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에 있는 내 친구 얘기를 하려 한다. 내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열심히 달아주는 친구인데, 아주 쿨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냥 도마에 올려도 될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토론에 그리 능한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토론을 싫어(두려워) 하는 징후들을 흔하게 드러낸다. 가장 전형적인 토론 기피 증후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흔하게 엿볼 수 있다: 남자는 군대 가지만, 여자는 임신하잖아? 이건 주장이 아니라, 그냥 토론 중지!를 외치는 말일 뿐이다. 

또 하나 전형적인 토론 기피 증후는 다음과 같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썩었어! 나는 이런 류의 말을 노가다 아저씨로부터 소설가 이인화, 그리고 문제의 나의 친구에 이르기까지 정말 전한국적으로, 허다하게 들었다. 이 말이 토론 중지!를 외치는 긴급한 발언임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95% 이상이 여당 성향일 것이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당신이 완벽한 도덕적 상태를 상정한다면, 그 기준에서는 누구나 썩었다. 그러나 당신이 완벽한 도덕적 상태를 상정한다는 말은, 그 자신 완벽한 도덕적 상태에 준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단계에서 돌연 방향을 바꾸어, 완벽한 도덕적 상태란 없으므로 49% 썩은 놈이나 20% 썩은 놈이나 썩은 놈은 썩은 놈이니, 난 차라리 49% 썩은 놈을 선택하겠다고 결론내린다(이인화의 논리가 이렇다. 도둑들의 자기변명도 이렇다). 이런 논리를 전문 용어로 알리바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의 선택에 토 달지 말라. -물론, 나의 이러한 말은 소크라테스적 순진함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

(순수이성비판 들어가는 말까지 읽었다. 역자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칸트의 깊음에 감동하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타고난 존재다. 우주에 시작이 있었을까, 우주에 끝이 있을까, 나란 누구일까,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이 대답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한켠에 치워놓는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즉 종교인, 과학자, 예술가... 등등 만이 이런 질문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계속 추구해나간다. 우리는 이런 류의 질문들이 확실하게 대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론자다. 그러나 이런 류의 질문들이 우리의 행동의 한 기준, 혹은 동기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자유, 도덕의 기반에 대해 우리는 확고한 대답을 갖지 못할 것이지만, 여전히 그 정체불명의 도덕적 기준들은 우리의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 다음에 시작된다. 여당이 썩었고 야당이 썩었고 정치가 썪었고, 국민이 썩었다는 사실은 내가 내리는 판단들에 아무런 알리바이를 제공하지 못한다. 나는 변명할 수 없고, 나는 핑게댈 수 없다. 나의 선택, 나의 판단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알리바이는 부재한다. 한국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부재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의 자아는 작다. 그나마 그 작은 자아마저 가족의 영토 안에 흡수되어 버린다. 가족이란 한국인에게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자아에서 비롯되는 고민들에 면역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삶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자아의 요구다. 한국인들이 자아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계기들, 예를 들어 토론을 싫어하거나 두려워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작은 자아는 동양이나 한국의 전통이 아니다(강릉 오죽헌에 걸려있는 율곡이 20세때 지은 문장을 보라). 그것은 독립한지 60년 정도 되는 신생 한국의 특성이다. 서양이 이념과잉이라면 한국은 좀 더 이념적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계속 이념, 원칙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거 없음, 정치에서 관심끊어를 계속 외친다.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결국 이 싸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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