는 반동적 자유주의자에 가깝고, 김규향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깝다.

내가 김규항의 새책을 읽고 있던 중, 김규항의 글은 기승전-계급이거나 기승전-혁명이라 질린다는 후배 시인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의 견결함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는 그 견결함이 질리나보다. (물론 후배 시인이 이 글을 읽으면, 나의 초점없음을 재비판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책은 저자를 떠나면 독자의 것인 것을.

이번 김규항의 혁명노트를 읽으면서, 나는 예전의 그가 쓴 예수전이 떠올랐다. 두 저작의 거리가 11년이다. 그러나 두 저작의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삶의 정신과 태도를 바꾸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혁명은 예수의 회개(메타노이아)’와 공명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세상을 살면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투쟁을 전개했듯이,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에 나사렛이라는 촌동네에 살면서도 식민지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사람으로 어떻게 살지 종교적, 실천적 투쟁을 벌였다.

예수로부터 2000, 마르크스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 4차산업 혁명을 말하고, 혁신을 말하고, 개혁을 말하고, 민주를 말하는 우리 사회는 살만한가?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모두가 자본의 노예가 되고, 상품을 숭상하는 물신주의가 모든 이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규항은 11년 동안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세상을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단상의 형태로 절차탁마했던 것이다.

이 노트처럼 얇고, 고작 한 두 단락으로 이루어진 글 119개의 모음이 묵직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대한 해석을,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김규항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용기있는 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특히 마르크스의 물신주의라는 개념으로 사회주의 역사, 포스트 이론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제시한 것에서는 무릎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파편화되고 불투명해진 세상을 볼 수 있는 깨끗한 안경 하나를 장만한 기분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읽어서 다 감지하지 못한 부분은, 우려내듯 읽으며 다시 찾아볼 심산이다. 어쨌든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것이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


모든 인간은 개성이나 인격적 면모와 상관없이 다른 모든 상품과 함께 ‘가격’으로 표현된다. 물론 품위나 위엄도 가격 순이다. 높은 가격을 가진 인간은 진심으로 존중받고 낮은 가격을 가진 인간은 진심으로 무시된다. ‘빈곤한 활동가’의 특별한 식견을 가진 이야기보다 ‘개념 있는 부자’의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가 더 깊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 일은 이상할 게 없다. ‘노동자는 왜 자본주의사회를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잃는다. 물신성이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원시인이 자연현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하는 습성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현대인에게 자본주의에서 삶은 해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선 원시인과 다를 바 없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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