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가네코 미스즈 전집
가네코 미스즈 지음, 서승주 옮김 / 소화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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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생시

꿈이 생시이고 생시가 꿈이라면,
좋을 거야.
꿈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
좋을 거야.

낮 다음은, 밤인 것도,
내가 공주님이 아니란 것도,

달님은 손으로는 딸 수 없다는 것도,
백합 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시곗바늘은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도,
죽은 사람들은 없다는 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
좋을 거야.
가끔씩 생시를 꿈으로 꾼다면,
좋을 거야.

  

  항상 어떤 말을 감명깊게 들었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확 식어버리는 그런 유형이 있다. 그게 내가 아니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친구관계는 유지하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 않으려 한다니 굉장히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어떤 말은 그런 법이다.

 

 나에게는 그 말이 "걷는 사람은 달리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달리는 사람은 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노력하는 사람은 천재를 이길 수 없다. 천재 중에서도 노력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어쩌자는 말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라는 시가 나의 그 찜찜한 기분을 명확히 문장화해주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내가 새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말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은 방울의 음을 낼 수는 없지만 노래를 알고 부를 수 있다. 나는 나고 새는 새고 방울은 방울이며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좋다는 긍정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이 시집이 전반적으로 슬픈 시가 가득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시 말고도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시를 굳이 꼽자면 얻어맞는 흙과 밟히는 흙이 각기 농사를 짓거나 자동차를 지나가게 하기 쉽다는 내용의 '흙'이란 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또한 밟히거나 차이지 않은 흙도 생명이 살기에 소중함을 강조함으로써 반전을 꾀하고 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남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쓸쓸함을 위로해주려는 마음씨 좋은 시들이 자연을 배경으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장르가 동시라서 짧고 쉬운 한자가 많으니 한번 가벼운 마음으로 쭉 읽어 내리기 딱이다. 하지만 무거운 주제로 인해 생각이 많아지면 한번쯤 깊이 숙고해보길 바란다. 예를 들어 위에 눈도 아래 눈도 가운데 눈도 모두 쓸쓸하다는 '쌓인 눈'이란 시에선 순식간에 온 우주를 무대로 하기 때문이다. '꿈과 생시'라는 시는 아직도 왜 죽은 사람들이 없다는 게 정해지지 않아서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살면서 천천히 곱씹어보게 될 시들인 듯하여 시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읽었다. 시에서 나온 것처럼 놀던 사이에 어느새 친해진, 모르는 언니가 내 두뇌에 나막신 끈을 단단히 동여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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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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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이 이미 그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저쪽의 광막하고 어두운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꽂혀서 읽었는데 이 책에서도 인간이 30세가 되면 인생에 석양이 진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데 슬픔이 느껴진다. 아무리 사람의 수명이 연장되고 삶의 시작은 50대부터라고 힘을 주어 강조하지만 확실히 30살 이후부터는 젊음을 유지하려면 교육과 과학의 힘을 받아야 하는 게 맞는 듯하다.

 

 초반에 등장했던 마피아의 보스같은 노인이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스포츠나 젊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나 하게.' 라고 말할 때 얼마나 경륜있고 슬퍼보였는지. 그가 자랑할 건 이제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어금니를 단추로 한 정장이나 과거에 동료가 총맞아 죽은 걸 목격했던 이야기밖에 없는 것이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뒀으며(데이지가 철이 없어서 아이는 완전히 뒷전이긴 했지만 굳이 아이를 옷까지 갈아입혀서 개츠비 앞에 데리고 온 건 역시 본능적인 거절의 의사였긴 했지.), 이전부터 서서히 톰의 종노릇에 길들여져 있긴 했지만 모종의 사고 이후엔 완전히 속물이 되어 버렸다.

 옛날에 이 책을 집었을 때 개츠비와 데이지의 로맨스에 압도되었다면 이번에 압도된 것은 거물도 벼락부자도 아닌 신종인류 개츠비가 기존 보수들에게 당하는 온갖 모욕이었다. 주인공이 안타까워하는 점이 언뜻 이해가 되었다. 그는 개츠비가 톰과 데이지에게 그런 무시와 모욕을 받더라도, 다시 그에게 어울리는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여성을 찾고 계속 그의 상상력을 펼쳐나가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츠비는 자살을 택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언뜻 그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정신 이상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법칙은 없지만, 내가 그 정신 이상자를 고쳐보겠다는 오만을 지닌 채 결혼하면 그 생활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는 이 책을 읽는 (가족 아닌) 다음 세대의 누군가가 책에 숨어 있는 혁명의 메시지를 깨달아 주길 바랬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인류 종족을 번식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띈 사랑이 너무나 강력하다. 욕망의 단계를 뛰어넘는다는 게 참 어렵지.

 솔직히 개츠비의 집도 아깝다. 진짜 책이 그렇게 많이 꽂혀있고, 일반인을 위한 잡학 지식 책들 위주라지만 아무튼 알짜배기들만 있는데다가 깔끔한 잔디가 있는 넓은 정원. 이건 뭘 의미하겠는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정원에 나와서 토론하는 거다. 그것도 술을 마시고 재즈의 역사에 대한 음악을 들으면서 즐겁게. 미국에선 왜 그렇게 못했을까?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황무지에서 사느라 그렇게 빠듯했었나? 그렇게 보면 게르만 족들도 얼마나 힘들었을텐데? 사람을 제압하는 듯한 그런 유쾌함을 지녔으면서 왜 그 유쾌함으로 유럽의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지식에 칼을 댈 생각을 못한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강력한가?

 위대한 개츠비 보면서 그나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걸 이야기하는 개츠비 친구에 대한 내 생각이다. 아무리 그 사건 일어나고 나서 개츠비 자살하기 전까지 개츠비를 존경하게 되었다곤 하지만 장례식 겁나 성대하게 해줘 ㅋㅋㅋ 죽을 때에나 잘해주지 말고 살 때 잘해줘 친구들아 ㅎㅎㅎ 죽을 때도 잘해주는 친구들이 있을까 의문이기도 하다만 ㅠㅠ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세상을 오래 살려면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너무 천천히 걷다가도 결국 나이를 먹으면 어차피 쓸데없는 오만과 자신감이 생겨서 막 나가기는 하다. 하지만 여러 인물상들을 보건대, 자신이 전적으로 옳고 나머지는 다 '개인사'라고 보면 수명이 짧아지는 듯하다. 앞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제 갈길 가는 중인데 거기서 전력으로 달리면 크게 부딪쳐서 죽거나 죽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난 조심하지 않을 거지만 ㅎㅎ 요리조리 싹싹 비켜나면 빨리 달려도 사고는 안 나더라..

 난 새움의 말에서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형씨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쓸까? 그것도 암흑세계에서 그렇게 얌전한 말을? 차라리 'old' sport에서 과거를 추구하는 개츠비의 성격을 유추하여 '이보게'같은 고리타분한 단어를 쓰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어떤 번역들은 상당히 읽기가 불편했다. 민음사의 번역은 어차피 수정될 때가 되었었다. 그 증거로 지금은 창비에게도 문학동네에게도 밀리는 출판사가 되지 않았던가. 이정서가 번역한 문장이 더 아름답다는 건 아니지만 젊은 세대들이 읽기에 훨씬 편하고, 기존 출판사 편을 드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미 죽고 없지만 그가 독자를 광범위하게 설정해놨고 따라서 읽기 쉬운 문장을 선호할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츠비는 정말로 위대하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걸 의도했다. 그것까지 부정한다면 우리나라 출판사가 상업자본주의의 흐름으로 간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개츠비가 위대하지 않아 보이면 그냥 책도 읽질 마라. 감상은 자유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왜곡하는 건 앞으로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해로운 짓이다.

 

 http://vasura135.blog.me/220998169943->민음사판 하나에서 발췌했지만 위대한 개츠비엔 저자의 성장배경에 대한 설명이 특히 많다는 느낌을 주었다. 인상적이었던 설명들만 뽑아서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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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494
서효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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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찾아서 중에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다. 단연 개라고 대답하겠다. 담배를 문다. 비가 오고 있고, 실내에는 끽연할 공간이 없다. 비와 눈 중에 무엇을 좋아하냐 묻는다. 날씨는 원래 거지 같은 거다. 그들의 눈빛을 예측할 수 없다. 연기가 빗속으로 암고양이처럼 숨어 들어간다. 오늘은 맘에 드는 시간이 없다. 인간은 모두 같은 얼굴이고,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해하고, 너와 나는 썩고 있다.

  

문재인이 좋아 심상정이 좋아 묻는다. 

 

 언젠가 우리나라는 무덤이 너무 많다는 말을 한동안 투덜거리며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은 화장을 하겠다고 하셨고 나는 화장해서 보관함에 넣는 짓도 덧없다는 생각을 최근 하는 중이다. 내장은 모두 기증한다 치고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가 반드시 남을 텐데 이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어차피 구성성분은 옆나라에서 번진 방사능과 경주에서 풍길 방사능폐기물과 화학덩어리 밖에 더 있겠는가. 그걸 어린 나무들에게 영양분이랍시고 준다니 이런 맙소사 세상에 끔찍해라. 하지만 제주도를 여행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들이 나열되어 있는 산을 목격한 순간부터, 영화 자백에서 푯말 하나 없는 북한 주민의 무덤을 본 순간부터,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우리들이 살아남아서 보고 있는 그 무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미국 여성 과학자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 밑에 수억 개의 생명이 있다고 즐겁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밟고 있는 대한민국 땅 속엔 개죽음당한 사람들의 피가 과연 몇 리터 정도 흐르고 있을까. 그 피를 짓뭉개버리는 콘트리트 위에서 살아있는 나는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가.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오타쿠, 대한민국에서 가장 소외된 지방 강원도 등.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이나 쓰여 있으니 찾아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는 군대 이야기 등 야사를 중심으로 지방과 몇몇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를 분석하는데, 너무 치열해서 시가 다소 지저분한 점을 제외하고는 아주 시니컬한 시들이 쓰여져 있다. 특히 이 시집의 뒷표지를 보면 정말이지 이건 사서 소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점직원에게 계산해달라고 공손히 내미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니 꼭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라.

 

남자를 찾아서 중에서

그때 나는 짝사랑하던 너와 충장로를 나란히 걸었다. 우리의 교복은 잘 어울렸지만 너는 성당 형을 사귀고 있다고 했다. 나도 그쯤은 알고 있었으나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 형은 이제 막 군대에 갔어. 너는 편지지를 고르지만 꼭 쓰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묻히지 말아야 해. 거기는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고, 죽을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만 같고, 방금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와 진짜 죽인다, 그래 죽이지 않니.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나란히 걷고 있으니까. (...) 너 그거 아냐? 군대에 가기 전에는 꼭 여길 온다더라. 혀로 별짓을 다 한다더라. 너 그거 모르냐? 여자들의 혀는 갈라지지도 않았다더라. 그 형의 혀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너는 아냐? 네 혀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좋은 냄새가 났다던데, 그 형이 그리 말하던데, 이야기가 끝이 없던데, 너는 그 끝을 아냐? 모르냐?

 

 

동성애자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던데 아냐? 모르냐?

 

정체성을 찾아서 중에서

팀장의 아들은 살이 쪘고 만화영화를 좋아한다. 팀장은 파티션을 높이 세우고 겸손한 자세로 일했다. 높은 사람을 만나면 90도로 허리를 숙인다. 팀장의 아들은 몸이 굽혀지지 않는다. 살이 쪄서 그렇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들은 자주 했다. 일본에서 만든 만화영화 캐릭터를 좋아했다.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들은 만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팀원에게 한다. 책상을 정리하는 팀원의 뒷모습을 보면 아들이 보던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구다. 긴 칼을 든 로봇이 적의 허리를 베어낸다. 시커먼 공간으로 하반신이 떠내려간다.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탄 팀원은 작은 점이 되어 낙하한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아들이다. 아들은 분홍색을 좋아했고, 로봇을 조종하며 눈과 가슴이 큰 피규어를 모았다. 살이 쪄서 그랬다. 운동을 해야 한다. 팀장은 골프 회동을 위해 먼저 일어난다. 아들은 피규어와 대화한다.

 

솔직히 진해에서 막 사진 찍는 사람들 정말 이해 안 가고 그랬다. 나는 볼수록 끔찍했는데.

 

 여기가 바람의 검심에서 나오는 일본 다리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가고. 우리나라는 그러니까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다. 독립국을 자청할 거였다면 다리를 다 뜯어버렸어야 했다. 비실비실한 일본 벚나무 말고 국산 벚나무를 보세요. 초등학생 때 열심히 읽었던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주인공 히무라 켄신은 나중에 영화판에서 나이가 들어서 쇠약해지고 결국 최후에 사랑했던 여인에게 안락사당한다. 그가 쇠약해진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쟁이 임진왜란이었다는 썰이 있었다. 처음엔 많이 분노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카오루에 의해 켄신이 보수화되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에겐 먹여살려야 할 아들이 있었다.

 

강릉 중에서

강릉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이었지. 게으름을 사랑하자고 오징어들이 말한다. 겨울이었고, 따뜻한 방을 잡아 정자세로 누워 따뜻하지 않은 곳을 향해 입김을 밀어내었다. 서로의 입에서 뛰쳐나온 오징어가 몸을 섞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끝이 없는 파도가 유리 바깥에서 몹시 울었다. 통유리의 안쪽, 붙잡힌 생선처럼 달라붙은 찬 서리들, 그것은 눈물도 별도 아냐. 그건 온도 자체다. (...) 기와에 써내려간 적절한 소망들처럼 우리는 영원히 이루어져 갈 것이다. 강릉에서 빌었던 소원은 사실 실패다.

 

니가 운명적으로 한국에 태어났는지 우연히 한국에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국에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 나십니까? 이민갈 생각이 나십니까?

 

 가난하게 쪽팔리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키우신 부모님은 어떻습니까? 그분들이라고 겪고 싶어서 겪었을까요? 의식을 가지고 그걸 견뎌낸 일부 극소수의 조상들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헬조선이라고 욕할 자격이 명시되어 있는 티켓이라도 쥐고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 살 자신이라도 있습니까?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자기성숙은 우주가 저절로 이뤄줄 거라 믿는 인간들.
동성애자 혐오가 권리인 줄 아는 인간들.
우리나라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공부라 믿는 인간들.
호랑이는 무조건 그고 간호사는 무조건 그녀라 믿는 인간들.
인간이 아닌 걸 인간적이라 하고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하는 인간들.
앞에서 대놓고 사람들이나 욕하면 자신이 솔직한 성격인 줄 아는 인간들.

 

 생각해보니 이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들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이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일말의 고려도 없이 주류를 택한 뒤 도망가는 소수자들의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츄라이 김치! 츄라이!라고 권하는 인간들.
 동방예의지국이라고요? 우리나라가? 정신 좀 차립시다. 이게 한국의 참모습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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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Zone
차동엽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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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돼라. 바보는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한 도전. 스마트한 이들에겐 뇌가 있지만, 바보들에겐 베짱이 있지. 스마트에게는 계획이 있지만, 바보에게는 이야기가 있지. 스마트한 이들은 비판을 하지만 바보는 행동하지. 당신은 바보를 앞설 수 없다. 바보는 머리보다 심장의 명령을 따른다. 지금의 실패를 즐겨보라....... 스마트한 이들은 어쩌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지만, 결국 그 아이디어는 바보스럽지. 바보가 돼라.'

 

  

무지개원리라는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왠지 굉장히 기업에 친화된 책 같다는 묘한 인상을 받고 그 책 읽는 걸 피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긍정하고 격려하는 책이라 더욱 일반대중들과 소통이 된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신부님이 말하는 바보가 자신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긍정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긍정심리학에 상당히 가깝게 사는 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광고글에서 시까지 다양한 글들을 인용하고 있어서 무언가 알아간다는 재미도 준다. 신학과는 거리가 좀 멀지만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빠짐없이 들어있고 신부로 살아가는 저자의 인생도 쓰여져 있으니 종교에 거부감이 있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편하다. 공부가 질리거나 일하다 지칠 때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가볍게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어머니에게 읽어드리려고 산 책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이 힐링되는 느낌을 주었다. 거부감이 들 정도로 자기계발적이고 대중적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근데 아무래도 신부님이 종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게 아닌가 싶다.

 일본에는 센몬빠가란 말이 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열정을 지닌 일에 몰입하느라 사회의 변화나 주변의 이야기에 둔감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건 최근 바보스러움이 아니라 봤어도 일부러 걸러내는 지혜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일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화장실에 들어가면서도 책을 가져가고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흘끔흘끔 보고 무엇보다 걸으면서도 책을 읽고 시를 소리내어 외는 사람들이 없으며 되려 놀림을 당하는 이 현상은 대체 무엇인가 의아스러워지는 것이다. 남의 일에 간섭할 시간에 이런 책을 보며 자기 마음 공부나 할 것이다. 아는 게 없으면 큰소리도 치고 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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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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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미안하지만 난 처음에는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하와처럼 아담의 갈비뼈에서 태어나거나, 프랑켄슈타인처럼 남성의 실험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피조물이 실험실에서 감금되어 살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가 내 생각에 몇 개의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았다.

 

 첫째, 이 책은 비소설이다. 하지만 저자가 워낙에 위트가 넘치고 관심이 있는 일은 몸이 작살나서도 하려고 하는 열성적인 미국인의 전형적 기질을 가진지라 코믹한 소설같은 느낌을 주기는 한다. 둘째, 파워퍼프걸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녀들이 과학자 복장을 하고 식물을 관찰하겠다고 이리저리 통통 뛰어다니는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캐릭터를 잘 그려서 스티커로 만들어 굿즈로 내놓으면 성공할 거 같았다. 눈길을 달리다 차가 뒤집어지는 장면까지도 그럭저럭 귀엽게 그려놓으면 잘 될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다면 후반부에 유방에 난 종양을 빼기 위해 칼을 쓸지 드릴을 쓸지 조수와 토론하는 장면은 빼도 좋을 것 같았다. 너무 아이마이미같잖아?

 

 

 

 아무튼 어떤 사람이 알마출판사의 다른 책을 보고 왜 이런 책을 알마출판사에서 출판했는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칭찬을 하던데 그게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일단 빌어먹을 필기체를 예쁘게 하려는 건 알겠지만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너무 읽기 힘들다. (그래서 번역의 틀린 부분이 너무 잘 보여 이중으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표지가 너무나 얌전하다. 밑에 프로작이라도 살짝 그려놓아야 되는 거 아닌가...

 

 

 

초반부에는 지루했지만 중후반부에 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닌가 싶지만 과하게 빌과 주인공이 썸타는 듯한 이야기로 진행되면서 재미가 점점 급증한다. 이들의 캐미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직접 책을 보면서 확인하시길. 지지하는 커플이 감정을 교류하는 순간은 볼 때마다 행복하다. 로맨스소설의 묘미.

 어느 분야에 있건,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가 그 중요도에 비해 사회적으로 지지와 후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타 분야에 대해선 역으로 현황을 이해하기도 하는 듯....;; 일단 저자가 식물학자인걸 감안할 땐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도 자연과 생태라는 훌륭한 생태잡지가 있었는데 부도나서 망했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페이스북에다가 책의 인상깊은 구절을 쓰는데 이번엔 일부러 그녀가 겪는 성추행에 대해서만 썼다. 친구 중 남자분들이 대다수라서 여성 과학자의 스펙타클한 행로에 충격과 공포를 받은 듯하다. 빌이 긴 머리 때문에 자주 곤란한 상황(...)을 당할 뻔했다는 에피소드에 남자들이 주로 반응을 보였다. 가수 김경호씨도 그 특유의 긴생머리 때문에 지하철 성추행을 간혹 당했다나? 여성으로 사회생활 하는 게 이런 거라니 상상도 못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도 일단 웹에다 이런 이야기 지껄이고 나서 어디 가서 실물을 보이면(여자랍니다?) 다들 깜짝 놀랍니다. 그 다음엔 작업들어가는 인물들이 한 90%죠.

 이 책에선 결국 여성 과학자가 결혼을 한다. 그게 좀 아쉽지만 아무튼 아이가 없거나 결혼 안 한 여성을 결여된 존재로 여기는 건 부당하다고 이 책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출산과 결혼은 여성의 행복이다.'라는 말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보면서도 자면서도 듣는 말이다. 심지어 돈이 없어도 애만 낳으면 상관없지 않냐는 말도 듣는데 제발 여성 인생의 코스에서 그런 말들 좀 빠졌으면 한다. 결혼해도 일하느라 살 뺄 시간 없어서 추하다고 욕할 거면서.

 

  

나무도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이 쓰다가 넘친 물을 자식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게다가 유년기의 혹독한 날씨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를 꺾는 등의 상처를 주면 호르몬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사람도 감정을 느끼지만 아무래도 그건 주님이 주신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작용보다는 호르몬의 작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배려던 지식이던 사랑이던 어쨌던 무언가가 있고 기억까지 할 수 있다면, 나무는 인간을 사랑할 수도 있고 증오할 수도 있고 왜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내가 사랑했다고 기억했던 게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게 우정이 아닐 수도 있다.
 먼 훗날 인간이 나무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나무가 인간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쨌던 인간이 문명을 택한다면 자연을 잃고 나무가 자연보존을 택한다면 인간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둘 중 하나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 때 (나는 그게 인간이 아니라 나무일거라 보는데) 마지막에 남는 건 희망 말고도 더 있다. 기억이다.

 

1951년 대학은 남성들, 주로 돈이 있는 남성들, 적어도 어느 가정의 베이비시터가 아닌 다른 돈벌이가 있는 남성들을 위한 곳이었다. (...) 학교 기술 시간에 오빠들은 벽에 걸거나 천장에 매달 정도로 커다랗고 강력한 도구들을 사용했다. 칼 세이건이나 미스터 스팍, 닥터 후, 프로페서 등을 보면서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간호사 채플이나 매리 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스터 스팍과 간호사 채플은 드라마 스타트렉, 프로페서와 매리 앤은 시트콤 길리건의 섬에 나오는 등장인물).

 

머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친밀감은 생각만 해도 빌을 겁나게 만들어서,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빌은 늘 길고 윤이 나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가수 겸 배우였던 셰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뒤에서 보고 그를 여자로 착각하는 경우가 흔해서, 지나가는 남자들은 종종 흠모하는 눈길을 보내다가 마침내 앞에서 덥수룩한 턱수염과 남자다운 턱을 본 후에 놀라서 당황스럽고 화난 표정으로 지나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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