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대성과 육체의 정치학 ㅣ 동문선 문예신서 231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홍성민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영혼의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고 사악한 감각들로 정신을 혼란시키는 빈 껍데기, 이것이 중세 서구까지 지속되어 온 육체 혹은 몸에 대한 인식이었다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속에서 몸은 해부 가능하며 구조가 이해될 수 있는 일종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서구적 근대화 속에서 육체는 개인주의를 담보하는 물증이 되었다. 개인주의는 나와 남을 구분하고 자신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근대화 속에서 여타 감각을 제외하고 시각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근대적 도시환경이 배태한 복잡한 공간적 배치와 위협적인 타자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몸 그 자체를 하나의 자산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죽음과 질병의 위협을 극복하고, 타자와의 구별 감각을 적극적으로 발산하면서 각종 육체 산업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근대적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르 브르통의 이 책은 철학과 사회학, 의학 등 한 사람으로서는 아우르기 힘든 영역을 포괄하면서 육체에 대한 서구적 관념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피고 있다. 번역서 제목에는 ‘정치학’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지만 원저에는 ‘인류학’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 내용 역시 인류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작가인 탓에 주로 프랑스 쪽 문헌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적 현학취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읽기 편하다.
그리고 기존의 육체 담론들이 그야말로 담론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맥락에서의 이론적 검토에 치중했던 데 비해, 이 책은 구체적인 현상을 미시적인 분류 속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육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을 검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듯하다. 원 저자의 각주를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저자는 그동안 육체나 몸과 관련해 축적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의가 비단 이 책을 통해서 개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이 포괄하고 있는 논의가 상당히 오랜 기간의 숙고와 정련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므로 신뢰할 수 있는 수준임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다만 근대적 육체 관념의 형성기는 철학적 수준에서, 그리고 근대적 전개 과정의 양상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수준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의학적 수준에서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적 맥락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쉬운 부분 중 하나인 육체 관련 저서 중 이만큼 구체적인 검토를 시도한 책이 드물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를 찾고 싶다.
최근 대중문화 연구, 도시 연구의 일환으로 육체 담론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만, 대부분 파편적인 데 머물고 있다. 육체는 소비되고 적극적으로 관리되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것은 육체와 관련된 근대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육체는 금기의 영역이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육체는 무수한 금기들이 온존하고 있는 공간이다. 가장 개인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가장 공적인 영역이 육체이다.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통제되어 온 육체가 기독교적 가치관 속에서, 그리고 근대적 가치관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통제하에 놓여지는지, 그리고 금기의 양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우리는 여전히 잘 모른다. 그리고 감각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거나 무관심하다. 우리에게 서구적 육체 담론은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등장했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무의식의 언저리에서 우리의 육체 담론은 허약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브르통의 이 책은 우리 역시 몸과 관련된 우리 나름의 인류학, 민족지학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