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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보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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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 아주머니. 밀가루를 너무 묻혀! 50그람짜릴 75그람으로 만들면 우린 뭘 먹고 장사하나? 하, 이거 참! 다시 좀 잘 해봐요!"
50그램짜리 핫도그는 60에서 70그램으로 만들어야 한다. 냉동실에 들어가 수축되는 것을 고려한 그램 수다.


 


근무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동료와 충돌이 잦았다. 그러다 내 입에서 불쑥 '아주머니'라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그 동료 분이 갑자기 폭발할 듯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좋은 동료분들은 반쯤 농담삼아 '아주머니니까 아주머니라고 하지.'라고 했지만 나는 얼른 사과했다. 인격에 모독을 줄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속으론 굉장히 부끄러웠다. 노동운동과 친하진 않았지만 그들을 아주머니라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내가 그들을 하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학을 나왔는데도 나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었다. 인권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도 나는 사람을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 변할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요새 과하게 성공적인지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높은 자리에서 뽐내고 서 있다가 언젠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보단, 죄책감을 느끼는 것보단 백배 낫다. 아주머니란 단어는 아직도 나한테 그런 의미이다.

결론적으로는 잘 봤다. 공장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솔직히 실렸다. 여자는 공장노동자에서 더 밑바닥으로 가면 몸을 팔게 된다거나, 남자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 밖에서 빨리 노상방뇨하고 온다거나. 아주 가감이 없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명심할 게 몇 가지 있다.
1. 일단 등장인물들이 많이 죽는다.
2. 솔직담백한 이야기라 죽을 때 똥오줌이라거나 이물질 묘사가 나온다. 물론 선정적인 장면도 나온다.
3. 죄다 결말이 불행한 편이다.
혹시나 이런 류의 소설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신중을 요한다. 하지만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겪는 위험한 일이나 소위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긴 하다. 난 이런 장르를 좋아해서 열심히 읽긴 했다(?)

폐허를 보다 처음 집어든 날은 진짜 무슨 날이냐;; 싶을 정도로 혼돈 파괴 망가의 나날이었다. 지진난 건 둘째치고 온갖 트러블에 재고조사에 심지어 조용히 있던 직장동료가 임금 오르면 너 해고되는 거 아니냐고 트집을 잡았다. 평소 같으면 이어폰 끼고 음악 이빠이 틀고 못 들은 척 하는데 옆자리에선 동성이 섹드립하고 아;;;  

 


 내가 20일날 이어폰 사가는 거 까먹으면 인간 말고 개 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었다.


동료 직원의 질문은 그냥 얼버무렸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단축 되는 거야 덕질할 시간이 많아지니 그냥 그렇다고 친다. 그러나 해고라. 임금 오르는 그딴 걸로 직원들 목을 치는 직장이면 그냥 서점 직원이고 뭐고 안 할 거다. 솔직히 음식점 서빙 알바해도 이거보단 더 많이 번다.

이 일 뿐만이 아니다. 회사 내 전화받는 곳에 잠깐 일 있어서 들렀는데 전화기에 조그맣게 폭언폭설, 성희롱이란 글자가 쓰여 있고 옆에 뭔가 번호가 적혀 있다. 아니 사람들아 왜 여기다 전화해서 그런 짓거리를 하세요...? 이인휘 씨 소설 보다보면 이렇게 회사의 온 군데가 신경쓰이는 현상이 생겨난다. 키니나리마스! 그러나 감정이입이 많은 나로서는 이 책을 읽은 날이 생각 많고 머리속 복잡한 날이었다. 내 앞날에 대한 생각도 많이 났지만, 그보다는 진지하게 세상의 비열한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나지 않았었나 싶고. 그래어  폐허를 보다는 좀 빨리 읽었다 ㅠㅠ  내용은 너무 이거 너무 내 현실과 겹쳐서 너무 벗어나고 싶은 부담감이 있음;; 뭐 이 책 뿐만 아니라 이인휘 씨의 소설 자체가 페이지 터너이긴 하다.

좋은 보스는 없다.
직장 동료는 친구가 될 수 없다.
회식은 최대한 피해라.
한 직장에서 6년차 짬밥 먹으면서 배운 직장생활 잘하기 3원칙인데 이 책에선 왜 그걸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다고 본다. 물론 소설의 '나'는 히키코모리인 나와 달리 사교성이 있어서 직장 동료 '중에' 친구가 있다(...) 은근 부럽기도 하다 ㅠㅠ

시흥 칼바위가 나오는데 진짜 내가 정확히 여기 살았었다. 나중에 가보니 재개발하느라 싹 다 헐었더라. 그래서 완전 저주받은 흉가의 느낌 나는데 예전부터 분위기 열라 이상하긴 했었다. 거기 살았던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흉물스런 동네는 좀 헐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 20년 전부터 중딩들 피어싱하고 다니고. 근데 나도 거기 초등학교 전학갈 때까지 놀림받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뻐드렁니라거나 남자같은 이름이라거나 나중엔 그것도 질리니까 심지어 김씨라고 놀림 ㅋㅋㅋ 김에 싸서 먹느냐며 ㅋㅋㅋ 집이 좀 허름한데 옷은 맨날 고급 원피스 입고 다니고 맨날 글 쓰고 그림그리는데 어디 내기만 하면 상을 받고 다니니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래 뭐, 나도 살면서 지금까지 초딩때 상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사람은 못 봤으니. 그래도 그렇지 왕따시킬거면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무시만 하세요. 님들의 언어나 행동이 사람 죽일 수 있다. 20년 지나고 우연히 뻐드렁니 집어넣는데 성공했는데 아직도 아랫입술로 윗니 집어넣는 습관이 생겼다. 입 속 다 헐고 이빨도 좋지 않은데 아직도 이런다. 최근에서야 정상적으로 웃을 수 있고. 그리고 아직도 사회관계 안 좋은 건 어떻게 보상할거니?

 

왜 이렇게 이인휘 씨의 소설이 끌리는가, 난데없이 전권 돌파를 하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다른 작가와는 달리 직접 만나서 그러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보지만 따져보면 천명관과의 만남이 나에겐 좀 더 인상깊고 친숙했다. 외모 탓인가?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고(...) 책을 별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도 만나고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저 그 분의 책 한 권을 처음 보고 끌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하지만 퍽 깊고 순수한 면이 있다. 사인회를 하거나 강의를 하는 기존 소설가들에게선 이미 느낄 수 없는 친근감이다. 복잡하진 않지만 알 수 없는 몰입도가 있다는 그 자체에서 깊은 맛이 우러난다고 할 수 있다.

왠지 독서모임할 때 누가 이인휘씨 까면 무라카미 류나 아스카 때처럼 아니 제 최애한테 왜 이러세요 날 모욕하시는 건가요 이런 말이 내 목구녕에서 튀어나갈 거 같다. 그냥 존나 가만있어야 겠다. ㄷㄷㄷ

요번에 이분 책 전권 다 보면 삶창 도서관에 있는 책 다 재패하려 준비중. 기대하시라! 요샌 주로 시집을 편찬하고 있는 출판사로 노동계와 관련된 글들을 주로 출판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을 번역했다. 국내소설파에 삶창이라니 너 무지 마이너 아니냐!라고 말씀하셔도 난 어차피 마이너이고 인기 끌려고 블로그에 리뷰 쓰는 게 아닌지라.

 

"스님 간밤에 제가 꿈을 꿨는데 법당은 무사다,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설악산을 올려다봤습니다.
"그것 참 좋은 꿈을 꿨습니다. 법당은 본래 부처의 몸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사를 한자로 풀어보면 삿됨이 없다는 뜻인데, 몸에 삿됨이 없다 카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주 좋은 꿈입니다."
(...)
"형은 감상주의자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
그가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새라는 노래.

 

일본에서 까마귀는 카라스라 한다. 烏(カラス) 새는 토리라고 한다. 鳥(とり)


 왜 한 획이 부족하냐면 중국인들이 새라는 상형문자에서 눈을 뺐기 때문이다. 고대어를 일본 사람들이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히라가나가 아니라 일부러 가타카나로 부른다. 온 몸이 검은 까마귀는 눈까지 검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눈이 없는 새로 친다고 했다. 이는 맹인을 연상시키는데, 그들은 일본에선 악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농경 신화에서는 날개가 여덞개 달리지 않았나 추정되는 야타카라스가 난폭한 신들을 피하면서 천황을 천혜의 땅으로 인도해 주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도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닌가 해석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까마귀라 하여 그닥 불길한 새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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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08
안미옥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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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뭐 친구끼리의 사소한 싸움 가지고 진심 정색하고 있는 나도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나로선 내가 싫은데도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는 그 인간들이 싫은 것이다.


 내가 술주정을 하고 난 다음날 아침 치마 좀 입고 나오면 어김없이 '이야 아가씨가 어제와는 완전 딴판인 모습으로 나오네'라며 비웃는 모습을 한다거나. 나랑 친구하기 싫으면 다른 애랑 잠깐 친구하다 오거나 혹은 안 와도 그만이지 않을까. 술주정에 정말로 화가 났으면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집으로 가고 그걸로 끝, 이었으면 서로 무안하지 않고 나만 무안한 일 아니었을까. 이렇게 '실수'하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나 자신보다는 인간관계 자체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라는 사람 자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그러다가 자신의 심정마저 잊어먹은 채 그저 예의를 차리기에 바빴던 게 아니었을까. 그 인간의 대소사가 역사에 비해 도대체 뭐가 중요해서? 그 시간에 차라리 지금도 고통받고 시위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가는 게 훨씬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뭐 어차피 이런 글을 쓴들 이미 내가 단호박으로 잘라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보긴 어렵겠지만.

이 시인의 시는 굉장히 좋은 시와 그냥 좋은 시의 차이가 분명한 편이다. 특히 사회이슈에 관해 다룬 시들이 가장 좋은 듯. 섬세한 감각이 느껴지지만 미래파라 불리기엔 주제 의식이 선명한 편이다.

 

정말 간단히 말하자면 이 시집의 전체적인 주제는 '개썅마이웨이'이긴 한데, 동화책으로 만들어도 될 만한 아기자기한 단어들로 이를 순화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스토리가 있는 시는 인디언 텐트와 생일 편지 둘밖에 없고 나머지는 너무 단편적이라서 일러스트(?) 정도의 인상만 남는다. 시인이 시를 좀 길게 쓸 때 좋은 면이 있고 짧게 쓸 때 좋은 면이 있는데, 이 시인은 좀 더 길게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른 시인들보다 길게 쓰는 편인데도 그렇다. 사람들이 우울한 시 좀 쓰지 마라 등등의 잔소리를 하나본데, 다음에 시를 쓰실 땐 그런 걸 무시했음 좋겠다. 안미옥 시인 자신이 떨쳐내려고 애를 쓰는 것 같긴 한데, 아직 부족하다.

의외로 연애시같은 것도 있다. 한 사람이 있는 정오라는 시인데 대다수의 다른 시들처럼 한 쪽 이상이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너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자신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상깊은 대목은 될 수 없었다. 나는 나일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 말로도 눈물이 펑펑 쏟아졌을 텐데 감각이 둔해진 건지, 아님 나이가 들어서 꿈보단 현실에 더 가까워진 건지 알 수 없다. 좋지는 않은 현상인데.

여러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미옥의 시를 고평가하는 건 당연 그녀의 역대작이라 할 수 있는 시 질의응답 때문이다. 이 시집은 또한 완성도도 뛰어나다. 주어도 목적어도 흐릿해서 제법 고분고분한데 좀 지루할 정도다 싶을 때, 그러니까 이 시집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 시인은 반전을 때린다. 두번의 산책에서 시인은 이 시를 다시 읽을 것을 추천한다. 이를 무시하고 다음의 마지막 시로 나아갈 때, 여름의 발원이라 하는 그 시는 독자에게 '자신의 기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라 쓰여 있는 무자비한 딱지를 붙인다.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인간은 드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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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창비시선 337
최정진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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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안의 반지층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뼈가 헐거운 새가 울다가 텅 빈 곳으로 날카롭게 날아갔다

욕조에 담긴 내 몸이 물을 더럽히고 있다 뼈는 내 몸 안에 부풀린 딱딱한 거품이다 나는 내 방의 여러 구석에 나뉘어 있고 방은 자꾸만 비좁다

나는 어디서든 머리를 기대고 쉽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빠져 있을 머리카락 몇올을 그대로 두고 왔다

욕조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데 욕조 밖으로 뻗은 발이 시리다 창밖으로 무덤이 보인다 내가 몸을 씻는 높이에 누군가 죽어 있다 이 높이에서 애인과 나는 옷을 벗는다 이 높이의 욕조를 향해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다 나를 지나갈 것이다

머리카락 몇올은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만 내 곁에 와서 나를 안쓰럽게 쓰다듬다 간 손짓인가

욕조로 쏟아지는 물을 보면 계단은 중간에서 차오른다


 

 

80년대 초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왠만하면 잘 살았던 시대였다.


게다가 사교육이 성대하게 유행하면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다양한 학원을 보냈다. 그러나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학원이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그닥 성숙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체벌이 자연스러웠던지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고 온 애들이 학원에서도 맞는 상황이 발생했었다. 나도 피아노 학원을 다니다가 콩쿨에 보내려는 의도가 다분한 레슨에 음정박자가 틀리면 자 모서리로 손가락을 때려대는 선생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 그만뒀던 기억이 난다. 더 어렸을 땐 수영 학원을 다녔는데, 너무나 좋았지만 가끔씩은 엉덩이를 야구 배트로 맞는 단체 기합도 받았었다. 그러나 역시 체벌보다도 가장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던 건 선생님들의 다양한 비아냥이었다. 자세가 삐딱해서 등골이 휘어지고 있다며 선생님들이 먼저 특정한 아이들을 지목했다. 아마도 자신이 학교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선지, 아이들에게 춤을 추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문제는 잘 추지 못할 경우인데, 그럴 땐 그 아이를 모든 학생들 앞에서 다시 춰 보도록 시킨 뒤 주도해서 비웃었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 앞에서 알아서 감정을 추스리며 살아야만 했었다. 물론 시인 자체가 남들의 평가에 민감한 것 같지만, 그 당시의 정서를 잘 담아낸 건 맞다.

 


전반은 연애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들어가 있지 않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사랑시라는 티도 나지 않는다. 항상 이것과 저것의 중간에서 머뭇거리다 튕겨져 나가버리는 시인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사실 그녀의 집 앞에서 창문을 들여다본다는 설정은 요즘 시대엔 호러로 찍히기 딱 좋지만(사실 약간 그걸 노린듯한 시 구절들도 몇 가지 있다.) 원래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비정상적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뜸을 들이는 시인인지라 구절들에 꽤 여운을 남겨두는데, 그게 또 한 템포 더 느려져서 서정시의 느낌이 물씬 난다. 그리움에 관한 시라고 하기엔 또 다른 게, 야밤에 그림자만 골라가면서 손도 잡지 않고 조심조심 같이 걷는 연인에 대한 시라던가 어딘가 다른 사연이 있는 듯한 것들이 많다. 아무래도 시인은 다양하게 접근하려던 듯하다. 그러나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는 게 중요하다. 아무튼 대중들이 좋아하는 노골적인 사랑시와 사랑이란 게 어디 있는지 도통 모를 난해한 미래파 시 사이에 있는, 조금 특이한 시라고 볼 수 있겠다.

 


 


'너'의 집이 아파트 2층 이상이거나 혹은 방이 2층에 있는 집을 연상시키는 반면, 시는 지상도 부정하고 지하도 부정하는 점에서 왠지 반지하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평론에서처럼 중간이라고 보기엔 굉장히 추상적인 문제인 듯. 반지하에서는 습기가 금방 찬다. 창을 내다보면 발만 들여다보인다. 가끔 술 취한 발이 창문을 걷어차서 깨뜨릴 때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곳에서 자신의 언어가 살기를 고집한다. 시인의 우직함이 범상치 않다. 그런 상태에서 사랑시 말고 새로운 시에 도전하겠다는 그에게 결실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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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 원효의 생애와 사상 - '일심(진여)의 신해성'과 '일심지원(본각)의 결정성'을 중심으로 프라즈냐 총서 34
고영섭 지음 / 운주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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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대장경 완간을 기다리며 중에서

눈물 콧물탄이 펑펑 날으는
이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짱돌 하나 꽃병 하나 던지지 않는 너는 흰손이구나
친구여 너는
싼스끄리뜨를 배우러 뉴델리로 떠나고
빠알리어를 배우러 콜롬보로 떠나는구나
동악 관악 안암 신촌 등
다발탄과 지랄탄이 날으는 이땅에서는
우리들이 뜨겁게 껴안을 말마저 잃어버리고
우리들의 혓바닥 위에서 구르는 자음 모음들을 잃어버리고
모두들 외국어를 배우러 상품처럼 수출되고 있구나
이 땅에서 시를 쓰는 나는
한글대장경의 완간을 기다리며
말씀의 한 귀절 한 음절을 씹어보지만
식민지 하늘에는
핵무기왕국의 성조기와
경제왕국의 일장기가 거세게 펄럭이는구나


 

그닥 동의하진 않지만 맞는 말인 것 같다.

전통문화 소비 같은 국뽕을 적극적으로 추천할 생각은 없지만, 자꾸 문제에서 도피하듯 치부 가리기에 급급하지 말고 우리나라를 직시해야 한다. 또한 이름만 한국형이 아닌 진짜 한국형 답변을 틀리더라도 계속해서 내놓아야 할 텐데... 이 책이 2000년에 발간되었는데 17년이 지나도 변한 게 하나 없고 오히려 일본색이 짙어지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보기에, 사회학이라던가 정치 책을 찾는 사람들의 책은 자꾸만 새로 나온 책을 찾게 된다.

 자연스럽게 헌책방에서도 최신간만을 찾게 되서, 헌책방을 가는 의미는 단지 책을 싸게 사려는 게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무척 아쉬운 일이다. 헌책방을 찾는 재미란 이미 절판된 도서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인지라 옛날 책들은 좀 진부해지긴 한다. 그렇다면, 시는 어떨까? 시는 과거에 내가 어쨌고 저쨌다는 일기나 회고록 스타일은 아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꼰대 같은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자연을 주로 이야기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걸 보면 책은 마음의 양식이란 말이 정말 맞다. 그리고 특히 시가 그렇다.

 

성묘 중에서

나 죽더라도 화장하면
절대 안된다던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집안의 산소에 묻었었다
그곳에 아버지는 스물 세 해동안 누워계셨다
명태포와 달리
육탈된 뼈만 남긴 채

내년에는 가까운 벽제 언저리에
납골당 하나를 세우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유언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하고
화장하려는 생각이
술 잔 올리는 손을 떨리게 했다


 왜 시인은 아버지를 화장시키고 싶었을까.


이 시를 처음 봤을 땐 불교를 믿으셔서 그러시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자화상이란 시를 보면 과거를 그런 식으로 떨쳐버리려 한 게 아닌가 싶다. 성묘를 하고 집에 가는 길에 시인은 대한민국 땅이 전부 음지가 되는 걸 상상했다고 한다. 무덤이 많단 소릴까? 아님 아동학대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단 소릴까?

 

정동진

바다 게가 지그재그로 기어나와
추억의 조개껍질로 쌓아올린 역사
이곳엔 지금 젊음이 한창이다
삼백원 짜리 표딱지를 내고
객석에 자리를 잡으면
모래시계 소나무가 허리를 숙이고
몽유도원도의 막을 올린다
안개와 바다로 세워진 가설무대
바람이 무대 휘장을 흔들며
몇십 년 전의 십대로 되돌리면
모두들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나는 수학여행 갔던 그때로 돌아가
이미 흘러가 버린 구식 카메라 렌즈 앞에서
놀란 눈으로 자꾸만 교복 칼라를 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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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오현정 옮김 / 큰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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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이 내 속에 울려 퍼집니다.
ㅡ생각해 보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
ㅡ사람과 새와 돌과 꽃을 봅니다.
ㅡ다시 생각해 보아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
ㅡ생각과 꿈과 빛과 유령을 봅니다.
ㅡ또 생각해 보아라, 너는 무엇을 보느냐?
ㅡ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적막하고 고요한, 죽음 같은 깊은 밤입니다.
ㅡ또 생각해 보아라!
ㅡ아! 나는 검은 성벽을 꿰뚫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울음소리와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저편 강가에서의 날개 떨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ㅡ울지 마라, 울지 마라, 그것은 저편 강가가 아니니라.
외치는 소리, 울음소리, 날개 떨리는 소리는
너의 마음이니라.

 


 

그나저나 이 분도 이름이 니코스이니 애칭으로 따지면 니코로 불린 거 아니냐!
... 니코 미안.


일어나서 도서관 가면서
아 ㅅㅂ 그리스인 조르바 읽어야 한다니
아앍 ㅅㅂ 그 인간 변태잖아아아 읽기싫어엇 야메떼 이야다아 쿳소오 근데 독서모임 때문에 읽어야 돼애애
이러면서 갔는데 레알 이거보고 머리가 띵해짐
아 그러니까 소설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지 비소설은 다양하구나. 민망하다 ㅋㅋㅋ 도서관에서 레알 나 혼자 비실비실 빵터짐(...) 매일 20페이지씩 소리내어 읽다보니 대략 10일만에 다 읽었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룰루. 여러분 조르바가 꼴보기 싫은 사람 있음까? 저처럼 잠언 읽으세요. 에세이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왠지 시같아서 부담이 안 간다.

 

 

 줄거리 정리를 하게 될 듯한데 이 책의 내용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를 벗어던지는 데 효율적일 것 같아서이다.

대충 신에 대해서만 정리하자면, 신이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 등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은 수없는 가면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이 점에서만 기독교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이 신은 무능하지만 계속 우주와 싸우고 있으며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각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의 요소를 육체에서 해방시켜 지구를 몽땅 불태워 요한게시록 같은 정화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번 마더퍼커 번! 레알 요즘 내 주변의 사방이 아파트 짓겠다고 공사가 한창인데 그 소음을 들으며 출근하다 보면 진짜 이렇게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서는 심연 속에서 다함께 정숙한 침묵의 파티. 이런 요소들은 모두 동양의 윤회 사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 작가가 그리스 정교를 믿었다고 판단하기엔 어폐가 있다. 작가가 중국 여행을 한 후 쓴 기행문도 있고 말이다.

 

 

 

 어쩌면 장막을 걷으라 말하지 않는 건 플라톤의 이데아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행위인인지도 모르겠다. 

 장막 저쪽에 있는 이상세계도 어차피 당신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듯. 실제로 이 대사 이후에 종종 그런 말투가 등장한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현상 속에 내재하지 않으며 바보가 되어 고뇌를 우직하게 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첫번째 의무와 두번째 의무 사이의 경계이다.

 

 

 결국 내가 보고 듣는 건 다 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으로 나아가려고 계속 노력한다면 결국 다 나의 마음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을 두번째 의무에선 계속 권장하고 있다.  

결국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는 무릇 인간이며 대지는 인간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알라고 저자는 권장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크레온이 비인간적 존재와 싸우기 위한 감각을 준다는 말을 하는데, 그는 오이디푸스의 외삼촌이자 처남이다. 그런데 이 분 오이디푸스의 전말을 다 목격한 정신적 충격은 둘째치고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이 모조리 죽지 않았나;;

 

 

 

페이트를 보면 유독 외국에서 평범치 않게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일본의 평범한 문화를 즐기는 장면이 많이 발견된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눈으로 이들을 본다면 어떨까? 그는 분개할 것이다. 책에서 그는 일상을 벗어나 끊임없이 도약하려 노력해야 하며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왜 페이트의 교훈에 동조하는가? 이는 일상적인 겸손에 들어 있는 성스러운 모습에 대한 존경심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도약하는 삶을 살았던 서번트들이 평범해지는 모습은 겸손을 잘못 해석한 건 아닐까 싶다. 사실 작품 자체의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P.S 그래도 난 니코니코니 카잔차키스가 싫다. 이유? 인식-인류는 애 낳으라는 소리가 절반 이상이다. 사스가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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