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로드 (코맥 매카시)

영화- 더 로드 (존 힐코트) 

 

           

아버지들은 왜 매일 살아남으려 할까

 

 -코맥 매카시는 한 인터뷰에서 <로드>를 쓰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는 늦둥이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여행 중의 어느 날 밤, 매카시는 상상 혹은 환상을 접했다고 한다. 아들이 곤히 자고 있는 가운데, 창밖이 온통 불타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는 아들과 창밖의 끝없는 화염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했고, 그 장면의 기억과 느낌을 바탕으로 소설 <로드>를 썼다. 

  <로드>의 세계는 지옥 그 자체다. 인간은 물론이고 생물 자체를 구경하기가 힘든 잿덩어리 땅 뿐이다. 미 대륙 전체를 날려버린 대화재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소설은 말해주지 않는다. 하긴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매일매일을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재앙의 기원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원하는 건 마실 수 있는 물과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은폐된 공간 뿐이다. 이 강제된 소박함 사이에서 탐욕은 금방 눈에 띈다. 사람을 사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여러모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온갖 쓸만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데다 식욕 성욕을 모두 채울 수 있다. 슬프게도 이 '대재앙 이후'를 다룬 소설 속의 세계는 지금 여기와 무척 닮아 있다.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사람이 살겠다고 주장하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하물며 가장 현실적인 방법들을 택한다는데. 

  그리고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금껏 해온 일들 중에 가장 용기를 낸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삶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살아야 할 이유란 게 있는가? 그는 인간이 '굳이' 생존을 유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가 이렇게 회의적인 인간이 된 동기로는 대재앙을, 그리고 부인의 자살과도 같은 가출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그는 대재앙 이전에는 행복했는가? 그는 모범적인 중산층 남자였는가? 아무도 모른다. 매카시는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코맥 매카시 자신일 '아버지'의 앞에 펼쳐진 지옥도는 그의 내면이 예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허무가 표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 폐허는 소설가의 내면이므로 <로드>는 대종말을 다룬 SF가 아니다. 이 폐허는 고도를 기다리던 두 남자가 죽어 파묻힌 숲이다. 부조리 연극의 배경이고 아버지 자신의 내면이며, 그가 어른이 된 이후 줄곧 살아왔던 바로 그 세계다. 그는 자살에 대해 생각한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예전에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들은 그의 짐이다. 너무 어려서 아버지인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 아들은 추호도 쓸모없는 완전한 짐이라서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운다. 그가 아니면 아들은 처참하게 죽어갈 테니까. 그는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이 열성이 어디서 오는지는 그역시 모르며, 심지어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 무기력한 존재는 그의 신비다. 그는 오직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살아남는다. 그가 윤리를 지키는 이유 역시 아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의 모든 것이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은 거의 무정부적인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이고 자기보호적인 인간이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다 격렬한 폭력과 거대한 허무를 동반한다. 그 허무가 이 세계와 절묘하게 겹쳐지면서 그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 <로드>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소설 전체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로드>가 정말로 그의 고백이건, 아니면 어떤 상징이건간에 맥카시는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다. 비록 그 희망이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그 희망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원서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son 대신에 boy라고 불렀다) 그는 그 희망을 신뢰한다. 이 결론은 슬프다. 그러나 이 슬픔이야말로 코맥 매카시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대한의 것이다.

  영화는 원작을 옮겨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과연 재로 가득찬 풍경은 재난 영화를 자주 만든 헐리우드의 위력이 느껴진다. 비고 모텐슨의 연기도 좋았다. 때에 절은 잠바와 꾀죄죄한 수염 속에서 빛나는 눈빛만으로도 그의 열성이 느껴진다. 그도 아들이 있어서일까. 어쨌든, 좋은 비주얼과 좋은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원작과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영화에서는 과거 회상 장면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재난 이전에는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무너진 현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아내를 도울 수 없었던 무기력함이 그를 무표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원래 친절하고 강직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아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코맥 매카시가 아니다. 영화가 원작의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서 적절한 연출과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는데도 어딘가 가볍게 느껴진다면,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영화 역시 지옥을 헤쳐가는 부자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원래부터 세계를 믿지 않던 남자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결국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누가 어울릴까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본 <스토커> 생각이 났다. 이미 죽어버렸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라면 그 지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깊이 잠겨들듯이.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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