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꼬리에 오늘의 머리를 이어 붙이며, 저는 별일 없이 삽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만나지 못한 날이 길고 깁니다. 혹시 아직 밤마다 시 한 편 읽고 계신다면, 우리 사이에 재처럼 허공처럼 쌓인 그 시들로 꽃 한 송이 피었겠습니다. 집 한 채 지었겠습니다.  

 

            오늘은 내내 젖은 꿈을 되짚듯 어린 날의 일기를 뒤적였습니다. 듣지도 못하실 당신의 이름 어쩌면 이리도 많이 불렀을까요. 어떤 날은 일곱 번, 다른 날은 열한 번, 또 다른 어떤 날은 이름 하나로 하루를 온통 채우며...... 저의 이름이 모자란 것은 제가 모자랐기 때문일까요. 당신의 이름이 넘치는 것은 당신이 넘쳤기 때문일까요. 여전히 일기에 채울 것 없는 이름을 안고도, 저는 별일 없이 삽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정말 궁금합니다.

 

            기억하십니까, 폴 오스터의 『공중곡예사』.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옮기던 어느 공원에서 당신이 제게 주셨던 그 책을 찾기 위해 먼지 앉은 서가를 한참 헤집었습니다. 찢어버린 맨 앞장에 적혀 있었을 당신의 글씨가 이제 더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의 어느 한 구절을 읽어 주던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는 아직도 가끔 떠오릅니다. 왜 이 책을 제게 주셨는지 이제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 책을 왜 제게 주셨는지는 아직도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못했습니다. 그 때 당신은 아셨을까요. 제가 무엇을 잊고 무엇은 잊지 못할 것인지를. 그 때 저는 알았을까요. 어떤 것은 잊지 않으려 해도 잊히고, 어떤 것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을 것임을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을까요. 아니면 모든 것을 알았을까요. 우리는 함께 많은 책을 읽었고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서 많은 책을 읽고 있겠지만, 마지막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를까요. 아니면 끝내 모든 것을 알게 될까요. 

                

            저는 별일 없이 삽니다. 그 때 우리가 그러했듯 누군가를 만나 우리가 되었고, 그 때 우리가 그러려 했듯 화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려 하고, 그 때 우리가 그러했듯 사랑을 옮겨적으며 별일 없이 삽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잘 지내시는지요. 제가 잘 지내는 것이 한때는 당신께 아픔이었을 것임을 짐작하지만, 우리 사이에 강처럼 구름처럼 쌓인 시들로 만든 달력이 한참을 넘어갔음에 기대어 오늘은 감히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아직도 많이 읽으십니까. 여전히 많이 걸으십니까. 가끔씩 혼자 노래를 부르십니까. 그때 불렀던 노래를 요즘도 부르십니까. 기타는, 영어는, 귀여운 그림들과 손수 만드는 초콜릿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잘 지내시는지요. 내일의 당신을 궁금해할 수 없으며 궁금해하지 않을 오늘의 제가 당신의 오늘을 궁금해하는 것이 만약 당신께 무해하다면, 여쭙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사랑해야 할 날들에 사랑하기를 게을리 한 대가가 작지 않군. 대신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공존은 상실을 치유하고, 할 일을 늘려주고, 새로운 희망과 재생의 힘을 선물해주지. 그러나 상실의 극복은 바쁜 일이나 웃음으로는 절대 성취되지 않아. 앞으로도 내 인생은 당신에 대한 회한과 배덕의 자책감으로 지배되겠지.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다 살아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_니시카와 미와, 『아주 긴 변명』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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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6-14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 촉촉해 집니다. ^^

syo 2017-06-14 22:40   좋아요 2 | URL
책 읽고 퐁퐁 울었더니 그만 감정이 말콩말콩해진지라.....

내일 날 밝고 깨끗한 정신으로 다시 보면 반드시 이불킥입니다

다락방 2017-06-15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 이런 감상이 나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syo 2017-06-15 06:50   좋아요 0 | URL
으.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고 이불 팡팡 찼어요.

책 때문인지, 아니면 뒤끝이 말끔하지 못한 연애를 한 제 경험 때문인지, 감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블랙겟타 2017-06-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달 전 극장에서 영화로 봤었는데 보고 나서도 내용이 생각이 많이 났었거든요. 이게 사실 소설이 원작이었군요? 다음기회엔 소설로 읽어봐야겠네요. syo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감상에 젖었네요. ㅜ

syo 2017-06-15 10:28   좋아요 0 | URL
그 영화감독이 이 소설도 쓴 걸로 알고 있어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전 블랙겟타님 댓글을 보고 나니 어쩐지 영화도 보고싶어졌어요 ㅎㅎㅎ

쇼코 2017-08-0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거리는 고사하고 장르조차 모르는 책의 리뷰를 읽고 감정이 동요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때는 활자를 잘 다루는 이들을 불신하기도 했었는데, 표현할 내면이 거칠고 황폐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고, 좋은 내면을 가지려면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던 유시민 님의 글을 읽고 생각을 고쳐 먹었어요. 근데 고쳐먹길 잘 한 것 같습니다.^^

syo 2017-08-05 22:00   좋아요 0 | URL
유시민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은 제 글이 아니라 쇼코님의 댓글로 증명이 되는것 같은데요?

이렇게 자꾸 원글이 부끄러울만큼 고급진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고 곤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