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詩이야기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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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에 관한 단상

 이글은 좀 난삽할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김훈과 관련된 내 사설을 두서없이 풀어 놓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논리에 기댈 만큼 나는 그닥 여유가 없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 것이다.

 어쩌다가 김훈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문학기행>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그리고 언젠가 그가 쓴 <한영애론>을 읽었다. 아마도 그가 편집장으로 잠시 관계했던 <연예저널>이라는 잡지에서였던 것 같다. 한영애, 그녀는 미지수다. 도대체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한 어린아이 얼굴을 가진 여자 무당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왕창 빨아 들인다. 그녀가 "거기 누구 없소"할 때 나는 '거기에 항상 있다.' 있을뿐더러 조금 감동하고 있다. 흡인력에 있어서는 김훈의 문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적절히 단문과 장문을 구사하며 문체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그는 리포터다. 그런만큼 업무상 그는 세상을 아주 열심히 쏘다닌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비지니스용의 글로 읽히지 않는다. 그의 표정을 보라.(그는 실제 그의 책에 자신의 사진을 싣기 좋아한다. 그것두 언제나 담배를 삐딱하게 꼬나문 모습, 두 주머니에 깊숙히 손을 찌르고 느릿느릿 걷는 모습....거기다 언제나 콤비를 입고 머플러를 매길 좋아하는 그의 댄디즘) 이런 외관으로 그는 괜찮은 낭만주의자다. 대한민국이 이런 낭만주의자 하나쯤 가지는 것도 문화적으로 그리 험이 되진 않을 듯하다. 우리 문화계에도 이런 뉘앙스 메이커(이건 나의 新造語다.그는 어떤 섬세함을 자꾸 만들어 낸다)가 있다는 거, 더구나 그가 70년대와 80년대를 저널리스트로(그가 한때박래부와 있었던, 한국일보 문화부는 문청들의 꿈이었다) 거치면서도 그의 문체를 잃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무조건 감동한다. 이건 고집이다. 70년대 왠지 구질구질하게 입어야 뭔가 고뇌하는 지식인처럼 보일 때도 콤비를 멋지게 입어제꼈던 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강하다. 그러나 이런 찬사의 무의식적 심층엔 <문화부>라는 후광(aura)에 대한 어떤 부러움의 속사정이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한 문인들의 애정도 어떤 비평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저널리스트에 대한 일종의 屈身은 아니었을까하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이해하시길 좀 솔직히 써보려고 한다)

 그에겐 아마도 <보여질 것>이란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콤플렉스가 그의 문체를 만들어내진 않았을까 나는조심스레 진단한다. 리포터는 단순히 보여지기 위한 직업이 아닌가. 그는 얼마나 많은 눈(目)들을 의식했었을까. 그의 문체는 그 눈초리를 의식하는 곳에서 세워졌을 것이다. 깊이를 이루기 위한 집요한 사유의 후견인은 그 무수한 잠재적인 눈초리가 아니었을까.

 그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서 나해철시인을 두고 <그의 영산포연작은 강가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끝끝내 말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는 언어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에 대한 집착은 미학적 자기 만족 차원에서 그치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다. 같은 책에서 그는 하재봉을 별로 이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재봉의 시 속에서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너무도 현란한 이미지와 시어들이, 때로는 중심부를 향하여 조여드는 기색이 없이 난무하고 좌충우돌한다..노련한 시인은 그 구문의장치를 내버리지 않고, 감추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더 노련한 시인이라면 그 감추어진 구문의 장치까지도 시화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하재봉의 글은 그 구문의 틀이 돌출함으로써 생각의 물결 같은 흐름을 방해하고 그가 그리는 시화의 세계를 괴기스럽게까지 만들어 버린다

  좋은 비평이다. 김훈의 글이 하재봉을 화나게 하지 않고 아프게 만들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좋은 비평은 작가를 화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작가를 아프게 하는 데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글은 가끔 미학적 세련이 지나치다. 그땐 좀 찌푸려진다. 세간에 그를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본데, 난 나쁜 뜻에서 그가 그런 면이 있다는 것, 즉 좀 지나치게 세련됨을 추구할 때가 종종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난 스타일리스트라는 세간의 평에 조금 동의한다. <내가 읽은... ...>에서 기형도를 썼을 때 마지막 문장은 안빼버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김현과 김훈은 모음의 한끝 차이다. 그들은 유사하다. 그 둘은 황지우의 표현을 빌면  <문체로 꼬리친다>. 문체로 꼬리를 친다니! '꼬리를 친다'는 건 한번 붙어보자는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저무는 서해를 말할 때 김훈은 세상을 향해 꼬리 친다. 그는 겉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풍경의 속살을 향해, 아니 그 속의 뼈와 핵심을 향해 비집고 들어 가려고 한다. 비집고 들어가려할 때 그의 언어는 유장해진다. 말이 말의 꼬리를 물고 길어진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시도의 끝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속에 무엇이 있는가. 과연 세계의 핵은 그에게 만져지는 에로틱한 실체로서 다가오는 것일까. 과연 세상의 풍경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망연자실 서해의 낙조 앞에 서있다.

 그는 일몰의 풍경이다. 그는 깊은 가을의 풍경이다. 그는 언제나 조락한다. 그런데도 그에겐 물기가 많다. 뿐인가 그는 바삭하기조차 하다. 그는 모순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모순을 언제나 좋아한다. 태양의 아들이면서도 멜랑꼬리한 분위기의 까뮈나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아폴론적 명석함의 혼혈아 니이체. 암튼 그의 떠돎은 그의 물기를 말리기 위한 여행, 定處를 얻기 위한 定處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물기를 말리기 위해서 햇빛 밝은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봄에 떠나도 그가 도착하는 곳은 가을이다. 설령 그가 아침에 떠나도 그가 도착하는 곳은 저무는 일몰이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그 완숙의 절정 밑에 조락의 쓸쓸함과 죽음을 수락하는 처연함의 색깔이 깔려 있다. 이룸과 죽음 사이의 구획을 허물고 삼투시켜, 그것들이 합쳐져서 드러나는 삶의 내용을 하나의 색깔이라는 구체적 현존 속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아직 살아서 보는 인간의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펼쳐놓은 가을빛의 저 말하여지지 않는 신비를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월자의 한 성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나는 그가 풍경의 겉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침투한다. 그가 풍경의 속살을 헤치고 질료적인 본질과 만나려고 할 때 그는 언제나 허무주의자다. 세상은 비어있는 것이다. 공연히 그 혼자서 용쓰고 유난스레 지랄을 떤 것이다. 그럴 때 언어는 가혹하다. 가혹하게 주인을 물어 뜯는다. 참혹하다. 언어를 버리고 무거움을 버리고, 끈적끈적한 장문들과 호흡들을 버리고 그는 상큼하게 날아 오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이런 그의 말에 가장 확실한 밑줄을 긋는다.(밑줄을 그을 때 이미 나는 그를 읽기 훨씬 전에  그와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초겨울의 풀들은 가볍다.풍화의 운명이 무겁고 쓰라
      릴수록 그 외양은 저토록 가벼워야 옳으리라.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가벼움은 늙은 가벼움이다. 노련한 가벼움이다. 어린아이의 가벼움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자, 풍화의 운명을 알고 있는 자의 가벼움이다. [헬리콥터와 정현종 생각]은 그같은 가벼움에 대한 작은 예찬의 기록쯤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는 탱크. 가벼움이 무거움을 매달고 하늘로 씽씽 날아간다. 정현종이라는 禪士에게 그는 한방 먹는다. 선사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 뭐하냐?!"

 아, 마흔 일곱살의 그가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가 세계사에 의하여, 또는 문명이나 논리에 의하여 채워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썰물의 서해는 감당할 수 없는 이 막막한 빈 공간을 안겨다 준다.>  그가 어느덧 마흔하고도 일곱이다.(그는 1948년생이다.) 발빠른 보행과 속도성을 요구하는 리포터라는 직업은, 그의 나이를 실제보다 아랫길로 보게 만든다. 또 그의 짧은 머리칼도 그렇다. 어떤 이는 항상 젊게 보인다. 그렇다. 브레히트는 언제나 젊고 유관순은 언제나 열여섯 살 이상이다. 난 스물 댓살쯤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시콜콜 그의 구석구석을 대한민국의 이름없는 한 文靑에게 보고당하다니, 그는 성공했다. 그를 보고 있는 눈(目)들을 의식하는 데에 리포터로서 성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에 전혀 기꺼워 하지 않을 만큼 그는 성공했다.
 이렇게 속물적으로 글을 끝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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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2005-12-2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8년생이면 58살 아닌가요? 열살이나 빼면 너무 한 것 같은데요.
김훈이라는 인물은 참 여전히 궁금합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6-10-23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12년전에 쓴 거거든요 후 그렇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