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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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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통섭이란 단어를 자주 듣게 된다. 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시도들이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다. 화가이자 발명가,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르네상스 시절 이후로 서양사회는 제너럴리스트 보다는 스페셜리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해왔던 것 같다. 복잡해진 학문 체계에서 나온 필연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이는 다른 분야의 전문지식에 대해 무지한 전문가들을 낳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분기된 학문체계는 자신들의 영역을 설명하는 것에는 강점을 보이지만 통합적으로 사고해야하는 경우에는 약점을 드러내곤한다. 그러니까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한사람은 코를 만지며 코끼리는 뱀이라고 하거나 한사람은 다리를 더듬으며 기둥과 같다고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예술가, 음악가, 철학자, 건축가, 영화감독, 언어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노엄 촘스키라던지, 미셸 공드리와 같은 어디에선가 들어봤음직할만한 각 분야의 대가들이 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각 분야의 유명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흥미를 자극한다.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서로의 분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고 또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자신들의 전문분야에서 습득한 관점을 통해 제시된 주제와 당면한 문제의식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과학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른 것을 배제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는 둥근지 평평한지 둘로 나뉘어 오랜기간동안 논쟁을 벌여왔지만, 이제는 평평한 지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평평한 지구에 대한 믿음은 그릇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으로 어떠한 분야든지간에 성역없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믿음에 대해 의심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믿음도, 언어학적인 분석도, 심리학적인 접근도 이제는 뇌과학과 함께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 그 자체가 문제 해결의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과학은 객관적인 방법으로 데이타를 제시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의 방법론으로 해석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인간이고, 정립된 과학을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용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말이다. 


 일례로 6장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지구 온난화에 대해 우려를 다양한 방법으로 경고하고자 했던 기후학자(스티븐 슈나이더)가 등장한다. 그는 오랜 기간 연구해온 수치를 분석해 지구 온난화를 경고해왔지만,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해석의 도구를 들고와 지구 온난화가 거짓이라고 선전해왔다. 두가지 입장 모두 다 설득력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 두번째 입장의 경우에는 에너지 관련 기업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접근이 있었다. 오늘날 온난화의 문제는 전지구적인 것이 되었지만, 이제는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고 슈나이더는 지적하고 있다. 이는 말기에 발견된 병은 비용이 크게 들어가면서도 완치 확률은 낮아지는 것과 유사하다. 과학은 이처럼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다수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들이 가져야하는 요건 중에 하나가 객관적인 사실과 정치적인 접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내가 속해있는 건축 분야 역시 다양한 종류의 통섭이 진행되고 있다. 건축 자체가 철학, 경제, 역학, 미학 등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분야이기는 하지만 건축물에 더욱 다양한 가능성과 의미를 담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예를들어, 단순히 기능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건축물을 넘어서, 친환경적인 기능을 고민하는 것은 이제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친환경적인 건축물에 대한 관심사는 태양광 혹은 지열을 이용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법부터 궁극적으로는 에너지 제로의 건물인 패시브 하우스를 만드는 것 혹은 도심 농장을 만들어 생태적으로 자족하는 도시에 대한 개념에까지 이른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다보니 깊이 면에서 조금은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한편 패널들이 짧은 대담을 통해 서로 예의를 차리느라 치열한 토론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동감하고 또 정보를 교환하는 것에 급급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이 긍정적인 것은 어쩌면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분업화된 오늘날의 학문 체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한 '통섭'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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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감각
Juhani Palssasmaa 지음, 김훈 옮김 / 스페이스타임(시공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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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훌륭한 저서이고 이 책을 통해 한수 배워간다고 생각한다면 아까운 돈도 아닐듯. 사실 술 한잔 안먹으면 생기는 돈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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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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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비리그로부터의 명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서점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부터 였던 것 같다. 2011년에는 와튼 스쿨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이 공전의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고, 올해는 예일대의 인기 강의라는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한국에 출간 되었다. 명강의라 함은 오랜기간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이고 이는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내적인 의미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강의 자체에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학점을 잘 줬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은 삶의 실용적인 측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유용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물리주의자가 바라보는 생의 긍정'이라는 어쩌면 특이할 것 없는 결론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존재라는 관점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독자들이 수용하기를 바래마지 않는다. 꽤나 정교하게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논리의 틀 안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영혼이나 인격과 같은 요소들의 존재는 부정당한다. 그러나 육체는 어떠한가. 시간이 지나면서 노쇠하고 결국 썩어서 없어지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저자에게 육체야 말로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것으로 여긴다.

 

 '물리주의적 관점'은 인간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다만 컴퓨터나 여타 기계에 비해 더욱 다양하고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충분히 설명된다고 보기 때문에, 영혼이나 절대자의 개념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인간관을 가지고도 생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쩌면 조금은 새로운 시선일 수도 있겠다삶의 가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과 비교해보면 특히나 그렇다. (심지어 몇몇 철학자들은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던가?) 저자는 인생 자체가 축복이라는 관점에 기울어 있는데 읽어나가다보면 물질 이상의 것은 없다는 유물론적인 관점위에 인생은 (신의) 축복이라는 기독교적인 시선을 교묘하게 덧칠해놓은 듯 한 인상을 받게된다.

 

 이는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얻게된 일반해라기 보다는미국이라는 상황에만 성립하는 특수해라는 인상을 준다. 이른바 '박탈이론'이라고 불리는, 살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는게 많기 때문에 생이 가치있다고 하는 주장을 오늘날 여전히 대부분의 주민이 극빈한 상태에 놓여있는 소말리아나 북한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저자의 관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빈곤에 의해 고통받지 않아야하며 자기의 노력에따라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야한다. 구상에 이 정도의 요건이 갖춰진 나라는 많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의심스럽다.

 

 두가지 정도만 더 지적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가지는 개념의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명확한 경계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신체 기관을 향하면 더욱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인간의 인격을 담는 장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뇌일 것이라는 가정이 그렇다. 뇌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절하는 중추인 것은 맞지만, 뇌는 다른 장기나 신체 부분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육체가 쇠락해질때 뇌에 영향을 미쳐 우울증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뇌와 다른 신체조직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인격의 핵심이 뇌에서 온다는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뇌는 다른 장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중추 기관이라는 것이 입증되어야한다. 

 

 다른 한가지는 많은 것을 계량화시킴으로 설명 되는 것에서의 문제점이다명확하고 구체적인 정의가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에서 정확한 실험 결과를 위해서는 명확한 실험값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이나 슬픔이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설령 수치화될 수 있다고 해도 행복과 슬픔을 구분하는 기준점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삶 자체를 긍정 혹은 부정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행복과 불행을 수치화시킨다는 가정은 그야말로 머리 속에서만 행해지는 사고실험일 뿐이지 않은지? 

 

 이런 비판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아이비리그의 명강의라 불리기 위한 필요 요건들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유용하다. '정의는 무엇인가'의 구성방식과 유사하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역시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개념과 의미에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독자는 그 질문에 답하기도 하고 저자의 관점을 수용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형성해 나간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 책을 바라보더라도 저자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면서 즐거워 할 것이리라.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기 시작한 저학년의 대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실제로도 이 책의 시작은 대학생들을 위한 교양 철학강의 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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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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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2011년 기준 10만명당 31.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1위라고 한다. 20대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이 자살이라고 하니, 우울증을 비롯한 마음의 병은 이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정신병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과 현대의학이 주류인 시대에, 이 책은 철학을 통해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취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서 말이다.  


 스피노자를 이야기하면서 데카르트에 관한 언급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향후에 데카르트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저자는 스피노자 관점을 통해 데카르트의 철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현대인들의 마음의 병에 대한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로 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인 세계관은 무엇이고,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스피노자의 관점은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자아

 

우선 자아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해보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던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자아만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불변의 존재였다. 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가던 당시에 신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진다. 오히려 자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용', 즉 '~이 되기(becoming)'를 통해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가지의 역할만 가지고 또 거기에 고정된 상(像)을 쫒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수용하고 또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지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논지를 발전시켜 나아가 불안이나 강박은 고정된 상(像)을 자신에게 억압적으로 투영시켰을때 역시 정신질환 일어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1장 불안증, 5장 강박증) 

 

 정신과 육체

 

  그들이 바라보는 정신과 육체에 대한 관점은 어떠했을까.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육체에서 나오는 감각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성이라는 도구만을 가지고 끊임없는 회의했으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한편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운동을 통해 체력이 좋아지면 그에따라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나, 건강이 나빠진 사람이 쉽게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는 육체로부터 오는 감각이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오히려 그것들을 억압하는 것이 정신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본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깨어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정신병을 일으킬 수 있다. (7장 도착증, 8장 공황장애)  

 

 개인과 공동체

 

 그럼 개개인을 다수로 확장시켜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고립된 섬처럼 작용한다고 본다. 그 안에서 각각의 개인은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기 보다는,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개체이다. 스피노자가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 어떤 식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한 사람의 정서를 좌우한다고 본다. 상호 긍정하는 관계에서는 기쁨을, 억압된 관계에서는 슬픔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타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을 재설정하지 않고, 단지 개개인의 태도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한 치유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2장 우울증)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


 한편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을 스피노자는 '특이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개개인을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낸 기성품과 같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성을 가진 수공예품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특이서의 관점은 전체를 지배하는 신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유일무이한 개체 안에 내재되어있다는 범신론적인 관점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체에 매몰된 개인이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4장 신경증, 9장 중독)

 

 결론

 

 데카르트가 고정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관점 취한다면, 스피노자는 유동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입장을 지지한다. 이성이라는 도구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다. 이성과 함께 이루어온 근대 서양사의 공과를 모두 데카르트에게 돌릴 수 는 없겠지만, 근간에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대안적인 차원에서 관계 중심적인 스피노자의 관점은 관계망의 재설정을 통한 정신적인 아픔의 치유를 포함해, 수평적관계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패러다임으로 유용하게 사용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 시대의 아픔이 단지 개개인의 '내재적인 역능'을 변화시키는 차원에서는 해결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에 있다.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과 같은 사회 문제를 통해 생겨나는 개개인의 상실감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손보지 않고 개개인이 관계망을 재설정 하는 것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은 결국 부대끼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에 있다. 저자가 스피노자의 입을 빌려 '관계망을 재설정하라'는 말은,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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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완전판 스페셜 박스세트 - 전15권 이타카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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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라는 천재적인 지략가들이 있다. 그러나 전장의 영웅이라는 공통점과 별개로 그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라인하르트는 독재의 효율을 상징한다. 전제군주나 독재체제의 장점은 지도자가 지향하는 사회를 좀 더 빠르게 건설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개개인들은 영웅적인 지도자와 자신 그리고 사회를 동일시하고 정체성을 찾는건 이 체제가 가지는 또다른 특성이다. 한편 양 웬리 주변은 소란스럽다. 자칫하면 혼란스럽기만했을 집단을 양 웬리는 서로의 특기와 개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 내었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처럼 말이다. 다양한 개성과 그에대한 존중과 적극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양 함대의 풍경은 민주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양 웬리나 라인하르트로 대표되는 전제정치와 민주주의 체계의 장점은 자유동맹의 욥 트루니히트나 구 은하제국의 문벌귀족들을 통해서 그 체제의 단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타락한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언론과 선동을 통한 우민정책을 통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수완을 발휘한다. 상대 국가에 대한 적의를 고조시킴으로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을 전쟁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은 또다른 체제유지 방법이다. 한편 전제정치의 폐혜는 계급화된 인간이 맹목적으로 상관에게 복종해야하는 것에서 불합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능력이 아닌 계급에 따라 성공여부가 판가름나는 사회는 동력을 잃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만다.

 90년대 초반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여전히 민주주의의 속성에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에서 꽤나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가 그저 생겨났다 사그러드는 그저 무수한 변주곡이 아닌가하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덧. 애니메이션판에서는 말러, 부루크너, 닐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쉴새없이 재생된다. 근데 시벨리우스는 왜 없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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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12-3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니메이션 100화가 지나면서 시벨리우스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제작자도 어지간한 클라식 오타쿠인듯.

일개미 2013-01-0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싶따...

일개미 2013-04-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샀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