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왔을 때 내가 가장 가보고 싶어한 나라는 그리스였다. 그러나 방문을 주저하고 있었던 이유는, 하이데거가 말년에 한번 정도 가봤던 나라를 나 따위가 함부러, 쉽게 가볼 수 있겠나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작년엔가 그리스를 나의 머리에서 아예 지워버린 일이 일어났다. 그리스를 여행 중이던 한 한국인이 그리스 경찰에 불법이민자로 몰려 두드려 맞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내의 회사 동료가 그리스 여행을 계획하던 우리에게 아시아인이 여행하기에 그리스는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고 충고를 했고, 나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고는 그리스를 기억에서 싹 지웠다. 나로서는 극우정당에게 그토록 표를 몰아주는 그리스 국민들이 경멸스러웠고 그 나라에서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그리스발 뉴스 하나가 또 난리였다. 그리스 극우 정당 총수가 테레비 토론 중에 상대 여성 패널을 마구잡이로 폭행한 것이다. 그게 그 나라 수준이려니...


일제 시대때 한국을 지지하며 한국의 독립을 기원해 주던 외국인들이 있다. 그 중 일부의 말은 이랬다: 한국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루어 왔고, 그렇게 계속 세계에 높은 수준의 문화로 기여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내가 그리스를 존경스럽게 여긴 이유도 그 나라가 세계에 기여한 문화 때문이다. 홍윤기씨(맞나?)가 카잔차키스의 묘를 찾아 소주잔을 놓고 절을 하여 옆에 있던 그리스 가이드의 눈에서 눈물을 뽑게 된 사연도 다 이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 또한 갖고 있다. 그리스가 이룬 문화적 업적은 영원할 것이지만 나는 나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기준에 따라 더 이상 저 나라를 존경스럽게 바라 보지 않는다. 한국이 이룬 문화적 업적은 영원할 것이고 그 성취는 계속 되어야 하겠지만, 현재 한국은 그리 존경스러운 나라가 아니다. 나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존경은 헌신의 토대이고, 헌신에서 문화가 생성된다. 그러므로 나로 말하자면 현 집권 세력의 가장 커다란 죄악은 그들이 한국의 문화적 토대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존경스러운 나라가 되어야 하고, 나는 내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워야 한다. 한국이 자신의 정체성에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으려면 자국민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조건들을 계속 제공해 주어야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5645 2013-12-0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표가 그런데 몰리는건 당연하잖아. 난 당신이 더 경멸스러운데 극좌에다 했으면 더 볼만하겠지?

weekly 2013-12-20 02: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멀쩡한 한국인 여행객을 그리스 경찰이 함부러 잡아다 패는 거나, 그리스 정당의 총수가 테레비 토론하다 말이 안통한다고 여성 토론자를 패는 것이 그리 심각한 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존중합니다.
 

우리는 한국 정치의 적나라한 수준을 매일 매일 확인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한국은 덜 이념적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원칙이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한국은 원칙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안함 관련 군인들의 기자회견을 떠올려보자. 군인들을 환자복을 입혀 국민들 앞에 서게 했는데, 이런 장면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것일 것이다. 군인은 환자이기에 앞서 군인이고, 누구 누구의 자식이기에 앞서 군인이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원칙이고 이런 것이 이념이다. 


또, 생각나는 대로 예를 하나 들어보자. 국정원 직원이 상부에서 명령받은 대로 여론 공작을 하다 민주당 제보로 선관위와 경찰에 걸려 들었다. 이 사람은 누구의 딸이고, 20대의 여성이기 이전에 명령 수행 중인 국정원 직원이다. 이런 상식에 입각한다면 이에 관련하여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적이다. 


또, 예를 들어보자. 지난 대선 박근혜 선거캠프장은 헌법재판소장(대법원장이던가?) 출신이었다. 그리고 총리직을 맡으려고 했다. 아... 헌법 기관의 장에 있었던 사람도 이 정도로까지 생각이 없을 수 있구나 싶어 거의 경악을 했었다. 


NLL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 기관의 원칙(이념)이 절대적으로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방부나 국정원은 절대적으로 국민과 국가의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 설사 회담록에 애매한 표현이 있고 북한이 노무현이 NLL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방부와 국정원은 국가 이익에 맞추어 노무현은 NLL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만약 국방부, 국정원, 새누리당 주장대로 노무현이 NLL을 포기한 것이라면 박근혜 정부가 도대체 무슨 명분과 논리로 NLL 고수를 천명할 수 있을까? 이 뻔한 자가당착도 대단하고, 이런 중대한 사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박근혜의 무능력도 대단하다. 


두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노무현 시절 한국이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에 기뻐하며, 이제 정권을 누가 잡든 이 시스템 자체가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놓았던 것이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과, 그 오판의 댓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수립이 거의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국의 정치적 풍토가 척박했지만, 그럼에도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상황이 거의 암울한 수준이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꿈꿀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뉴몰든이라고, 런던 근처의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가서 돼지고기 볶음을 먹었다. 음식점 이름은, 좀 지나치게 촌스러운 진고개. 내가 뉴몰든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식당이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는 뉴몰든 자체를 싫어했었다. 런던 중심부의 소호를 딱 차지하고 있는 중국인 지구에 비하면 뉴몰든 한인 동네는 정말 퇴락해 보였고, 식당 음식은 조미료 범벅이었고, 식당 분위기들도 절간 같았고, 소액은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거나 사장 아줌마가 거의 바 분위기를 연출하며 대놓고 비즈니스를 하는 곳도 있고 해서 도저히 정이 가지 않았다. 진고개는 푸짐하고 저렴하고 분위기 좋고, 서비스도 좋다. (두번째 갔을 때부터 한국말을 잘 하는 네팔 아저씨가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하드라.) 마치 신촌 돼지 껍데기 집에 와 있는 듯한 편한 느낌. 어제 옆자리엔 대학 초년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 4명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떠들어 댔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직 영국화가 덜 된 학생들 같았고, 그만큼 진고개라는 식당의 분위기가 편하다는 뜻도 되니까. 떠들썩하고,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연기가 막 피어오르고, 종업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옷에 고기 냄새가 가득 베고 이런 역동적인 분위기... 어디에서 또 느낄 수 있을까? 전세계의 요식 산업을 장악해 가고 있는 중국인들의 식당에서, 아니면 이태리 식당에서? 한국, 한국의 고기집 말고 또 있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폴 사이먼의 목소리에서 영성을 느끼곤 한다. 이 얘기를 했더니 한 친구가 BBC의 폴 사이먼 다큐먼터리에서 짐바브웨이 뮤지션들이 폴 사이먼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더라라는 말을 해주었다. 걸어놓은 비디오를 보면 폴 사이먼이, 마치 골방에 혼자 앉아 읖조리듯이 침묵의 소리를 노래한다. 사실은... 공부하는 동안 이 곡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곡을 들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아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런 힘을 가진 다른 음악들을 찾아보았지만 이 곡만한 힘을 가진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 학기(논문 학기 포함) 동안 8 개의 에세이와 한 개의 논문, 모두 합쳐서 대략 3만자를 썼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3만자의 쓰레기를 썼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첫번째 학기의 첫번 에세이는 두어 달을 끌고도 끝을 내지 못한 반면, 마지막 에세이는 단 하루만에 끝을 내버렸다. 물론 데드라인에 걸려서. 마감일 직전 일, 이주는 잠다운 잠을 잔 날이 없었고, 마지막 이틀 정도는 날밤을 꼬박 세워야 했다. (6월19일날 논문을 제출할 때도 그랬다.)


학위 논문은 언어 철학 관련 주제. 원래는 비트겐쉬타인에 대해 썼던 입학 에세이를 발전시켜 논문으로 완성해 보려 했었는데, 두번째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학기에 들었던 언어 철학 강의 때 나는 세미나를 하나 했다. 다른 학생들 하는 것을 참고하려고 맨 마지막 시간에 세미나를 하겠다고 했는데 이러 저러한 이유로 세미나들이 다 취소되어 나만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세미나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그 주제를 학위 논문으로 발전시켜 보려 했는데, 딱 일주일 후 그것이 임시변통적인 이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폐기. 이래 저래 학위 논문 주제로 갈팡질팡했다. 


두번째 학기 에세이 제출날에서 학위 논문 제출날까지 딱 한 달이 주어졌다. (비정상적으로 짧은 기간이다.) 일주일 동안 자료들 읽고 생각 정리, 다음 일주일 동안 하루 2000자 꼴로 1만자 완성에 8000자를 썼다. 딱 하루만 더 쓰면 초고가 나오는데 그때부터 지독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주 가까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일주일, 다시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썼던 것을 죄다 뒤집어 엎으며 제출날 아침까지 여전히 뒤집고 있었다. 슬럼프가 너무 길어서 세 번은 뒤집었어야 할 논문을 두 번을 채 다 뒤집지 못하고 제출해야 했다는 것은 정말 아쉽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나름 대견한 점은, 논문 전체를 통해서 하나의 이론 체계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것. 곧 오류가 드러날 것이겠지만... (내가 철학 논문들을 읽으며 배운 유일한 것은, 결코 오류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 물론,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 현실이 허락한다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잘 하지 못하는지, 무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예를 들어 나는 철학 서술을 하루에 2000 ~ 3000 자 정도 할 수 있다 등등.)


하나의 계절이 끝났고, 이제 다음 계절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다시 긴장 상태로...


(8000자 정도 쓰고나서 이제 하루만 더 쓰면 되겠다 싶었을 때 기념으로 이 사진을 찍어 놓았다. 초고 완성하고 나서 이 논문 저 논문을 읽으며 내 이론을 검토해 봐야지, 이러 저런 대목은 아마 누구를 읽어봐야 겠지...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긴장이 풀어진 걸까... 나는 그 후로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