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분서 - 동양고전총서 11
이지 / 홍익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탁오(卓吾) 이지(李贄)의 <분서(焚書)>(홍익출판사)를 읽고 있다. 이지는 명나라 후기에 활약했던 후기 양명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지의 광적이고 자유분방한 학문세계는 그에게 양명학자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너무도 부족하다.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을 넘나들었고 천주교와 이스람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명나라 후기의 어지러운 세상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당대 사상계에 불꽃과 같은 비판을 던졌던 사상가였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저서를 ‘태워버려야할 책’이라는 이름의 <분서>라 썼겠는가. 이지의 사상과 행동은 당대 지배층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결국 그는 70세의 나이가 훨 넘어서 감옥에 갇혔으며, 그 속에서 자결함으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죽을 때까지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

그는 이념적 도그마를 멀리하고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과정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몰랐고, 공자를 존중했지만 공자에게 무슨 존중할 만한 것이 있는지 몰랐다. 속담에 이르기를 난쟁이가 키 큰 사람들 틈에 끼어 굿거리를 구경하는 것처럼, 남들이 좋다고 소리치면 그저 따라서 좋다고 소리치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전까지의 나는 정말 한 마리의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댔을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성인의 가르침에 대하여])

책의 뒷표지에도 인용되어 있는 이 글은 자신의 학문세계에 대한 준엄한 자기비판이다. 자신이 그동안 공부해온 것이 영문도 모르고 짖어대는 ‘개소리’에 불과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에게 공부는 먹는 행위처럼 절박하면서도 실존적인 것이었다. 그는 며칠을 굶주리다가 기장밥을 얻어먹으며 이렇게 깨닫는다. “만약 내가 도를 추구하는 것이 지금 먹을 것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면, 공자든 노자든 가릴 겨를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하, 밥먹듯이 공부하라!

나는 지금 거짓에는 한치의 굽힘도 없이 오만한, 부정과 허위에는 한발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한, 자신에게 대해서는 ‘벌레’라 말할 정도로 겸손한 이지의 <분서>를 읽고 있다. 그의 글로 인해 차가워진 나의 마음에 불꽃이 일고 있다. 그로 글로 인해 당당한 삶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다. 나의 시들한 중년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그러니까 내가 얼치기 운동권으로 편입되었을 때, 신념 아닌 신념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조직주의(?)였다. 계급이라는 명칭이 갖는 집단적 어투가 매력적이었고, 개인의 희생을 통해 보위되는 조직이 위대해 보였다.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행동하는 자는 비판받아 마땅한 자였고, 동지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자는 해악적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했었다?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사람(개인)보다 조직이 먼저인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 때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사람(개인)보다 민족이나 계급이 우위에 서 있어야 하는가? 그 때는 그런 질문을 품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잃었고, 많은 사람과 등을 돌렸으며, 많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다. 역으로 나 역시도 아프고 외롭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다. 무엇보다 개인을 살려야한다는 사실을, 하늘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개인이라는 것을, 그것이 민주주의의 주춧돌이라는 생각을 알지 못했다.

어떠한 사상도 한 사람과 맞바꿀 수 없다. 그 사람의 생명은 사상과 민족보다 먼저인 것이다. 한 사람이 자유로울 때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다. 그 역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도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다. 죽음을 걸고 달려가는 이유도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다. 남에게 던졌던 돌을 추슬러 나에게 던지는 이유도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고 당신이고 동지들이다.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등치시켰던 모순 논리의 과거상황을 이제는 부끄러워한다.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와 대립쌍이었을 뿐, 개인주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집단주의의 논리로 무시했던 개인주의를 이제는 건강하게 살려내야겠다. 숭고한 개인주의라는 말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그 개인주의의 부활을 나는 박노자씨가 쓴 <나를 배반한 역사>(인물과 사상사)에서 읽는다. 상식이고 윤리였어야할 덕목을 이제야 부끄럽게 깨닫는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각주와 이크의 책 읽기
이권우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는 즐거움 중 색다른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처음의 관심사와는 다르게 샛길로 빠지는 것이다. 문학책을 읽다가 거기에 인용된 철학서적에 매력을 느껴 철학으로 빠지기도 하고, 철학책을 읽다가 거기에 나온 그림에 빠져 미술에 대한 책을 읽게되고, 미술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음악으로, 음악에서 사회학으로, 사회학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다시 문학으로 이렇게 종횡무진하다보면 끊어진 다리가 이어지듯이 동떨어진 영역들이 한줄로 묶인다. 물론 그 줄은 느슨하고 성기며 가늘지만.

근래들어 책을 읽고 소개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생겼고, 책을 소개하는 책들도 많이 양상되고 있다. 일종의 책읽기 책이라고 할수 있는 이런 책들은 나름대로 양서를 선택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마다 양서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을터이지만, 나의 선택기준은 쫀쫀한 편은 아니다. 나는 한 책에서 하나의 아이디어,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지적흥분, 하나의 정보만 얻어도 그 책을 산 값은 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각종 책읽기 서적이 난무하지만 다 사볼 수 있는 처지는 못되니, 눈에 띄는 대로 한권을 샀다. 이권우씨가 쓴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이다. 표지에 큼직한 제목과 더불어 이런 글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다. “ 아직은 애벌레이지만 찬란한 비상의 꿈을 꾸고 있는 이땅의 모든 책벌레들에게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전하는 독서예찬. 이 책을 펼치는 순건, 당신은 독서라는 이름의 성채(城砦)에 사로잡힌다.” 두 번째 문장이 다소 과장된 듯하여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흔쾌히 만원을 투척하여 샀다. 지불비용에 비해 책이 두툼한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독백에 해당하는 ‘각주의 책읽기’보다는 대화에 해당하는 ‘이크의 책읽기’를 선호하는데, 이때 ‘이크’란 순수 우리 감탄사에 해당한다. 이크! 이런 것을 몰랐다니. 이크! 놀랍군 등등의. 책속에는 지은이의 독서에 대한 열정이 곳곳에 숨어있고, 지은이가 선별하여 읽은 책들에 대한 소개가 빽빽하다. 지은이의 문체가 건조해 내 취향은 아니지만, 책읽는 일로 업을 삼은 지은이의 직업관은 참으로 부럽고 부럽다.

나는 이권우씨가 읽은 책을, 아니 그의 느낌을 훔쳐 느끼며, 내가 읽어야 할 책을 고르고 있다. 책을 읽으며 다음 책을 선별하는 즐거움이 이 책에는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릇 그림이 많은 책을 사보는 이유를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훔쳐보기 위해서다. 훔쳐보는 내용과 질의 문제겠지만 그 훔쳐봄을 통하여 우리는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다. 근래의 훔쳐보기 책 중에서 가장 발군이 바로 강명관씨가 쓴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푸른역사)이다.

보통의 춘화도(포르노잡지)가 양물의 분기탱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의 미덕은 혜원 신윤복의 30여 풍속화를 통하여 조선 후기의 성풍속사를 은글슬쩍 그러나 자세히 드러내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발기되지 않은 상태로 성적흥분이 오래 지속되는 책이다. (남성적 표현을 용서하시라. 내가 남성인지라)

혜원의 풍속화는 성행위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고, 그 이전의 상태를 그려내고 있거나, 그린다 하더라도 감춤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그 이후나 그 속은 우리의 상상력의 몫이다. 물론 혜원의 풍속화의 목적이 우리의 성적 흥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림을 통하여 조선 후기의 양반의 이중적 모습을, 아니 본래적 모습을, 여인의 감추어진 욕망을, 아니 본래적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조 사회가 근업과 유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성적욕망이 들끓는 사회였으며, 아무리 이를 막으려 막으려 해도 터지는 봇물처럼 삶을 축축히 적시고 있음을 알게된다.

술풍속, 놀이풍속, 기생풍속, 통틀어 유희적 풍속들이 그의 그림을 통하여 야하고도 아름답게, 꾸밈없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독보적인 성풍속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혜원은 공적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지만, 그의 거침없는 태도로 인해 우리는 풍요로운 정신을 얻게 되었다.

지은이 강명관씨는 이 풍속화에 대한 설명에 곁들여, 아니 풍속화 소개를 시발점으로 조선시대 성풍속사를 꼼꼼히 검토하고 있다. 그의 설명으로 인해 나는 선술집의 문화가 조선조 사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처음 알게되었고, 풍속화의 이면을 감상하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음침한 성적 욕망이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를 바랐겠지만, 신윤복은 성적 욕망은 음침하지 않으며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예술적으로 입증함으로 프로이트를 뒤집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윤복은 성적 들뢰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