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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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책을 ‘여자와 도박에 관한 이야기’라 정의하며 다소 도발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도박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카지노에 빗대어 실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이다.  슬롯은 한마디로 이길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세상, 우리의 감정이 어떻든 여전히 돌아가고 있으며, 심지어 세팅한 사람마저도 이길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그 거대한 시스템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전에 한창 로또 광풍이 전국을 강타하던 시절, 헛된 꿈에 매달리는 사람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얘기했다. 그들이 로또에서 수십억원에 당첨될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희박하나마 존재하는 그 확률이 그가 평생 일해서 그 돈을 벌 수 있을 확률보다는 높다고. 

삶의 유일한 희망이 불확실성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슬픈 현실이다. 현실은 현실에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우연에 기댄 환상만이 나의 현실의 유일한 희망이 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카지노. 아무 희망 없는 세상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느니 그보다 좀 더 높아 보이는 확률에 기대어 열정을 보이는 쪽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곧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미 환상에 사로잡혔던 이들은 세상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카지노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모든 것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운이 그들을 비껴갔을 뿐 룰은 공정했다’라고 믿고 만다. 

승자는 늘 불확실성 따위에 기대지 않는 이들이다. 시스템화된 구조 위에 선 자들. 세계에 발을 담그고 아웅다웅 사는 자들이 아니라, 정작 자신의 한 발은 살짝 그 세계에서 빼버린 채 교묘하게 그들의 불확실성을 이용하는 자들이 이 세계의 승자이다. 그들은 승리를 위해 조바심을 내지도 않고,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이미 시작이 달랐으며, 이기도록 디자인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카지노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저자의 접근은 나름 참신했고 나 역시 그 시각에 일부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 구조 내에서 설명하려 하는 작가의 시도는 세상을 지극히 단순한 곳으로 일반화시켜버리고 만다. 분명 세상에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고, 그 불확실성을 교묘히 이용하며 자신의 확실성으로 치환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도 존재한다. (책 속 주인공 같은)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살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이 미지근하게 세상을 관망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제나름의 긍정적인 열정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에 기대는 것이 차라리 이길 확률이 높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견뎌내고 있다. 

따라서 카지노 속 세상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없으며 작가의 그 무기력한 시선(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으나)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따라서 그 곳은 세계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양극화나 무기력함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다만 전체를 아우를 수 없는 범주의 어떤 이야기에 빗대어 크고 넓은 것을 정의하려 했던 작가의 욕심이 지나쳤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으면 쫌 잘하던가. -_- 

허공에 떠 있는 듯 끝까지 정곡을 찌르지는 못했던 내용도 문제지만, 실은 나는 작가의 문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빠르고 흥미진진하지 않음에도 술술 읽히는 문체, 그런데 문제는 꼭 술술 읽히다가 한번쯤 턱 걸린다는 거다. 그건 주로 작가가 무엇에 빗대어 어떤 현상을 설명한 부분인데, 그건 뭐랄까, 너무 노력한 티가 났다고 해야 하나?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 내느라 고민좀 한 흔적이 보여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꼭 마음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은 표현이어서, 그리고 그게 너무 자주여서 '뭐냐, 이표현~' 하면서 한 번씩 탁탁 맥이 끊겼었다.

세계문학상은 이번 작품에 시상함으로 조금 그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지는 모르겠지만 자극적인 소재를 삶과 인생으로 일반화시키는 작품, 조금은 톡톡 튀는 시도를 한 작품에 심사위원들이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교수님이 아이들이 레포트를 내면 사실 너희들 수준은 내 보기에 다 비슷비슷하다며, 좀 더 참신하거나, 좀 더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과제에 결국은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고 하셨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이쯤 되면 사실 내년 세계 문학상 심사대에는 온갖 자극적인 소재들이 다들 인생을 말하겠다고 시도하는 건 아닌지, 살짝 우려가 들기도 한다. 받을 만한 작품이 없다면 주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존심과 공신력은 다른데서 세워지는 게 아니니까. 특히나 금액 따위가 세워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실은 오지랖이 하늘을 찌르듯 넓고 걱정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이 웬디 아가씨는 이 책을 읽으며 또 한가지 걱정을 했다. 세계 문학상에 작품을 낸 수많은, 어쩌면 미래에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수많은 작가 지망생 분들. 절대적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그래, 내 작품이 상을 타기에 부족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분명 누군가는 상대적 기준으로 이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하며, 내 작품이 이 작품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았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으리라. 

작품을 보는 눈과 기준은 누구나 다른 거니까, 부디 구체적 대상을 앞에 두지 말고,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의 절대적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 주세요! 라는 당신의 예비독자의 바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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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매 웃기다 2009-06-0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첫번째 작품이라는데, 노련하다고 말한다면,...웃기지 않나요? 글을 좀 못 읽는 편이시네요. 다소 거칠다고 봐야죠.
장편은 긴호흡으로 가는 건데, 술술 읽혔다면서 재미없다고 말하고, 웬디님은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 지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웬디님도 나름 글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본데,...할 수 있으면 차라리 도전해 보시는 게 좋으실듯.. 셈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 쬐매 안타깝네염.
" 내 작품이 이 작품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았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으리라." 자신의 상황은 아니겠죠?...ㅎㅎ

웽스북스 2009-06-29 13:26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알라딘에 잘 안들어와서, 이 댓글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글을 좀 못읽는 편이시네요- 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습니다. 겸허히 새기겠습니다.

사실 제가 글을 잘 못읽어서 그런지 쪼매웃기다님이 진짜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첫번째 작품이니까 노련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웃기지 않냐. 술술 읽히는 거면 잘쓴 거지, 술술 읽었다면서 왜 재미없다고 말하냐, 이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장편은 긴호흡으로 가는 것이지만 술술 읽히는 것만이 꼭 미덕은 아니지요. 재미있다,가 역시 전부도 아니지만 술술 읽히면서도 그 재미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도 허다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 이야기가 왜 모순이 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작품이라고 해도, 평가는 객관적으로 받아야지요. 아울러 첫번째 작품이라 노련하지 않다,라고 평가한다면 제가 글을 잘 읽는 사람이 되는 건가요? 둘간의 연관성도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참고로 저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소설을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럴 깜냥도 안되고요- 그냥 평범한 독자일 뿐이지요. 다만, 이런 책이 대상을 받았다면 거기에 낸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지요.
 
문학 속의 서울 - 한국문학이 스케치한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2
김재관.장두식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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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역사책보다는 문학책을 통해 배웠다. 역사책에서 만난 역사는 나열된 사실들을 보며 읽고 암기해야 할 시험의 대상이었지만, 문학 책에서 만난 역사는 보고 울며 웃는 공감의 대상이었다. 태백산맥이나 장마, 엄마의 말뚝 같은 책을 보며 한국 전쟁의 아픔을 읽고, 광장, 손님과 같은 책을 통해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생생하게 느꼈다. 조정래의 한강을 거슬러 읽어 오며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친 전반적인 시대 상황을 보고, 난쏘공과 같은 책을 통해 특별히 그 시대에 난장이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아파했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과 같은 책은 내게 개발 독재 정권의 폐해를 그대로 배울 수 있게 한 교과서적인 책이었고, 김원일의 푸른 혼은 나로 하여금 인혁당 사건의 부조리함에 다시 한 번 분노하게 했던 책이었다. 이렇듯, 나에게는 문학이, 특히 소설이 곧 역사 교과서였다. 

문학 속의 서울이라는 책은 그런 의미에서 참 반가운 책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 중 대한민국 역사의 많은 부분의 터가 된 '서울'을 생생하게 그려낸 문학 작품만 추려내 한 곳에 모은 책이기 때문이다. 서울 문화 재단에서 서울 문화 예술 총서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책임에도 서울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이 아닌, 어둡고 슬픈 과거들을 재조명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새삼 시대가 새롭게 느껴졌다. 서울문화재단이라는 기관을 아는 건 아니지만, 괜히 생각하기에 불과 일,이십년 전에 팽배하던  "아아~ 우리의 서울,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라는 식의 노래와 꽤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의 재단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아름다운 핑크빛 환상만을 노래하는 눈가리고 아웅, 시대는 그래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에 이 책에 더욱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시대별로, 또 주제별로 작품들을 나눠 각 작품 속의 인물, 혹은 사건들에 대해 저자가 설명하고, 그것들이 가진 함의들, 그것들이 나타내고자 했던 서울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또 다른 많은 문학 작품을 만나게 하는 게이트의 역할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작품 한 작품을 다루는 깊이가 조금은 아쉽다. 잘 몰랐던 작품은 잘 몰랐던 작품대로, 조금 더 소개됐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 잘 알고 좋아하는 작품은 좋아하는 작품대로 아, 이런 부분도 같이 서술됐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서운함. 오랫만에 반가운 작품들을 만나 옛 기억 새록새록 떠올리며 읽고 있는데 너무 빨리 끝나버려 조금 김이 빠졌다고나 할까? 암튼 그런 아쉬운 마음을 느끼며 이를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작품들이 다뤄진 깊이를 역으로 추론해 냈고, 그 책 역시 많은 부분을 다루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큼 아쉬움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조금 덜 소개하더라도 깊이 있게 텍스트를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작가들이야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지면이 모자라고, 작품 하나 하나가 나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어 뺄 수도 없고, 결국 조금씩 조금씩 줄여가며 다 다룰 수 밖에 없던 마음 왜 모르겠는가. 

지방에 살던 내 친구는 '서울' 하면 '남산 타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단다. 높게 뻗은 남산타워, 그 반짝 반짝 거리는 화려함은 온갖 문화와 예술과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이 곳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는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서울'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남산타워(와 같은 높은 곳-남산타워는 사실 안가봤답니다, 하하)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빼곡함이다. 화려한 불빛으로 반짝반짝 위장된 모습이 아닌,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의 적나라한 모습.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풍경. 사람이 먼저 보이지 않고 집이 먼저 보이는 도시, 그런 도시가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이다. 거주지를 마련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고, 그걸 위해 때론 개인의 평생이 희생되기도 하는 곳, 서울. 이 책 역시 서울의 그런 모습을 굉장히 큰 비중으로 다뤘다. 최수철의 '소리에 대한 몽상'은 처음 알게 된 작품인데 인간의 정이 점차 사라져가는 서울의 아파트 문화를 단적으로 잘 그려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역시 맹목적 내집 마련의 꿈 뒤의 씁쓸한 뒷맛을 느끼기에는 그만이었다. 

발전했다고 말한다. 또 극복했다고 말한다. 분명 발전한 것처럼 보이고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발전했고, 무엇을 극복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내 집 마련은 더욱 어려워졌고,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사람들의 머리 속에 팽배한 물질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돼 이러한 세태를 더욱 견고히 하고 있는 걸. 뭐가 옳고 그른지를 고민하던 사람들은 적어지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합리라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사람들, 부족할 것 별로 없는 환경 속에서도, 그저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술집으로 나가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영자보다 더욱 슬프다. 

2007년의 서울, 정말 발전한 거 맞나요? 정말 극복한 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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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07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에 우선 추천!
정말 할 말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을 것 같군요.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는 외울 필요도 없지만, 쉬 잊혀지지 않기에 정말 좋습니다!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네, 읽어보세요- 읽어본 분들마다 다들 좋아라하신답니다 ^^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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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같은 시대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결혼관과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결혼관이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100년의 세월이 흘렀더라. 그 100년동안 결혼관은 지금 내 관점에서 볼 때 제자리에 있었구나, 물론 그 100년을 살아온 사람이 말한다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고 말할런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리고 100년이 또 지난 지금은 바뀌었나? 뭐가 얼마나 바뀌었나? 

결혼에 대한 모습은 역시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가치관적 측면에서 예전의 그런 모습들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으로 답습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100년 후에는 또 달라질까?
 
아, 그리고 또 한가지! 바람피우는 남자의 그 전형이라니! 예전에 종종 들어가던 모 게시판에서 남편 바람 피우는 문제 전문이라는 모 님의 글을 읽으며 그 촌철살인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분도 아마 책을 내셨다지) 뭐랄까, 그 적나라하면서도 촌철살인이어서 여전히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그 글 속 바람피우는 남성, 그 모습 그대로인 이 책 속 찰스를 보니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사실 한 편의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술술 읽어내려가다가 갑자기 지나쳐버린 문장에 다시 눈이 가게 된다. 아, 잠깐... 이 부분 다시 읽어볼까? 술술 내려가기엔 분명 아쉬운 문장들이 많이 있다. 잠깐 마음에 남긴다. 그리고 다시 읽어 내려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키티의 성장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인형처럼 결혼 시장에 나가고, 동생보다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남편감을 고르고, 아무런 가책 없이 바람을 피우며, 그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이 철없는 여인을 보면서,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상이 오히려 다행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 후 파경을 맞이하게끔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그런 문제들은 더 팽배하지 않았을까? 다만 그 때 그 여성들은 제도적으로 억압받고 있었기에 표출하지 못했을 뿐.

암튼, 그토록 철이 없는 키티는 실은 어쩔 수 없는 계기로 삶의 지경을 넓히게 됐지만,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보게 된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듯 보였지만, 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좀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자신을 내던지며,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고 다른 시각을 접하면서 그녀의 영혼을 되찾기 시작한다.

사실 변화란 천천히 오는 것이긴 하지만, 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순간에 시작되는 변화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변화된 키티의 모습에 조금씩 익숙해져갈 무렵 그녀는 그녀의 의지보다는 본성에 가까운 육체의 정욕을 탐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조금 당황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완벽함을 추구하나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에 대한 서머싯 몸의 성찰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다.

그 외에도, 30년이라는 세월을 아내와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한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온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심리에 대한 묘사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제 자유롭고 싶은 그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여전히 남아 있는 아버지라는 굴레 내에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여전히 의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 한켠에 씁쓸해져 왔다.

이 소설에서 화려하고 달콤하게 잠깐 빛났던 건 키티와 찰스의 사랑이었겠지만, 책을 덮은 후 마음에 남는 것은 월터의 사랑이다.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키티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한 번 정도는 사랑으로 마음이 돌아설 법도 한데, 월터가 죽는 순간까지 키티는 그녀를 연민하고 존경할 지언정 끝내 사랑으로 돌아서지는 않는다) 분노에 떨고, 한없이 그녀를 증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끝없는 자기에 대한 번민에 치닫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그 마음이 어땠을까? 그러면서도 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사실 키티가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남자 치고 그는 꽤나 '홈런' 감인데 말이다.

암튼, 보편적이면서도 전형적이지 않고,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고,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좋은 작품을 만난 기분이다. 영화는 이 책 속 성장과 변화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지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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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의 리뷰 읽으니까 읽고싶어지네요.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네, 심지어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는 미덕? ^^
 
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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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의 호미에서 그녀는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며 70년은 끔찍하게도 긴 세월이라고 말한다. 사실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세월 70년, 그 시간동안 그녀는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짧으나마 일제시대도 겪었고, 전쟁도 겪었으며, 사회의 급격한 변화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빠의 죽음도 겪고, 부모의 죽음도 겪고, 자식의 죽음까지 겪었으니 시간이 참 길고 힘들게 느껴졌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긴 세월을 이 책 호미 안에서 참 조곤조곤하게도 풀어놓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히 우리는 그 시간은 그녀에게 끔찍하게 길었던 시간이 아닌, 참 많은 것들을 선물해 준 시간이었고, 참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참 글을 쓰고 싶어진다. 삶의 작은 일에도 어쩌면 그렇게 많은 것들을 느끼고 고찰해 내는지, 사실 그 고찰들은 언젠가 나도 한번쯤은 생각해봤던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서 , 그러면서도 나는 절대 글로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이어서, 하나도 힘주지 않은 글을, 하나도 멋부리지 않는 글을 읽으면서도 그 내공이 실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괜히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환경 하나 하나에, 뇌가 산문 버전으로 변모한다. 생각을 하는 걸 꼭 글쓰듯 하는 거다. 이런 느낌 알려나 모르겠다. ㅎㅎ 이건 왜이러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 자체를 '나는 그 순간, 이건 왜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책의 첫부분에서는 그녀가 아끼는 텃밭(꽃밭)을 가꾸는 이야기들을 한다. 지난 봄 꽃시장에서 화분을 잔뜩 사와 봄, 꿈, 맘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까지 지어주고는 죄다 죽인 전력만 아니었으면 아마 당장이라도 달려가 꽃을 사와, 나도 꽃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철따라 소소하게 피는 백여 종의 꽃을 키우며, 그것을 삶의 기쁨으로 삼는 모습이 참 예쁘다. 나이 들어 돈이나 자식의 출세가 자랑거리가 아니라 내 텃밭의 꽃이 자랑거리인 삶이라니, (그러고도 본인이 너무 으스대는 것 같다고 자책하는 그 마음이라니!) 나이 들어 내 삶도, 그렇게 소소하고 예쁜 자랑거리로 가득해지길 소원해본다.

그리고 책이 중간으로 가게 되면, 삶의 곳곳에서 그녀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또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한 단상들도 있다. 때로는 늙은이 노망이라며, 젊은이들 정치판에 한소리 하고 (하지만 글의 말미에 그녀의 딸에게 쓴 편지에, 본인이 노망이 들어서까지 명예욕으로 글을 쓴다면 부디 말려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인은 '노망'이라는 말이 진심은 아닌 듯 싶다) 자연을 사랑한다면서도 벌레들과는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자신의 이중성을 자책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자책은 나 자신이 하루가 멀다하고 하는 것이어서 (결심과 삶과의 그 간극이라니) 존경해 마지않는 박완서 선생님도 스스로 이렇게 작은 걸로 자책하면서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헤헷

앗 그리고 중간에 한 챕터를 '음식'에 할애했는데, 세상에나, 마치 이 배고픈 시간에 약을 올리는 것만 같은 그 음식에 대한 묘사라니! 오히려 너무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그 음식을 꼭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먹어본 적도 없는 메밀 칼싹두기는 왠지 그 맛을 알 것만 같다. (물론 그 맛이 그 맛이 아니리라는 것은 안다) 그리고 강된장과 애호박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이 표현을 읽으며 우리 말이 참 예쁘다는 걸 다시 한 번 새삼 느낀다.  고작 혀 끝에 불과한 것이 이렇게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이 부분에 다다르면 어느 순간 배가 꼬르륵 하게 될 것이다. 흐흣! 게장에 대한 표현은 또 어떻고...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혀 전체가 반응하고 입 안의 점막까지도 그 맛을 한번만 보면 생전 잊지 못한다. 하하하, 박적골 게 번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지금은 없겠지만)
 
책이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흘러흘러 이제 그녀의 과거의 삶에 대한 이야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책은 단순한 하나의 산문집이 아닌, 그녀의 문학 세계들의 또 다른 연장선이 된다.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가 되기도 하고, 그 후의 뒷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를 읽으면서 참 꼬장꼬장하셔서 기억에 남았던 그 엄마, 하지만 엄마의 말뚝을 읽으면서,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그 엄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차마 직접적으로 산문에 쓰기가 어려워 우회적으로 표현한 오빠의 죽음, 적어도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내게 낯설지 않고 오히려 반가웠던 건, 그간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의 삶과 많이 마주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부분에서는 그녀와 함께 했던 소중한 인연들에 대해 나와 있다. 김상옥 선생님과의 인연이 참 인상적이다. 특히 그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절절 매는 김상옥 선생님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선생님과의 인연이 끊어지게 됐다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사별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되니 본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절절했을까. 나목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도 그의 사후까지 이어 나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중간에 (아주) 살짝 등장한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괜히 인사 한 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문구 선생님과의 인연도 참 반갑게 느껴졌다. 한 번도 차를 마시거나 직접적으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으나, 늘 마음으로 가깝게 느꼈던 사람. 물론 나의 작가들에게 괜히 친한 척 하고 싶은 마음과는 차원이 다른 관계이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무언지는 왠지 알 것 같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는데, 그녀는 맨 마지막, 딸에게 쓰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본인이 살짝 노망이 들어 괴발개발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그것은 사회적인 노망이니 모질게 제재해 달라고. 하지만, 노년의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부디 오래 오래 사셔서 많은 글들을 남겨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건강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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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씨는 정말 내공이 출중하신 분이라는 생각. 전 작가의 산문집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리뷰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박완서님은 읽기 쉽게 술술 쓰시는 게 좋아서 저도 자주 읽게 된답니다, 워낙 다작을 하셔서 전작 읽기는 포기했지만요 ㅋ

순오기 2007-08-10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완서님의 팬'이어서 책이 나오는 족족 읽었는데~ 좀 질리는 기분이어서 '오래된 농담' 이후 한 권도 안 읽었습니다. 좀 심했나요? ㅎㅎ
경남 하동에 최참판댁 복원하고 가진 제1회 토지문학상 시상식 때 박경리 선생과 같이 오신 완서님과 사진도 한 판 찍었는데... 두 거인이 너무 비교되더라고요!
하지만, 님의 친절한 서평 읽고 다시 '완서님의 팬'으로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라 추천!

웽스북스 2007-08-10 12:49   좋아요 0 | URL
우와~ 무한 영광입니다 ^^ 감사드리고 반갑습니다 순오기님!
 
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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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인정하며 시작하자면 내게 이 책은 참 낯설고 어려웠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머릿속에서 시각화 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그 시각화된 이미지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도, 수없이 쏟아지는 그 기표와 기의들을 하나 하나 파악하며 넘어가는 것도, 그리고 앞에 나왔던 기표의 기의가 뒤에 나왔을 때 그것을 캐치하는 것도 내게는 모두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이해한대로, 내가 이해한 만큼의 리뷰를 써보려 한다. 사실 한 자 한 자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것은 내가 이해한 것이 사실은 책을 주의깊게 읽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수도 있고 뒤에 가니 또 그게 아니었는데, 나 혼자 그 부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걸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책이 내게 어렵게 느껴졌던 건, 내가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낯선 나라 만큼이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더 이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럴 때 내가 좋아하는 건, 내 멋대로 일반화 하기.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 혼자 일반화한 리뷰를 써보련다. 사실 너무나 다분이 내멋대로 쓰는 리뷰라 생각을 풀어놓기가 조금은 두렵다. 

이 책에서 말하는 새로운 인생이란 어떠한 '유토피아'를 뜻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시대에 따라 사람과 그 의미가 다르겠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곳에 존재하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행위는 아마도 일련의 상징적인 행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대, 어떤 지리적 장소에도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늘 존재해 왔다. 터키를 상대로 생각해 보는 건 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 가까운 우리 나라를 대상으로 생각해 보면, 근대 조선 시대에 누군가는 개화된 나라를 갖는 것을 유토피아로 여겼을 것이고, 반면 누군가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유토피아로 여겼을 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독립된 국가를 갖는 것이 우리들의 유토피아였을테고, 그 독립을 억제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또 누군가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또한 독립된 국가를 가진 후에 사상적 대립이 있던 시대에 누군가는 맑스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꿈꿨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민주화라는 유토피아를 통한 끝없는 열망과 그를 억압하는 세력들, 그렇게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은 끊임없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그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의 대립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유토피아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사람, 그를 억압하거나, 혹은 반대되는 것을 향해 달리는 사람, 그리고 그와 상관 없이 사는 사람. 

이 책에도 역시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어떤 종류의 새로운 세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그 세계를 향해 달리는 오스만, 메흐메트, 자난 등으로 대표되는 인물, 그리고 그 세계에 저항하려는 나린 박사로 대표되는 인물, 그리고 그와 상관 없이 살아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혹은 중립적 인물)

새로운 인생에서 말하는 그 유토피아가 거대 음모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는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린 박사는 책 속의 새로운 인생에 대해 저항하며, 또한 그 거대 음모에 저항하는 자이니, 그 둘은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인생의 저자인 르프크 아저씨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도'와 '카우보이' 역시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인생이 말해주는 것은 그 나라에 다가올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었으며,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아마도 그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매료되어 그것을 꿈꾸며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확인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나라의 곳곳을 여행다닌 것은 아니었을까? 

오스만이 다니는 여행은 이 책에서 크게 세 파트로 구분된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리고 나린 박사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떠나는 여행, 그리고 그 모든 열망이 식어버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기 위해 떠나는 또 한 번의 여행. 

그 여행 길에서 그는 터키의 전통 및 터키에 흘러 들어오게 되는 새로운 물결과 모두 조우하게 된다. 특색 있는 터키 전통 상품들이 하나 하나씩 규격화 된, 코카콜라, 럭스비누 등으로 대표되는 상품으로 대체돼 간다. 이러한 규격화된 상품을 파는 '대리점'들은 나린 박사에게 대항하는 인물들로, 책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에 동조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오스만은 새로운 인생의 선배격인 메흐메트를 다시 만난다. 그에게 열망의 시작이었던 메흐메트는 이제 그 열망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 때 그의 열망이었던 것은 이제 그에게 먹고 살기 위한 한 생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훗날, 새로운 인생의 저자인 르프크 아저씨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다. 그는 그 책을 쓴 후, 어떤 신념을 갖고 그것을 지켰던 게 아니라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말라는 검사의 말에 다짐까지 했던 인물이었던 것, 오스만은 자난에 대한 질투심으로 메흐메트를 죽이려 했지만, 종국에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허망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파묵이 말하는 새로운 인생은 주인공이 읽은 책으로만 대표되는 것은 아니다. 터키의 수천가지 민요가 쓰여진 터키의 전통 캐러멜 이름 역시 '새로운 인생'이다. 결국 이는 각자가 꿈꾸던 새로운 인생들이었으며, 주인공은 이 새로운 인생을 모두 만나게 되고, 그 여행의 끝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두 세계를 모두 이해하게 됐을 때, 오스만은, 이제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광장의 이명훈이 남쪽과 북쪽 어느 쪽도 택할 수 없어 중립국 행을 택하고,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다고 쓸 수 밖에 없었던 최인훈의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파묵 역시 전통적인 가치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결국 모든 이상은 다 나름의 이유를 갖게 마련이고, 그 가운데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 라는 가치 판단을 흑백논리로 내린다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인생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나라도 온 몸으로 아프게 겪었던 그 몇 번의 대립들을,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들을,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좀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자 노력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터키 버전으로 그린 책인 것이다. 우리 나라와 상황적으로 다르고, 문화적으로 달라 조금 낯설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나라 해방 이후 문학들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는 책이었던 것.

몽환적인 분위기의 로드 소설로 정통적인 방법으로도 맞서기 어려운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거침 없이 꺼낸 준 파묵의 작가적 재능에 박수를 보낸다.

 * 하지만 너무 내 멋대로 단순화해버린 것 같아, 살짝 걱정은 된다는 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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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gghhhcff 2007-08-0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이렇게 글을 잘 쓰실 수가 ^_^ 북꼼에서 웬디양이란 별명 본적이 있는데
알라딘 서재에도 계셨군요. 홋홋 추천누르고 갑니다.

웽스북스 2007-08-07 18:50   좋아요 0 | URL
그 웬디양이 그 웬디양입니다 하핫! 감사해요 우아한인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