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여행자 1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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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독자들보다는 실은 김영하 그 자신에게 필요한 책이었을 것 같다. 그가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연회에서 했던 말에 따르면 그의 안에 살고 있는 어린 예술가가 이게 하고 싶었던 거지-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니까. 자신의 어린 예술가를 위해 낼 필요가 있었던 책이 시장에서의 상품성과 맞아떨어지기까지 하니, 그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그는 이 책을 아무도 안내준다고 할 줄 알았다지만, 요즘 독서 트렌드는 점점 가볍고 비주얼한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는 탄탄한 고정독자층까지 확보하고 있으니, 안내줄 이유가 없지 않는가. 

사실 기획의 측면에서 봐도 굉장히 재미 있는 기획이다. 일곱대의 카메라, 그리고 일곱개의 도시, 거기에서 받은 느낌을 단편소설로 만들어서 낸다는 것. 사진찍기와 여행하기,라면 사실 가장 인기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책에는 일반인들이 내는 여행집만큼의 정성도 들어가 있지 않은 듯했다. 단편소설 하나, 그리고 뒷편의 그가 찍었던 사진들이 다시 그 단편에 나왔던 문구들과 만나고 있다. 사진에 대해 잘 모르기에 사진의 퀄리티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그가 느낀 것과 그의 삶의 괴리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때문에 뭔가 계속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기록이란 자신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느낀 '죽음'이라는 감정은 소설을 염두에 두고 느낀 기획된 감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록도 아니고, 타인의 기록도 아닌, 그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어린 예술가를 달래기 위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예술이 아닌, 철저한 상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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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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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영하의 신작 '여행자'를 읽다 보면 번역가 김화영님의 말을 인용해 놓은 부분이 있다. "한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그 장소는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세월이 흘러 변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이 주는 매력이라는 것이다. 자꾸만 다른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데서 감흥을 느끼게 되는 것, 이는 무릇 여행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흐르게 되면서 새로이 보이게 되는 것들, 내가 변한 만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의 진수는 나는 역시 '책읽기'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많이 접해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아빠가 아는 분을 통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정에 이끌려서?) 구매하셨던, 실은 구성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던 추리 전집에 들어있던 애드거앨런포 작품집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안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역시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검은 고양이'였다. 그 때 내게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사건의 잔혹함 자체가 주는 그 소름 끼치던 막연한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10년도 더 흐른 지금(어머, 정말? 순간 계산하면서 진짜로 충격 받아버린 사건 ㅠ) 다시 읽은 검은 고양이에서, 내게그런 잔혹함은 그리 큰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그간 살면서 공포나 잔혹함에 대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읽고, 보며 겪어 왔던가. 그 정도의 잔혹함-눈알을 파고, 목을 매달고, 도끼로 찍어서 벽에다 묻어 다시 벽을 바르는-은 여전히 잔혹하긴 하지만, 새롭거나 특별할 것은 없는 정도의 잔혹함이었다. 거친 세월을 살아온 건가? 아니면 거친 작품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 건가? 이제 마음만 먹으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영상으로도 구할 수 있는 정도의 공포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순수한(?) 아가씨는 보지 못했던 그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약함으로부터 비롯한 악함,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불러 오는 공포에 주목한다.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자기 중심적 사고, 자기애, 그리고 보호본능, 그것으로 인해 자기 안에서 키워 가는 생각, 편집증적 두려움, 이것이 이 작품에서의 공포의 핵심이다. 심지어 그런 공포의 극한에서도 '자기 과시'를 잊지 않아 주시는 인간은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소름끼치는 존재인가. 분노로 환원된 두려움이 가져왔던 끔찍한 결과의 잔혹함은 오히려 부차적인 이야기이다. 검은 고양이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온 다른 작품들 역시 공포의 핵심은 어떤 불가사의한 존재도, 잔혹한 사건도 아닌 '사람' 그 자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레니체에 나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서 비롯한 공포, 구덩이와 시게추의 극한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포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폴짝 개구리나 아몬티야도 술통에서 표현된 조롱과 멸시가 가져다 주는 분노의 결과 등은 모두 인간 본연의 감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포의 작품은 그대로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해버린 건 그 작품을 읽던 나였고, 사람을 향한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이 작품을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변하고 있는 내가, 다시 10년이 흐른 후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는 또 어떤 감정, 어떤 모습에 주목하게 될까- 어디 한 번, 고운 모습,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괴기스럽고 두려운 사람의 내면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30대 웬디아줌마가 되도록 곱게 곱게만 살아볼까?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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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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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말로만 들으면 어쩐지 습지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의 생태과학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은 책이지만, 실은 습지의 생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눅눅한 자취방에서 사는 지지리 궁상스런 대학생들의 생활을 다룬 만화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비루한 현실 속의 초라한 욕망, 혹은 비굴한 마음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는 데 있다. 늘 웃으며 만나는 사람들, 항상 쿨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지만 실상 그 안에는 쪼잔한 마음, 은근한 시기심, 차마 말할 수 없는 궁상맞은 계산들이 들어있게 마련이지. 화려한 웃음의 이면에는 초라한 현실과 비루한 일상이 숨어있기도 하고 말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그런 것들을 정면으로 이야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 안에 타자처럼 존재하는 녹용은 끊임없이 그들의 그런 마음에 다분히 속물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꽤나 적나라하게 현실성을 더한다. 그 적나라한 표현을 듣고 있노라면 헛, 하고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웃음은 역시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이지. 마치 재호의 미소처럼 말이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측면을 제외하고는 실은 재호의 미소와는 좀 다른 맥락이긴 하다. 실은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재호를 보는 건 어쩐지 슬프다. 하지만 책의 뒷면에 그렇게 똑같이 웃고 있는 실재 재호를 본 순간, 나는 다시 웃어버렸다) 

작가 본인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최군은 상대적으로 좀 더 섬세하게 묘사됐다. 재호나 정군의 경우 역시 작가에게는 타자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겠지만, 그래서 표면적으로 묘사된 부분도 많았지만 최군의 감정은 비교적 명확하다. 초라한 현실을 명분으로 감싸고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을 합리화하는 다분히 자기만족적인 최군의 모습, 초라하지 않아! 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에게 가장 많이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을 추천해준 세찬은 본인이 정군의 궁상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대인'이나 일기장에는 소인배스러운 모습이 가득한 그를 보면서 나도 참 많이 웃었다. 세찬의 일기장을 검사해야겠다는 말에 그녀는 다 불태워버렸다고 했으나, 실은 방구석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는 걸, 그 일기장에 내가 등장하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그녀에게 잘해야지. 헤헷 (그런데 벌써 등장한 사건?)

당신의 궁상은 누구를 닮아있는가? 물론 당신 쿨하고 멋진 사람인 거 안다. 내가 말하는 건 그 쿨한모습 이면의 지지리 궁상스러운 모습 말이다. 당당하게 난 뼛속까지 쿨해요! 라고 말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 난 너랑 안놀아 ㅋㅋ

(아, 정말 짱유치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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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왔구나!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8-06-16 14:32 
    한겨레 21을 볼 때마다 기대하던 마음으로 보곤 하던 만화가 있었다 솔직한 그림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시절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풀어나가던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은 나를 먹먹하게 만들곤 했다 그 책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서 나왔구나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 한겨레 21을 다 챙겨보지 못했기에 못본 것들이 많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반가운 소식이다! 바로 구매버튼 숑숑! (아흐, 책 안사려고 했
 
 
누에 2007-08-1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규석의 이 책은 모르고 있었네요. 프랑스에도 그의 책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볼 수 있어서 관심있게 보고 있었거든요.

웽스북스 2007-08-14 10:02   좋아요 0 | URL
프랑스에도 최규석의 책이 있다고요? 우와~ 신기하네요 ^^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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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그냥 편하게 술술 읽어넘기려는 심산으로 들었는데, 너무 읽는 데 너무 몰입해버렸나보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몰입했을 객관적 이유는 없다. 그냥 젊은 애들이 하룻 밤 걸으면서 일어난 일? 우정? 사랑? 출생의 비밀? 사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이 책은 오히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이건 정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온다리쿠의 매력. 흔들리기에 오히려 빛나던 청춘, 그 때이기에 할 수 있던 고민들, 가질 수 있던 마음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이 안에 있었다. 

실은 흔들림을 거부하고, 그저 얼른 앞으로만 나가며 어른이 되려 하는 도오루의 모습을 보며 너무 나 자신과 동일시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도오루가 그토록 자신을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토록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던 것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본인도 본인을 겉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오루의 내면은 오히려 더욱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마음의 방비'

실은 나 자신을 지키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로운 문제라고. 그저 조금 흔들리고 무너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스스로를 이렇게 지키려 애써왔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고, 실은 저 바닥에 어떤 마음들이 존재함을 알면서 마주치지 않으려 빙빙 돌아가려 애쓰는 내 안의 모습들을 도오루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허둥대지 않으려 늘 애써 여유롭고, 애써 쿨했으나, 실은 누구보다 허둥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부정하던 다카코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실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충분히 돌아보고, 고민하고 긍정할 수 있던 작업이 선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둘이 화해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분에서 나는 내가 마치 그들이 된 양 어찌나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는지 모르겠다.) 의식은 굳이 자각하지 않는 듯 애썼으나, 자신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던 어떤 마음에 대해, 어떤 존재에 대해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실은 그 자신의 내면에 굉장한 변화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일은 보행제가 있던 날 '하루의 기적'이라고 표현되지만, 실은 기적이 아니다. 걷는다는 일이 가져다 준 성실한 결과일 뿐이다. 걷기는 그만큼 매력적인 일이다. 빡빡하게 짜여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오로지 두 발을 움직이는 것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게다가 '마지막'이 부여해 주는 플러스 알파의 정서는 눈 앞에 마주치는 그 어떤 것도 그저 지나칠 수 없게 만들어 주는 묘함이 있지 않은가. 그냥 머릿 속에 드는 생각, 지나치고 있는 마음들, 이런 것들을 다 안고 거리를 마구 쏘다니고 싶어졌다. 그리고 얼마간은, 평소보다 좀 많이 걸었고, 또 당분간은 좀 걷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매우 적절한 날씨와, 적절히 마음을 이끌어내주는 풍경이 콤보로 도와주고 있으니까. (--> 봄에 쓴 리뷰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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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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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꼭 거치는 의식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 시작된다. '쓴다'는 행위는 곧 인정을 뜻한다. 애써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스스로 기록함으로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래서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체인지링에서 그와 그의 친구 이타미 주조 감독의 인생을 뒤흔들었던 끔찍한 기억을 '그것'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으며 작가 김형경은 자전적 소설인 세월에서 선배에게 성폭행 당했던 기억을 쓰기에 앞서 너무 괴로운 마음에 '모두가 예상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돌려 말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해야만 했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얘기하며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와 우정을 언급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적어내려감으로써 자신을 극복하고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정의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서 배리와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치열했다. 마음을 쏟아낼 대상을 끊임 없이 찾던 그 시기에, 친구란 단순한 교감을 넘어선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배리가 중요한 것은 그가 핼과 사랑과 우정을 나눈 대상이기도 하지만, 실은 핼이 집착한 대상이었고, 그 집착을 극복함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끝이 핼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작이었다. 이를테면 자신과 마주함의 시작이랄까?  

나는 핼이 배리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주목하고 싶다. 배리는 그와 다른 존재였다. 아직 무엇 하나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핼에게 에너지틱하고 주도적인 배리는 매우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리의 죽음 이후, 헬이 그의 무덤에서 춤을 추지 못하고,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제정신이 아닌 채 날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시 혼자가 되서 스스로를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배리가 핼에게 자신의 무덤에서 왜 춤을 춰달라고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핼이 춤을 출 수 있게 됐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배리가 죽고 처음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춤을 출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찾아간 배리의 무덤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알고 있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로 조금씩 완성되기 시작한다.(물론 삶이라는 게 끝까지 완성이란 없지만 말이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본인이 차마 들여다 보기조차 두려워하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작업이었다. 처음 사회사업가를 만났을 때의 핼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그는 두려워 하고 있었고,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다. 젠체하기도 하고, 이따금씩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 묘사되던 그는 사회사업가에게 자신과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즈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과 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또 그 기간 동안 본인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솔직하게 글로 써 내려가면서 핼은 지난 시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그 관계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건강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배리의 다른 모습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 내면의 열망을 받아들이게 된다. 핼이라 불리기 원했던 소년. 실은 본인의 이름도 헨리였으면서, 그는 굳이 셰익스피어의 '헨리'를 차용해 본인을 핼이라 불러주길 바란다. 이름이라는 것, 불린다는 것은 단순한 기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그저 듣기에 예쁘고 좋아서 자신의 또다른 이름을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신의 소망을 반영한다. 그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시늉하기'의 일종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부모님이 원하는 길과 달랐고, 매우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고, 실은 자신조차 그게 가장 맞는 일인 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열망을 인정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조심스럽게 조금씩 그 소망을 표현할 뿐 그 소망을 남들과 자신 앞에서 자신있게 인정하지 못한다. 특히나 글을 쓴다는 일이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줬던 배리를 극복한 순간, 그는 스스로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확실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그 무언가'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은 학교에 남아 영문학을 공부하는 일임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성큼 인생의 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 시기 대부분의 아이들이 혼돈을 그저 혼돈으로 끝내고 마는 것에 비한다면, 자신을 긍정하고 어떤 상황적 당위성이 아닌, 마음이 원하는 것을 끌어내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핼은 행운아였을 것이다. 

그 이후 핼이 어떻게 살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계속 공부를 하고, 예쁜 아가씨를 만나 사랑도 해보고, 아마 살면서 몇 번은 더 흔들리며 자라갔을테고, 어쩌면 지금쯤 어디선가 좋은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지. 또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시기에 진심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핼의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고 감히 바라고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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