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안소니 밍겔라)
내가 사막이 되면, 내 안에 사막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안소니 밍겔라는 원작이 좋을수록 그에 비례한 좋은 영화를 만드는 재미난 특성을 가진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의 '퀄리티'를 가늠한다면 보통은 들어맞는다. 그리고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안소니 밍겔라의 최고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밍겔라 특유의 감성적인 장점과 더불어 평소의 그답지 않은 특징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무척 집중했던 이 감독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는 핸들을 반쯤 놓아 버린다. 등장인물들의 전후사정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삼각관계에 빠진 사람들은 힘싸움을 벌이지만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도 않는다. 미스터리가 있고 로맨스가 있는 시대극임에도 밍겔라 감독은 스토리에 압력을 넣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호소력있는 영화 캐릭터 대신에 눈앞에 있는 인간의 말과 몸짓밖에 볼 수 없다. 이 영화는 그 유명세에 비하면 확실히 불친절한 축에 속한다. 그러나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이런 불친절한 영화들에 다소 익숙치 않은 사람들마저 반하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랄프 파인즈와 월렘 데포는 사막 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사에 버금가는 무게를 전달한다. 랄프 파인즈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길 때, 관객들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이 남자의 과거 속으로 초대받는다. 월렘 데포가 누군가를 주시할 때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다. 이 남자들은 욕망하는 듯, 미워하는 듯, 사랑하는 듯 싶지만 정확히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침묵함으로써 인물이 아닌 오브제가 되고, 그대로 사막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거꾸로 사막을 자신의 내면 속으로 불러온다. 고독을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이다. 그리고 이 침묵들 속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종종 새처럼 날아오른다. 한번은 정말로 공중에 떠오르기도 한다...
원작소설은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한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고 나면 왜 영화가 그토록 침묵했는지 알 수 있다.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신기루의 폭풍이다. 시점이 변하고 주체가 바뀐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 싶다가 갑자기 사막의 풍경이 펼쳐진다. 누군가의 과거가 플래시백처럼 번쩍 나타났다가 꿈처럼 끝을 흐리며 사라지기도 한다. 실체가 아니라 영상 혹은 흔적들이다. 배경과 인간,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섞여드는(그래서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끝내 이루어지거나 완결되는 것은 없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잃어버렸음을 알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망 역시 거의 품지 않는다. 절망도 희망도 이들을 비껴 지나가고, 다시 남은 것은 사막의 풍경이다. 모든 감정과 욕망을 흡수하고도 꿈쩍하지 않는 이 세계의 무자비한 황홀함. 알마시가 가지고 다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자꾸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이 신기루 같은 현재들이 쌓여서 저렇게 단단하고 굳건한 역사가 발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질문에 함께하기 위해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기루의 한 형태는 아닌지를.
아참, 저 혼란스러운 신기루 폭풍은 정말로 아름답다.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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