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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TCH GROUP HISTORY

스와치그룹은 연간 1억개이상(가격환산:시 40억 스위스 프랑)의 시계 완제품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시계 생산업체이며, 브리겟(Briguet) 오메가(Omega), 라도(Rado) 론진(Longines), 티쏘(Tissot), 스와치(Swatch) 등 17개의 시계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유럽 시계 시장에서 시계 핵심 부품(movement) 생산의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부품 분야서도 상당한 점유율 을 보이며, 98년에는 환경친화형 자동차인 스마트카(smart car)를 생산 판매하는 등 첨단 기계분야에서 다각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회사이다.

88년 서울올림픽과 아틀란타, 시드니 올림픽에 이어 이후 2010년까지 동/하계 올림픽을 비롯한 IOC에서 진행되는 모든 국제경기에 공식기록측정업체(Official Timekeeper)로 활약할 계획이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역시 공식기록측정업체로 선정되었다.
 

[현재]

스위스의 비엘(Biel)에 위치한 스와치 그룹은 세계 최대의 시계 생산업체로, 전세계 시계 시장의 22~25%를 점유하고 있다. 1999년 기준, 스와치그룹의 연간매출은 2조8천억원에 달하며, 총 10억 4천만 개의 시계 및 부품을 생산하였다. 스위스에만도 50여 곳의 생산기지를 두고 있으며, 프랑스, 독일, 이태리, 미국, 버진 아일랜드, 태국, 말레이시아, 중국 등지에 440개의 사업장을 두고 있다.

스와치 그룹은 내구력이 있는 첨단소재와 앞서가는 디자인을 겸비한 최고 품질의 제품을 상징한다. 자체적인 세계시장 유통망을 통해, 시계 완제품과 핵심부품 등을 유통하고 있으며, 스와치 그룹이 가지고 있는 17개 시계 브랜드 회사에 필요한 모든 부품을 실질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소비자의 기호와 다양한 가격대의 시계를 생산, 유통하여 각계각층의 소비자 니즈를 만족시키고 있다.

- 럭셔리, 프레스티지의 최상 등급 : 브리겟 (Breguet), 쟈끄드로 (Jaquet-Droz), 레온아또(Leon-Hatot), 블랑팡 (Blancpain), 글라스오떼 오리지날(Glashute Original), 오메가 (Omega), 라도 (Rado), 론진 (Longines)

- 중간(Middle) 등급 : 티쏘 (Tissot), 캘빈클라인 (Calvin Klein), 써티나 (Certina), 
미도 (Mido), 해밀톤 (Hamilton), 피에르 발만 (Pierre Balman)

기본(Basic) 등급 : 스와치 (Swatch), 플릭플락 (Flik Flak)

- 고객의 요구에 따라 가격대가 매우 다양한 맞춤시계 : 엔듀라 (Endura)

 

그러나 스와치 그룹이 시계만을 생산하는 회사는 아니다. 최첨단 기술의 연구와 개발은 스와치 그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밀전자공학과 정밀기계공학은 그룹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스와치 그룹은 대부분의 올림픽 게임들과 국제 스포츠행사에서 공식기록측정시계(Official Timekeeper)로 활약하는 것을 포함해 공공 분야, 통신과 자동차 분야에서도 활동한다.

1986년 이후로 SMH Swiss Corporation for Microelectronics and Watchmaking Industries Ltd. 라고 명명하였으나, 그룹명과 그 약자인 "SMH"를 다른 나라 언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1998년 그룹명을 현재의 스와치 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현재의 스와치 그룹은 1983년, ASUAG와 SSIH라는 2개의 스위스 시계 제조회사의 합병을 통해 설립됐다.

 

[과거]

ASUAG는 1931년에, SSIH는 1930년 오메가와 티쏘의 합병으로 설립됐다. SSIH의 주 목적은 우수한 스위스 시계를 선별적이고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보다 저렴한 가격대로 고품질의 시계부품과 다양한 다른 브랜드를 생산하는 회사들을 인수해, SSIH는 점차적으로 스위스 시계제조업체로서 입지를 굳혀갔다.

반면, ASUAG의 주목적은 스위스 시계 산업을 유지, 개선, 발달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ASUAG는 다른 부품 제조회사들과 시계완제품을 제조하는 회사들의 매입을 통해 점차적으로 확장해나갔는데, 이 회사들은 자회사 GWC General Watch Co. Ltd.로 합병되었다.

두 회사는 각각의 회사에서 상호 보완적인 연구와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1930년대의 경제 위기와 이에 따른 실업사태에 맞서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곧 두 회사는 관련 자회사들의 업계 정책을 공통적으로 충족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70년대 즉, 스위스 시계산업의 위기 후에, 세계 최대의 시계 제조업체였던 이 두 거대 회사에 다시 한번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일본 시계산업이 저렴하고 새로운 전자시계의 대량생산을 앞세우는 등 외국의 경쟁이 빠르게 시장에서 거센 도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ASUAG과 SSIH는 회사를 정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미 몇몇의 외국 경쟁사들은 오메가, 론진, 티쏘 등과 같은 일류 시계 브랜드를 매입하려 하고 있었다.

현재 스와치 그룹의 이사회 회장 겸 CEO이자 그 당시 하이엑 엔지니어링(Hayek Engineering)의 CEO인 니콜라스 하이엑 (Nicolas G. Hayek)은 회생의 기회를 가늠하는 임무와 양사의 미래를 위한 전략을 개발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대부분의 투자자와 은행들은 회생가능성을 아주 희박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983년, 그 유명한 하이엑 연구(Hayek Study)의 결과로 이 두 회사의 회생을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전략들이 발표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ASUAG과 SSIH가 SMH로 합병된 것과 낮은 가격, 첨단기술, 예술적 감수성을 표방한 시계-즉, 스와치(Swatch)의 발매였다. 이러한 대책들은 하이엑 공동출자체(Hayek Pool)을 통해 대부분의 지분을 인수하고 니콜라스 하이엑 (Nicolas G. Hayek)을 CEO로 임명함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 것만 아니라 향후 5년이 지난 후에는 SMH 그룹을 최대의 시계제조 회사로 만들었다.

 

[미래]

스와치 그룹의 주된 활동은 역시 시계 완제품의 생산이다. 스와치에서 개발한 새로운 개념의 시간인 스와치 비트(Swatch Beat), 또는 오직 소량판매로 희소성을 높인 새로운 오메가(Omega)의 coaxial caliber 같은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또한 스와치 그룹의 여러 자회사들은 스와치 그룹 브랜드뿐만 아니라 스위스 밖의 몇몇 시계업체와 스위스 시계 산업 전반에 핵심 적인 시계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스와치 그룹은 또한 컴퓨터, 통신(특히 휴대전화), 의약품, 자동차산업과 전자공학 등과 같은 다른 분야에 첨단기술적 요소들을 전하고 있다. 저출력칩, 수정, 전지 같은 스와치 그룹의 제품들이 다른 첨단기술 제품들과 함께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1994년, city car를 만들려는 프로젝트가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 smart car는 1998년 MCC에 의해 성공적으로 발매되었다.

1998년 11월 MCC와 다임러 크라이슬러의 협정의 종결에 이어, SMH Automobile 은 전세계 다른 분야에서 여러 잠재적인 파트너로부터 접촉이 있었다. 이 회사가 주력하고 있는 기술부문은 하이브리드 시스템 공학의 개발이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유연성이 있고, 다른 에너지원과 결합시킬 수 있게 고안된 인터페이스를 갖춘 내부 혼성 산화 엔진으로 구성된다. 이 하이브리드 시스템 공학을 통해 다양한 자동차 조립라인에 필요한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Swatch Access (무선 접속 통제, 인터넷 접속)와 Swatch Talk (휴대폰 시계) 같은 제품으로, 스와치는 방대한 경험, 기술, 마이크로공학과 극소전자공학에서 제품 생산 능력을 이용해 통신과 인터넷 산업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료출처] greenwichwat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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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시아노(Marciano) 형제는 디자인과 스타일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는 지역, 프랑스 남부에서 성장하였다. 이들 형제는 미국 서부에 대한 동경과 유럽의 감성을 결합하여 GUESS, Inc.를 창립하였다.
1970년대는 의상 디자인에 방향성이 없던 시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데님'에 대해 고루한 소재라는 인식과 함께 청바지를 통해서 패션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시아노(Marciano) 형제는 그러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만큼 감각적이고 강렬하며 세련된,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러한 GUESS의 시도는 당시 매우 신선한 것이었으며, 데님의 미래에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GUESS에 대한 유통업체들의 반응이 회의적이었고, 데님 바이어(buyer)들의 반응도 냉담하였다. 그러나 마르시아노(Marciano) 형제의 확실한 직감과 끈기는 독특한 스타일의 섹시한 ‘3-zip Marilyn jean(마릴린 진)'으로 결실을 보았다. 처음으로 블루밍데일(Bloomingdale's) 백화점에서 20여장의 ‘3-zip Marilyn jean(마릴린 진)'을 판매하게 되었으며, 이 제품은 몇 시간 만에 모두 판매되었다.


GUESS는 전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 중 하나로, 뛰어난 품질과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스타일, 독창적인 마케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남성, 여성 및 유/아동을 대상으로 라이프 스타일을 선도하는 캐주얼 의류 및 액세서리를 디자인하고 판매한다.



1970년대

캘리포니아(California) 센추리 시티(Century City)에 첫 번째 매장 오픈.
뒤 이어 베버리 힐즈(Beverly Hills)와 뉴욕(New York City) 매장 오픈

1981년 12월 뉴욕 블루밍데일(Bloomingdale's) 백화점에서 최초로 GUESS jean 판매

1984년 GUESS Men's line 런칭
Baby GUESS, GUESS Watch 런칭

1985년 포토그래퍼 웨인 메이저(Wayne Maser)가 촬영한 첫 번째 GUESS 흑백 광고 등장

1986년 “Desert” 광고 캠페인으로 첫 번째 ‘클리오(Clio) 광고상' 수상

1987년 “Picture Show” 광고 캠페인으로 광고로 두 번째 ‘클리오(Clio) 광고상' 수상

1988년 GUESS Footwear 런칭
"Paparazzi" 광고 캠페인으로 ‘클리오(Clio) 광고상' 수상
GUESS Perfume 출시
한국 진출

1989년 GUESS Eyewear 런칭
클라우디아 쉬퍼(Claudia Schiffer)의 GUESS 광고 캠페인 등장
아르헨티나, 캐나다, 멕시코 등지로 진출하며 글로벌 확장 지속
1989년 가을, GUESS Collection 출시
 

1990년 뉴욕 헤럴드 스퀘어(Herald Square)의 메이시(Macy's) 백화점에 등장한 클라우디
아 쉬퍼(Claudia Schiffer)를 보기 위해 전례 없이 많은 관중 집결
GUESS 이미지북 “Nashville”이 미국 최대의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영구 보관 자료로 선정됨

1991년 GUESS Athletic 런칭
1991년 9월 뉴욕 블루밍데일(Bloomingdale’s) 백화점에 대형 남성복 매장 오픈
베버리 힐즈(Beverly Hills)에서 GUESS 10주년 기념 파티 개최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에서 10주년 기념 사진집 "A Decade of GUESS" 판매

1992년 베버리 힐즈(Beverly Hills)의 로데오 드라이브(Rodeo Drive)에 서부 개척시대를 테
마로 한 매장 오픈
브라질, 인도네시아 진출
GUESS Belts, Neckwear, Men's Leather line 런칭

1994년 첫 번째 GUESS 저널 출간
블루밍데일(Bloomingdale’s) 백화점 한 지점의 전관(全館) 프로모션에서 GUESS 전 라인 소개
컬럼비아, 이탈리아, 일본으로 진출하며 글로벌 확장 지속
GUESS Activewear, Jewelry, Swimwear, Golf, Home collection 런칭

1996년 단편 영화 “Cheat”로 7개 부문의 ‘클리오(Clio) 광고상’ 수상.
레바논 진출

1997년 괌 매장 오픈

1998년 남아프리카 진출

1999년 첫 번째 웹사이트 GUESS.com 오픈
켄터키(Kentucky)주 루이빌(Louisville)에 GUESS Distribution Center 오픈
 

2000년 GUESSKids.com 오픈
GUESS Kids 매장 추가로 GUESS 패밀리 확장
babyGUESS.com 오픈

2001년 GUESS Canada 인수

2002년 GUESS 20주년 기념 'Second Decade of GUESS' 출간
GUESS Lingerie 런칭
GUESS Collection handbag, GUESS Collection swimwear 런칭

2003년 4개 부문의 ‘모비어스(Mobius) 광고상’ 상 수상.
애틀랜타(Atlanta)에 첫 번째 M Concept(GUESS의 새로운 인테리어 매뉴얼) 매장 오픈

1996년 단편 영화 “Cheat”로 7개 부문의 ‘클리오(Clio) 광고상’ 수상.
레바논 진출

1997년 괌 매장 오픈

1998년 남아프리카 진출

1999년 첫 번째 웹사이트 GUESS.com 오픈
켄터키(Kentucky)주 루이빌(Louisville)에 GUESS Distribution Center 오픈

역시 게스하면 떠오르는건 섹시한 광고

맛보기로 몇가지 올려본다.





제품보다는 광고로 기억되는 회사... 그래두 청바지 하나는 정말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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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 klein

calvin klein은 1943년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FIT(패션공과대학)를 졸업하고, 1968년 친구의 아버지로 부터 1만불을 빌어서
시작한 [캘빈클라인 Ltd]는 코트 기성복의 hit로 패션계로 데뷰했다.
처음에는 세븐즈 애비뉴 7번가의 뉴욕 호텔에 작은 Room을 꾸며서 출 발했으나,
어느날 본위트테일러 백화점의 상품부장 돈 오브라이언이 잘못 하여
엘레베이터를 6층에서 내려 우연히 캘빈클라인의 쇼룸에 들어와 버 렸다.
그의 디자인을 본 그 바이어는 그자리에서 5만달러 상당의 주문을 했고
그것은 캘빈 클라인의 성공의 계기가 되었다.
돈을 빌려준 친구는 현재의 파트너 배리 슈발츠이다.
1972년 스포츠웨어 부분을 만들고
아메리칸 캐쥬얼을 디자인의 기본적인 모토로 신봉하는 그는
유럽과 다른 단순성과 캐쥬얼한 점으로 미국의 여 성을 매혹 시켰다.
기성복에서는 최연소 코디상을 1978년 2월 까지 3번이나 수상했다.
같은 해 3월에는 화장품과 향수의 회사도 설립하고,
사진가 아빙 팬의 독특한 선전활동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었다.



캘빈 클라인은 평범한 일상복에서 격조 높은 멋을 창조하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일상복 스타일이라 일컬어지는 뉴욕 스타일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모던하고 세련된 캐주얼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절제된 세련미! 캘빈 클라인
90년대 들어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물욕적인 사치성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중시하게 된 시대적인 변화 때문이다. 다시 말해, 캘빈 클라인은 정신적인 만족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에 적합한 캐주얼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 특성은 천연섬유의 사용과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세련미에 있으며, 옷만이 아니라 향수, 시계 등 다양한 상품 라인을 추진하고 있다.



디자이너 분석품격을 강조하는 캐주얼 스타일
대담한 노출 패션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면서 강하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세련된 여성미를 연출하거나 심플한 라인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여유로운 스타일과 천연섬유의 사용으로 착용감을 중시한 캘빈 클라인은 입는 순간부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은 캐주얼한 아이템일지라도 품위를 강조할 뿐 아니라 여성의 섹시한 매력까지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편안한 활동성을 중시한 디자인
캘빈 클라인을 멋있게 입고 싶다면 셔츠와 스트레이트형 일자 바지로 편안한 활동성을 연출해 보자. 셔츠는 색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천연 소재를 사용할 경우 품격을 강조할 수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상하의를 조화시키거나 몸에 피트한 상의를 입으면 매력적인 코디가 완성된다.




미국 패션을 이끌어 온 가장 미국적인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단연 캘빈 클라인이다. 청교도 정신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극도로 장식을 배제해 깨끗한 재단과 실루엣, 다른 디자이너들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던 청바지와 속옷, 향수라는 틈새시장 개척, 섹스를 연상시키는 도발적 광고.. 시대를 꿰뚫어보는 정확한 마케팅전략과 과감한 개척 정 신으로 그는 70년대부터 남녀노소, 부자 서민 할 것 없이 어떤 디자이너도 넘보지 못할 만큼 폭넓은 고객 층을 확보하고 있다.
클라인 개인의 삶에도 미국적인 요소는 짙게 드리워 있다. 무엇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인물이다. 42년 뉴욕 브롱크스 출신.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으로 식료품 가게를 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클라인은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5살때 이미 의상 스케치를 시작했고 누이의 인형옷을 즐겨 지어줬다. 62년 뉴욕 패션기 술학교(FIT)를 졸업한 다음에는 5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집에 돌아와서 매일같이 아스피린을 먹어야 하는 생활이었 다고 클라인은 회고한다. 68년에는 어릴 적 친구 베리 슈와르츠에게서 1만달러를 지원받아 뉴욕 7번가에 자기 이름을 걸고 코트가게를 차린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는 법.. 패션전문매장 '본위트 텔러'의 바이어가 엉뚱한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가 그의 옷을 보고 한번에 5만달러 어치를 주문하게 된다. 심플한 파스텔 톤의 옷은 폭발적으로 팔려 나갔다. 73년에 는 전국 1천개 넘는 매장에 그의 옷이 깔렸다. 같은 해 기성복 사상 최 연소로 코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게 된다.




74년 그는 일대 변신을 꾀한다. 그때까지 만들던 값싼 폴리에스터 제품을 끊고 고급스럽고 비싼 자연직물 옷으로 방향을 바꿨다.
78년 시작한 청바지 사업은 그의 성가와 수입을 크게 높였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품위를 지키고 있을 때 그는 좀 더 꼭 끼는 청바지를 만들어 값을 곱절로 올려받았다. 매번 논란을 일으켰던 선정적인 광고 기법 도 이때 처음 선을 보인다. 당시 14세였던 여배우 부룩 실즈가 "나와 내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로 청바지는 첫 1주에 20만벌이 팔렸다.
82년 내놓은 속옷과 88년부터 시작한 향수 '옵세션','이터너티','CK 원' 광고에도 클라인의 전속모델 격인 케이트 모스, 랩 가수 마키 마크 의 누드가 종종 등장한다. 주로 흑백으로 아무 설명 없이 '캘빈 클라인' 이라고만 쓰는 광고는 수많은 모방자들을 낳았다.
캘빈 클라인의 명성이나 인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광고나 마케팅 전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의상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코티상을 73년부터 3차례 연달아 받았고, 패션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93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남성복, 여성복 두 분야에서 동시에 상을 따낸다.
무엇보다 그의 옷은 시대 흐름과 맥을 함께 한다는 게 강점이다. 그는 90년대 들어 더욱 도전적이고 젊은 정신을 반영하는 옷을 만든다. 이렇게 작고 짧은 옷을 누가 입느냐는 초기의 평론가들의 불평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옷을 입을 때'라고 그는 주장했다.
캘빈 클라인은 항상 '현대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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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Ten Years

가장 뉴욕적인 브랜드 하면 누구나가 떠올리는 DKNY가 10년을 맞이하였다. 얽매이지 않고, 빠르고, 에너제틱하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뉴욕.
이 모든 것을 담아 영원한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해낸 DKNY가 세계의 여러 곳을 모두 경험하고 다시 돌아왔다.
뉴욕으로, 10년의 시간을 보내고….

The First New York Store
DKNY 뉴욕 플래그쉽 스토아

뉴욕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DKNY의 첫번째 뉴욕 플래그쉽 스토아.
완전한 라이프 스타일 환경을 추구하는 엄청난 면적의 스토어는 우리가 DKNY를 통해 뉴욕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즉, DKNY의
자유로운 영혼, 지극히 현대적인 에너지, 변화의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리 자체를 매장 안으로 정확하게 옮겨놓은 듯한
유리벽과 콘트리트 바닥 탐험하고 싶은 충동, 소비자와
문화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DKNY의 뉴욕 플래그쉽 스토아의 중심부에는 남성라인,
여성 라인, 액티브, 진즈, 언더웨어, 홈 컬렉션, 주얼리,
향수, 목욕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DKNY의 세계는 물론
모든 세대를 위한 라이프 스타일을 담고 있다.

DKNY의 의상을 비롯한 제품과 문화의 믹스 또한
뉴요커의 스타일을 만들어주는 요소가 된다.


완벽한 뉴욕 경험, 그 자체



플래그쉽 스토아 안의 또 다른 세상…
전시 갤러리, 뉴욕 가이드에 관한 모든 것이 가득한 서점, 전세계의 음악을 만날 수 있는 뮤직 센터,
뉴욕 최고의 맛을 느끼게 하는 카페 등 모두가 어우러져 거대한 패션문화를 창조한다.

DKNY's Mother
Designer Donna Karan

디자이너 도나카란을 언급하지 않고 전통적인 뉴욕 스타일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그녀의 명성은 이미
높아져 있다. 도나 카란, 그녀는 미국 여성들의 모던한
유니폼이 될 정도로 인기있는 세련되고 편안한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600만 달러 규모의 거대한 패션회사 디자이너이자
사장이다.

1949년 뉴욕의 퀸즈에서 태어난 도나카란은 재단사인 아버지와 모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패션과 동떨어지지 않은 그녀의 가정환경은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패션공부를 하게 된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후 앤클라인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고, 71년 정규 디자이너가
되었다.

탁월한 재능과 성실함을 인정받은 그녀는 74년 디자이너 앤클라인의
사망 후 앤클라인의 실질적인 디자인을 모두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녀의 브랜드를 오픈한 84년 전까지 10년동안. 도나카란의 패션에 대한
접근방식은 참 개인적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디자인한다.
블랙 컬러의 광범위함을 강조한 정장, 다양한 변화가 가능한 베이직
스타일, 기능적인 작품들, 편안함을 강조한 스타일. 이 모두가 그녀가
히트시킨 독창적인 패션세계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도나카란은 그녀의 고객들을 많은 양의 다른 스타일의 옷을 사도록 현혹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꼭 필요한 몇가지 스타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제시해 고객들을 흡족시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톱모델이 되기를 희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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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은 이탈리아 브랜드 입니다.

원빈이나 이동건, 강두등이 많이 입어서 홍보된 브랜드죠.

명품이나 준명품 브랜드는 아니구요, 캐쥬얼 브랜드로서 외국에서도 인지도

높은 브랜드 입니다. 특히 청바지와 스니커즈가 국내에선 유명하죠.

윗분 디젤이 OEM이 없다고 하셨는데 OEM 없는 유명상표는 없을겁니다.

자국에서 생산하기엔 단가가 안맞기 때문에 OEM 생산방식을 안택하는 브랜드는

없습니다. 제가 아는곳만 해도 타일랜드, 차이나, 홍콩등 디젤을 OEM 생산하는

곳이 많습니다.

디젤은 몇년전부터 유행이 되왔었고 아직까지 실험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국내에 매장도 들어와 있는 상태구요..

작년까지만해도 강남 브랜드라는 말이 있었듯이 패션에 앞장서던 사람들이

많이 입고, 신고 했었죠. 특히 청바지는 리바이스에 식상한 남자분들이

독특한 디자인과 취향을 찾아 많이 입었습니다.

한국에선 명품급 가격대와 함께 얼진, 세븐진, 블루컬트, 프랭키B등과 함께

프리미엄 청바지 메이커로 자리메김 하고 있죠..

디젤은 실험성과 파격성이 강해 청바지의 오트 쿠튀르’로 불릴정도고,

브랜드 네임벨류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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