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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ㅣ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평점 :
『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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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보통 철학에 가지는 편견의 벽을 부시고, 철학을 배우는 목적이 삶의 고민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고, 유사시 대비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깊게 고민할 때 그 고민을 잘 살필 수 있는 거울, 해결할 수 있는 도구 같은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방향성임을 아주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주춤거리며 한 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의 철학자들이 교양시간에 한 번쯤은 언급되며 배웠던 이름들이지만, 그들의 사상이랄까 관련된 모든 지식과 사고가 소 귀에 경 읽기마냥 그저 흘러가기 일쑤였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쯤 던져보는 질문들에 스스로 골머리 앓다 속을 끓이는 순간이 들면 떠오르는 학문이기도 하다. 여러 학자들이 호명 되었지만 그중에 기억에 남아 다시 자세히 찾아 읽어보고 싶었던 인물은 실존에 대해 말한 키르케고르와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을 찾았던 니체 그리고 언어구조학자들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등이다.
시대별로 차례대로 읽어나가다 보니 앞선 체계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전복시키며 자신의 신념을 구축하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절망이라는 질병은 반드시 앓을 수밖에 없으며, 존재와 있다의 깊은 굴 속에서 내가 읽고 있는게 한국어가 맞는지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양한 예시가 등장하며 한 번 쓱 훑어보기가 가능한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제목은 다소 비약적이지만 실은 절대 하룻밤에 다 읽을 수 없는 철학에 대해 이렇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 또한 대단한 능력인 게 분명하다.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정리 능력에 존경을 표한다.
삶에 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아날로그 감성을 찾는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고 고된 일상이 지속될수록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찾기 위해 과거에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우리의 현실이 담긴 작품에서 위안을 얻는다. 과거에도 이와 같은 무거운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의문을 가졌지만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나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 내가 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실존이란 무엇인가. 문득문득 낯선 감각이 일 때마다 궁금하였지만 잘 해소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번 기회에 살짝 맛만 보게 된 철학에 대해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다.
1장 사색하는 사람의 기원_고대, 중세 사상
1. 소크라테스: 윤리적 주지주의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어떤 테마에 대해 대화(질문과 대답)를 해나가면 반드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옳은 것'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로고스(논리,이상,언어 등 근원적 질서)를 구사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모두가 똑같은 하나의 결론(객관적, 보편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이성을 신뢰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성 중시'입장은 이후의 유럽 철학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24쪽
'지식과 행동은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덕에 대해 논의하고 음미하는', 즉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6쪽
옳지 않은 행동을 저질렀을 때 파괴되는 내면의 존재란 아마 '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쪽
철학은 혼을 보살피는 것이며, 이는 죽음에 대한 훈련이라는 것.
2.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르케는 세계의 원리, 시원, 근거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자연현상이나 물질 등을 아르케로 정의했다. 그중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모두 포섭한 주장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32쪽
플라톤에 의하면 현상세계 안에 있는 빨간색이 사라져도 다른 빨간색이 나타나는 것은, 빨간색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현실에 떨어진 다른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빨간 색에서 좀더 사고를 확장해보자. 색뿐만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는 원형이 있다. 그 원형이 있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이 되풀히나는 이 세계에 일정한 유지가 유지돤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34쪽
이데아, 영혼의 환생, 상기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인 형이상학이란 사실 존재 전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4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에 따르자면, 주어가 되고 술어가 되지 않는 개체가 바로 실체가 된다. 현실에 있는 개체로서의 실체는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고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술어를 받아들이는 존재인 것이다. 43쪽
질료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말하며, 그 가능성이 실현된 상태를 '현실태'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의 '가능태'는 종자고, 현실태는 생장한 나무다. 이미 최고도의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을 '순수형상'이라고 하며, 이것은 '신'이라고도 불린다. 44쪽
그렇다면 세상 전체는 항상 목적을 갖고 완성하고자 하는 작용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세상은 대체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46쪽
3. 예수 그리스도, 바울
'세상은 봉사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원리란 이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대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으려는 행위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59-60쪽
4.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찰은 유명하다. 그는 시간은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여겼다. 시간 밖에 있는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신은 '영원'하다. 69쪽
물체는 자신의 무게에 따라 자기 자리로 향하려고 합니다. (…) 물체는 정해진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정해진 자리에 놓이면 안도합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 나는 사랑에 의해 어디서나 사랑이 가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 고백록 ≫ 제13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피조물은 존재 그 자체인 신에게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눈부시게 신의 완전성과 신비를 반영한 모습이다. 피조물 세계의 모든 존재자는 신의 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것을 반영하는 최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76쪽
2장 신을 파헤치는 사람들_근대 사상
5. 데카르트
절대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의심하는 일에 철저하게 매진했다. 이러한 의심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아무리 의심을 하고 또 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절대 확실한 것'이다. 85쪽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단 한 가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 나는 의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한 순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저절로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86쪽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존재한다. 나란 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지위로도 이름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다. 이 육체도 아니다. 나란 '생각하는 것' 자체, 즉 사유뿐인 존재다. 89쪽
고대철학에서 절대 진리로 통하는 필연적인 존재 신에게서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참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이성의 독립선언'으로 그 체계의 중심이 인간으로 돌아갔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실체를 신과 물체, 정신으로 한정했다. 그중 물체의 속성의 연장, 정신의 속성은 사유라고 봤다. 이로 인해 공간이 균질해지고 역학적 ·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가 창시한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이후의 과학의 특징인 자연의 수량화를 실현했다. 90쪽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신이 가진 성질로서의 불변성에서 운동량의 항존성을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신의 불변성에서 물체의 관성의 법칙 등 자연법칙을 도출해내어 물리학의 체계를 구축해나갔다. 95쪽
자기 자신의 내적 감정, 지적인 감정의 힘에 의해 우리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서 커다란 지침으로 삼기 좋다. 100쪽
6.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로지 존재할 뿐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모습이 '자연'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신인 것이다. 정신과 물체라는 두 속성은 서로 독립해 있다. 물체적인 것은 물체적인 것밖에 원인으로 가질 수 없고 정신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밖에 원인으로 가질 수 없다. 정신과 물체와의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를 찾을 수 있다. 107쪽
신은 구원을 하거나 재판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원리이고 자연 자체이다. 신은 '산출하는 자연'임과 동시에 '산출된 자연'이다. 110쪽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안심하기 좋다. 세계를 '영원한 상의 토대'로 인식하고 필연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자유였다. 112쪽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는 변하지 않고 계속 본질을 유지하려는 의지, 경향이 있다고 봤다. 이를 코나투스라고 한다. '노력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말은 사물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존재에게 코나투스는 본능적인 것이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113쪽
[정리3]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한 명료 · 분명한 관념을 형성하면, 순식간에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게 된다. - ≪에티카≫ 제5부
불행하다는 수동적인 감정은 고귀한 능동적 감정으로서의 '신에 대한 지적 사랑(신을 영원한 것으로 인식하는,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이는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신神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과의 일체감이 생기고 지복이 찾아온다. 116쪽
7. 로크, 버클리, 흄
로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간은 경험에 의해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마치 백지 상태와도 같다고 설명했다. 120쪽
제1성질은 실제로 물체 안에서 존재하지만, 제2성질은 인간만이 느기는 것이고, 마음속에만 있는 주관적인 관념이다. 122쪽
이렇게 버클리는 어떤 물체도 '지각되는'것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며, 이를 토대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정식을 완성했다. 125쪽
인상과 관념은 모든 인식의 기원은 인상에 있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흄은 '관념의 관계'에 관한 지식과 '사실'에 관한 지식으로 구별한다. '관념의 관계'에 관한 지식은 수학이고 흄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혹은 논증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고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지하고 있어 잘못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26쪽
8. 칸트
이 세상은 우리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성과 이성의 기능이 능동적으로 세계를 완성한 결과 덕분이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르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을 칸트는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칭했다. 134쪽
도덕적 자유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거나 구속되지 않고 자기의 실천생활을 스스로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존엄이다. 인간은 어디로부터랄 것도 없이 들려오는 무조건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140쪽
9. 헤겔
철학의 역할은 착각을 타파하고 더욱 커다란 사고로 고양시켜가는 방식을 제공하는 데 있다. 145쪽
변증법이란 헤겔이 감각적 확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으로, '존재 및 구체적인 현실의 운동 · 변화를 지배하는 윤리'다. 동시에 '모순과 대립, 그리고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발전하는 운동과 변화를 파악하는 사고'이기도 하다. 148쪽
세계는 착각의 총체다. 인간은 그 안에서 단련되고 힘을 늘려가도록 만들어졌다. 149쪽
모든 현상은 ① 아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은 안정된 단계(정, 즉자), ② 모순이 드러나는 단계(반, 대자) ③ 모순이 해소되고 고양되어 보존되는 단계(정이나 합, 즉자)를 거치며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151쪽
3장 인간에게 존재를 묻다_현대 사상
10. 키르케고르
헤겔 철학은 근대 사상의 종말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 니체 등 현대 사상가로부터 총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상은 근대 사상의 거인인 헤겔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했다. 162쪽
실존이라는 개념은 이미 셸링이 주장했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에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라는 뉘앙스를 추가했다. 실존이란 가능한 존재도 추상적 존재도 객관적 존재도 아닌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현실적, 구체적, 주체적인 나의 존재를 말한다. 163쪽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을 갖고 있다. 그 불안은, 인간은 자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킬지는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부자유)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166쪽
인간은 계속 스스로와 마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결정할까, 저렇게 행동할까 등으로 생각해보면서 자기라는 것에 대한 의식을 심화해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대로는 안 된다'는 초좜과 절망감이 깊어진다. 다시 말해 자기의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절망의 정도가 늘어난다. 166쪽
절망이라는 질병. 인간이기에 걸리는 질병이며, 걸리지 않는 존재는 오히려 불행할 수 있다는 게 역설적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혹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정열적으로 믿는 태도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를 올곧게 믿음으로써 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170쪽
11. 니체
과거의 철학은 진실을 추구하고 세계와 인생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해왔다. 그러나 니체에 의해 그런 것들은 '힘에의 의지'에 따른 해석이라는 것, 나아가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진리가 없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과거의 철학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무無뿐이다.
니체는 철학을 니할리즘으로 이끌었다. 니할리즘이란 목표나 의의가 상실된 상태를 말한다. 인류가 오래도록 믿어온 최고의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무목적 ·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체는 이처럼 최고의 가치가 상실된 상태를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182쪽
어떤 일에도 등 돌리지 않고 견디며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사랑하는 강한 인간. 이러한 '힘에의 의지'순수하게 발휘해 강인하게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초인'이다. 니체에 의하면 '초인'의 사상은 니할리즘을 극복하고 인생의 위대한 긍정으로 향하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183쪽
괴로울 때도 변명을 하거나 순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극한 상황으로 쫓기는 심정이 된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다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괴로움을 지그시 참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을 괴로운 상황으로 몰아치는 것이, 즉 자신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86쪽
12.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인격이 '에스(ES, 이드Id와 같음)' '자아' '초자아'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에스'는 무의식이고 본능적인 에너지의 저장고이며 쾌락원칙에 따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성질을 가졌다. 이를 억압하는 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자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적응반응 가운데 하나로, 본래 자아의 힘으로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통해 욕구를 채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192쪽
13. 후설, 하이데거
현상학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에 두는 철학으로 현상의 구조를 통해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창시자인 후설은 철학은 주관과 상대성 대신 수학적 법칙과 과학적 논리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4쪽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 자체와는 구별된다. 존재자는 세계 안에 각각 존재하는 것이며 '사물이 어떻게 존재할까(존재론적 물음)'는 다르다. 213쪽
하이데거는 존재가 작용하는 장이 되고 있는 인간을 두고 '현존재'라 불렀다. '현존재(인간)'가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면 존재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214쪽
하이데거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대상(세계)에 과학적 인식을 매개로 하여 외부로부터 파고든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이미 자신이 일정한 방식으로 세계 안에 있음을 기정사실로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봤다. 216쪽
하이데거는 시간을 살아가는 현존재(인간)가 미래에는 이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궁극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 가능성의 끝은 죽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죽음은 확실하며, 먼저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나보다 앞서 있는' 가능성이다. 222쪽
14.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자신이란 항상 자신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슬퍼해야 할 일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어떠한' 존재라고 정해진 게 아니라 이 세계에 내던져져 스스로를 만든다고 봤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표현했다. 228쪽
인간관계란 이렇게 서로에게 '시선'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주체끼리에 의한 불가피한 상극의 상태이다. 229쪽
인간의 행위는 그것과 행함과 동시에 즉시 타자의 음미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인간관계가 자유로운 주체끼리의 연결인 이상, '시선'이라는 둘 사이의 공간에서 타자로부터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32쪽
메를로퐁티는 내가 살 수 있는, 지각한 상태의 현실 세계를 '현상야'라고 불렀다. '현상야'를 살아가는 주체는 '자기의 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몸이야말로 다른 누구와도 대체시킬 수 없는 '실존'이며,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자아의 표현'이로 봤다. 234쪽
15.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은 각각의 생활 가운데 일정한 규칙을 토대로 언어 게임을 하고, 언어의 의미는 그 문장이 사용되는 문맥이나 그 문장이 속한 게임 규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언어의 의미는 사물과의 대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촉발시킨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의 철학 작업은 언어의 용법이 야기시킨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고, 그 열쇠는 일상 언어의 분석에 있다. 251쪽
16.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소쉬르가 언어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세 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시니피앙은 음성의 청각적인 영상으로서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시니피에는 언어 기호인 시뉴가 그 내부에 지니는 개념(의미)을 의미한다. 256쪽
물건과 일을 말을 통해 구별하는 것은 곧 언어에 의해 현실세계를 구분 짓는(분절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구분지어진 세계에 말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59쪽
세계는 언어였다. 언어가 늘면 세계가 확장된다. 그렇다면 언어와 언어의 관계를 분석하면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260쪽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도구이며,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구조주의를 활용하는 것이 의미있는 이유다. 265쪽
17. 마르크스, 알튀세르
이처럼 노동이란 본래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운 자기실현의 수단이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것이 바로 노동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노동은 괴로운 것,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으로 치부하는 걸까? 272쪽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사회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생산관계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존재 방식인 토대가 되고 그 위에 계층에는 법률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상부구조로서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즉 먼저 경제적 토대가 있어야 비로소 그에 맞는 정치 · 법률 · 문화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77쪽
우리는 사회가 인간이라는 주체의 총체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의사를 초월한 구조가 지닌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쟁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개인과는 전혀 관계없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는 주체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조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282쪽
18. 데리다, 들뢰즈
지금까지는 대화언어,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 내면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며 예크리튀르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실은 에크리튀르가 어떤 언어들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288쪽
'지금 여기'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서 떠나 확산되어 가는 에크리튀르를 내포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두고 데리다는 '다르다'와 '연기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differer을 이용하여 차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연'으로서의 나는 '지금 여기'의 구속에서 해방됨으로써 무거운 자의식이나 이기적인 사고로부터 해방된다. 290쪽
쓰인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차연'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무방하다. 오히려 그것이 바로 텍스트를 실천적으로 읽는 행위일 것이다. 이처럼 탈구축이란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대상의 내면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그 내부부터 스스로 파괴시키고 거기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291쪽
서양 철학은 그리스 이후로 자기동일적인 존재(이데아, 신, 이성, 진리 등)를 강조해왔다. 들뢰즈는 자기동일성은 배제의 논리로서 기능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성의 폭력이라고 설명한다. 292쪽
애당초 차별의식이란 이러한 이데아적 발상에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집단 따돌림 등의 가장 밑바닥에는 서로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본래 있지도 않은 실체를 절대시하는 왜곡된 사고법이 있다. 293쪽
우리의 경제를 구성하는 자본 · 화폐 · 상품 · 노동은 정치적, 법적, 문화적인 모든 요인을 포함하며 모든 것이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화폐는 그 욕망을 교환 · 순환시키는 장치다. 295쪽
자본주의는 욕망이 사상으로 구현된 것이다. 그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는 그 점을 절감하고 있다. 보고 싶은, 먹고 싶은, 채우고 싶은 다양한 욕망의 수요에 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형성된다. 예컨대 편의점은 온갖 욕망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견본 시장이다. 295쪽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스키조에 머물면서 파라노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그들은 노마드라 불렀다. 297-298쪽
노마드는 자기동일적인 것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방기한다. 그들은 닫힌 것, 굳어진 것을 잇달아 파괴하고 '도주'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 298쪽
19. 제임스, 듀이, 로티
프래그머티즘의 사고법은 실제적인 결과와 총계가 모든 일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딱딱하다'라는 것은 다른 물건으로 할퀴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무겁다'라는 것은 받쳐주지 않으면 낙하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이처럼 개념의 의미 내용을 대상이 초래하는 실제 결과로 생각하고자 하는 원칙을 프래그머티즘의 준칙(실용주의의 격률)이라고 한다. 304-305쪽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관계없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 자체가 진실이다. '회사는 지겨운 곳'이라는 당신의 생각은 진리다. 그리고 '학교는 지겨운 곳'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김없는 진리다. 당신이 세상의 모습을 창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부정적인 발상이라면 당신이라는 신은 스스로 시시한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307쪽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