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런던에 나갔다 왔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헌책방에 들러 책을 몇 권 사고, 이번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친구 아이를 위한 선물로 아크릴 페인트 등을 샀다. 아크릴 페인트가 생각보다 싸서 붓 세트, 팔레트, 캔버스 세 개를 함께 샀는데 딱 40 파운드가 나왔다. 그림 그리기가 아주 비싼 취미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런던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펍 바깥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런던 사람들이 맥주컵을 한 손에 든 채 서서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날도 더워서 나도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네로라는 카페 체인점에 가서 에스프레소 한 잔 먹고 나왔다.

새삼 인상적인 것. 대체로 사람들의 다리가 곧게 쭉쭉 뻗었다. 좌식 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이걸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 여기 사람들은 좌식 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다리가 휘지 않고 죽죽 뻗었어. 
그: 그거 근거없는 얘기라던데.
나: 아냐, 나만해도 다리가 많이 휘었거든. 봐봐. 어랏, 억지로 힘쓴 것도 아닌데 다리가 딱 붙었네! 내가 증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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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가 재미있다길래 찾아서 봤다. 컨셉이 좋고 출연진이 호화찬란하더라. 재미는 있었지만 3회쯤 되니 나올 얘기는 다 나온 것 같았다. 더 볼 생각은 없다.

이 프로그램의 짜증나는 점. 나는 시청자를 바보로 아는 테레비 프로그램을 싫어한다. 꽃보다 할배는 전형적으로 그런 프로그램이다. 캐릭터를 잡는다고, 스토리를 만든다고 특정 장면을 세번이고 네번이고 반복해서 편집해 보여주는 데, 이거 정말 참기 힘들다. 나는 보면서, 다 알아들었으니 제발 그만해!를 외쳐대야 했다. 3회에서는 피디가 출연자 하나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약을 올리던데, 이런 것도 반칙이다(이런 프로그램에서 이런 것까지 지적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양념을 최소로해도 좋은 맛이 나는 음식이 좋은 음식이다. 편집을 최소로 해도 좋은 그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좋은 프로그램이다. 재미와는 별개로 꽃보다 할배는 초호화 캐스팅의, 질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서양에서라면 꽃보다 할배의 컨셉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할 것 같다. 나이는 있지만 사지 멀쩡하고 정신이 올바로 돌아가는 남자 넷이 왜 젊은 남자 하나에 철저하게 의지하며 여행을 해야 하나? 이쪽 사람들은 자아가 크다. 노인, 아이 아빠, 여자, 시아버지 이전에 무엇보다도 '나'는 '나'다. 그러므로 '너'는, 노인이고 아이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너'다. 예를 들어 여기 영국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잠자리 정리하고 세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가 아이 대신 이런 걸 해주지 않는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친척들이 놀러 왔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아이 엄마가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 씻겨주는 걸 보고 나는 문화적 충격을 먹었다.) 이런 물리적 독립성이 정신적 독립성을 수반하리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정신적인 독립성이 어른됨의 조건이다. 한국에서라면 (부모가 되어) 부모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어른이다. 그러나 여기 기준에서는, 예를 들어 지하철 빈자리를 향해 돌진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은, 나이가 있고 아이 부모이긴 해도, 여전히 미성숙한 인격의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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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중간에 마음이 자주 바뀐다. 솔직히 나는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놀러 갔었을 때다. 살라미 파는 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살라미를 12 조각 잘라달라고 했다. 다 잘라주었더니, 아내가 8 조각만 더 잘라주면 안되겠냐고 한다. 순간 그 프랑스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라. 그리고는 음식을 휘휘 던지면서 짜증스러운 태도로 살라미를 잘라주더라. 나는 그 모양을 보면서 웃었다. 또, 빵가게에 가서 바게트를 샀을 때였다. 바게트를 봉지에 담아 건네 주니 아내가 좀 잘라주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빵가게 점원 아가씨의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 소리를 쇳 내더라. 나는 또 웃었다. 


아내는 영국에서도 이런 짓을 곧잘 한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표정이 굳거나 태도가 퉁명스러워지지 않고 한결같이 친절하게, 추가된, 혹은 변경된 사항을 처리해 준다. 


그럼, (지나친 일반화지만) 프랑스 사람은 퉁명스러운데 반해 영국 사람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 사람의 기질을 이해하고 그 기질을 더 좋아한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한 만큼 당신은 나를 덜 배려한 것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하는 데 있어 세계 챔피언일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늦도록 퇴근 못하게 잡아끌거나 회식으로 몰아대는 회사 상사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주 내내 정원 데킹(마루) 견적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가장 싼 가격에 가장 좋은 조건으로 공사 예약을 했다. 데킹 시공자는 우리집 정원의 큰 나무를 잘라 주었던 벤이라는 사람이 물고 온 사람이었다.


원래는 딴 사람과 나무 자르기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벤이 또 나무 자르는 사람이라며 왔다. 나는 아내에게 이미 결정된 사람이 있으니 견적은 아예 받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내는 견적을 받았고 가격이 훨씬 쌌다. 나는 이미 결정된 사람과 일을 진행할 것을 고집했지만, 결국 일은 벤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 벤이 데킹할 사람을 하나 데려온 것이었다. 그 사람과 얘기해 보니, 데킹을 훨씬 튼튼하고 세심하게 해 줄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견적이 좀 비싸도 이 사람과 일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견적이 온 것을 보니, 훨씬 더 싸기까지 했다.


교훈은, 글쎄... 세상 일은 강물이 굽이쳐 흐르듯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는 것. 나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미 된 계약을 깨고 더 싼 사람을 쓰지 못한다. 나는 한 극단의 사람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다 극단의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에 다양한 기질의 사람이 살고, 그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즐겁다.


(아침에 뉴스를 잠깐 보니까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대화록 정국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성명을 발표했다고 생각한다.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지는 미련한 짓을 할 필요는 없다. 그 전투에서마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더욱이 그렇다.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저지른 불법을 원죄처럼 안고 있기 때문에, 사안 사안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도 새누리당의 과민반응을 다 느끼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럴 때일수록 야당은 수권 정당의 책임감, 성실함, 정쟁을 자제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선명성, 투쟁성은 지금 필요한 미덕이 아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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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에 있는 내 친구 얘기를 하려 한다. 내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열심히 달아주는 친구인데, 아주 쿨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냥 도마에 올려도 될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토론에 그리 능한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토론을 싫어(두려워) 하는 징후들을 흔하게 드러낸다. 가장 전형적인 토론 기피 증후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흔하게 엿볼 수 있다: 남자는 군대 가지만, 여자는 임신하잖아? 이건 주장이 아니라, 그냥 토론 중지!를 외치는 말일 뿐이다. 

또 하나 전형적인 토론 기피 증후는 다음과 같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썩었어! 나는 이런 류의 말을 노가다 아저씨로부터 소설가 이인화, 그리고 문제의 나의 친구에 이르기까지 정말 전한국적으로, 허다하게 들었다. 이 말이 토론 중지!를 외치는 긴급한 발언임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95% 이상이 여당 성향일 것이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당신이 완벽한 도덕적 상태를 상정한다면, 그 기준에서는 누구나 썩었다. 그러나 당신이 완벽한 도덕적 상태를 상정한다는 말은, 그 자신 완벽한 도덕적 상태에 준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단계에서 돌연 방향을 바꾸어, 완벽한 도덕적 상태란 없으므로 49% 썩은 놈이나 20% 썩은 놈이나 썩은 놈은 썩은 놈이니, 난 차라리 49% 썩은 놈을 선택하겠다고 결론내린다(이인화의 논리가 이렇다. 도둑들의 자기변명도 이렇다). 이런 논리를 전문 용어로 알리바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의 선택에 토 달지 말라. -물론, 나의 이러한 말은 소크라테스적 순진함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

(순수이성비판 들어가는 말까지 읽었다. 역자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칸트의 깊음에 감동하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타고난 존재다. 우주에 시작이 있었을까, 우주에 끝이 있을까, 나란 누구일까,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이 대답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한켠에 치워놓는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즉 종교인, 과학자, 예술가... 등등 만이 이런 질문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계속 추구해나간다. 우리는 이런 류의 질문들이 확실하게 대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론자다. 그러나 이런 류의 질문들이 우리의 행동의 한 기준, 혹은 동기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자유, 도덕의 기반에 대해 우리는 확고한 대답을 갖지 못할 것이지만, 여전히 그 정체불명의 도덕적 기준들은 우리의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 다음에 시작된다. 여당이 썩었고 야당이 썩었고 정치가 썪었고, 국민이 썩었다는 사실은 내가 내리는 판단들에 아무런 알리바이를 제공하지 못한다. 나는 변명할 수 없고, 나는 핑게댈 수 없다. 나의 선택, 나의 판단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알리바이는 부재한다. 한국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부재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의 자아는 작다. 그나마 그 작은 자아마저 가족의 영토 안에 흡수되어 버린다. 가족이란 한국인에게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자아에서 비롯되는 고민들에 면역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삶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자아의 요구다. 한국인들이 자아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계기들, 예를 들어 토론을 싫어하거나 두려워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작은 자아는 동양이나 한국의 전통이 아니다(강릉 오죽헌에 걸려있는 율곡이 20세때 지은 문장을 보라). 그것은 독립한지 60년 정도 되는 신생 한국의 특성이다. 서양이 이념과잉이라면 한국은 좀 더 이념적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계속 이념, 원칙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거 없음, 정치에서 관심끊어를 계속 외친다.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결국 이 싸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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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랄 것도 없지만 재미(!) 삼아...


1. 노무현이 이관하지 않았을 가능성. 정황상 이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만일 이관하지 않고 폐기했다면, 나의 법 상식으로 봤을 때, 이게 범죄를 구성하거나 국기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생산한 문서를 이관하도록 강제하는 법이 있지 않는 한 애초부터 지정기록물로 등록을 안한 거니까 이관안하고 폐기했다고 문제가 될 리는 없을 것 같다.


2. 이관했는데 기록원 시스템에 대화록이 없을 가능성. 이것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기술적 장애가 발생한 경우 말고는. 지정기록물은 색인을 만들지 않았고, 문서간 링크도 달지 않았다니까 색인을 통해서도, 목록 참조를 통해서도 대화록을 찾는 건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태라면 수백만 문헌을 일일이 수작업해서 찾는 방법 밖에 없지 않을까? 


3. 이지원에 없는 경우. 이것도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지원 구동해서 찾으면 쉽게 찾아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도 정말 없다면? 이지원에는 삭제 기능이 없다니까, 시스템 구축 기관에서 시스템을 재컴파일하여 삭제 기능을 갖추도록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스케일이 큰 음모론일 것 같다. 그렇게 해서까지 대화록을 지워야 했을 필요가 있을까? 한가지 미심쩍은 건 국정원본 대화록이 2008년 거고, 2007년 거는 폐기한 것으로 밝혀 졌다는 것. 국정원 2008년 생산본을 정본으로 밀기 위해서는 국정원 2007년본과 기록원 원본을 폐기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지원 시스템 자체를 건드리면 너무 너무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들통이 안날 수 없다. 나는 이 가능성도 없다고 본다. 


결론. 대화록 원본은 기록원 시스템 안에도 있고(하지만 찾기 어렵다), 이지원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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