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이산하 지음 / 양철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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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즐거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양철북에서 나온 양철북을 받았다고 하면 어떤 양철북을 받은 것인지 참 헷갈리는 그런 책입니다. 이산하 시인의 성장소설입니다. 2003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양철북 출판사에서 다시 펴낸 것이라고 합니다.


데미안보다 더 데미안스러운 책입니다. 경기도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란 것이 컴플렉스인 저는 사투리를 따라잡기 위해 한 문장을 두어번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화 글에 ‘말'이 살아있어 쉽게 읽힙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읽는 다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거나 허구가 아니거나 그 절절한 현실감에 마음이 시리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이의 삶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의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고요. 이산하 시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찾아보고, 인터뷰도 차근차근 읽어보며 책을 함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많은 인물들이 그와 어떤 연결점을 갖고 있는지도 찾아보았습니다. 그가 어린시절에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람들과 만났는지 조금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고전들과 그것을 읽어낸 철북이(또는 이산하 시인)의 마음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달걀은 어떻게 깨어지는가'에 나오는 법운 스님의 편지와, 후기는 그냥 읽어 넘기기 힘들었습니다. 그 필체가 담담해서 더 그랬습니다. 누구든, 읽고 나면 '나는 언제 알을 깨고 나왔는가 혹은 나오게 될 것인가’ 질문하게 될 글입니다. 계속 여운이 남네요. 저라도 욕심내어 다시 펴내고 싶은 책입니다. 제가 조금 더 나이 많았다면(한 스무 살 정도?) 우리 시대의 데미안이라고, 소개하고 싶었을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밝지도 탁하지도 않은 책 표지의 색과 그림, 그리고 장 마다 그려진 나무 그림도 의미있고 좋습니다.


얼마전, 노트북을 집에 두고왔다며 집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신규 선생님을 보며 아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존댓말로 썼습니다. 하하

일요일마다 동네 뒷산 꼭대기로 올라가 마른풀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고는 하염없이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이 추운 겨울, 모두 행복한데 철북이 혼자만 불행한 것 같았다.아니, 모든 불행을 철북이 혼자 뒤집어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도 책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2학년 때 도서관에서 읽었던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들만 자꾸 떠올랐다. 그것도 이상하게 소설의 마지막 구절들이었다. 그의 소설은 이렇게 끝나는 게 많다.
"그리고 죽었다."
그런 철북이에게 유일한 위안은 밤마다 휴대용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수 김정호의 노래들이었다. 늦가을의 무덤 위로 흩날리는 가랑잎 같은 그의 노래들은 아픈 자는 더욱 아플 것이고, 슬픈 자는 더욱 슬플 것이라는 메시지로 들려 좋았다. 그랬다. 아픔과 슬픔은 더 큰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위안받는 것이지, 적당히 가불한 희망으로부터 위안받는 것은 아니었다. 127

앞으로 넌 펜으로 힘껏 북을 쳐라. 양철북, 이름대로 그게 니 팔자다. 단, 글을 쓸 때는 항상 연필을 뾰족하게 갂아서 쓰고. 228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정의로운 창이 되고, 구부리면 밭을 일구는 호미가 되고,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는 대나무처럼 네 몸과 마음을 항상 걸림이 없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네가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절대고독의 중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수도자요, 작가가 아니겠느냐.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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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 창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 해결 프로젝트
에릭 메이젤 지음, 안종설 옮김 / 심플라이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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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택배가 하나 와 있었다. yes24에서 배달된 책인데, 나는 주로 교보문고를 이용하니까 '무슨 책이지?'라는 생각보다 '누구지?'가 먼저 떠올랐다. 물론 나는 궁굼증을 이기지 못하고 yse24에 전화를 걸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누가 배송했는지 알려면 그쪽으로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_= 하아. 철저한 나라가 되었구나.


그래서 짐작만 하고 있는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각 잡고 리뷰를.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채찍이군요.)


자기계발서 류의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어쩐지 꼭 뭔가 해답을 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의 제목에 혹 해서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e-book으로 몇 권 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별로 읽지 않았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한 제목을 붙이는데에만 공을 들인 것이군! 하는 생각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겉봉에도 '자기계발'이라고 써있길래 '누구지?' 다음에는 '허억!! 누가 자기계발서를 보냈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제목과 목차를 보고 '음, 혹시?'하고 짐작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각종 문제로 고민하는 예술가들이(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 화가, 배우, 연출가 등 직업도 다양하다) 고민을 털어놓고현실적이고도 상황을 저격하는 짧은 답변을 보내주면, 그걸 보고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내용을 다시 보내는 형식이다. 저자가 보내는 답변은 짧지만 단호하다. 


'정말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계시는군요. ... 문장 두어 개로 그 소설 내용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독자층을 겨냥한 작품인가요?'라고 직접적으로 질문자의 횡설수설을 지적하기도 하고, '잘 아시겠지만 당신이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당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라고 질문자를 다독이고 조언하기도 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생계와 창작의 고통 사이에서 그래도 무언가 만들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다는 생각에 절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구조에 맨몸으로 맞서며 생활과 예술을 일구는 사람들의 투쟁이 감동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그들이 말하는 자신의 문제의 여러 부분은 추천사에 있는 말처럼 '핑계'다. 차분히 앉아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만 실천하면 된다. 그런데 다들 너무 바쁘고 힘들고 그러니까 생각은 못하겠고 누가 옆에서 코칭해 주기를 원한다. 아, 그래서 참 답답하기도, 나약해 보이기도.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준 것은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온전히 시간을 내어 무언가 쓰라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안되는 것을 누구나 갖고 있다(아, 설마 나만?) 그걸 해결하는 방법도 알고 있지만 안한다는 것은 역시 핑계라는 결론과 함께. 예술에 관심은 없지만 자신의 생활이 엉망이라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누군가에게도, 어울릴 책이다.

나에게는 남모를 두려움이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덫에 구속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남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두려움,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한 세상에 ‘소음`을 하나 더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두려움, 이미 퇴색해버린 꿈에 집착하는 두려움, 작가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두려움,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권태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왜 그런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다시 글을 쓰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아요. 글을 쓰려는 충동은 있지만 일기나 기사, 고객에게 보내는 전자우편을 쓸 떄 말고는 애써 그 충동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이 뒤집히곤 하죠. 결국은 그것이 온갖 실존적 절망으로까지 이어지고 맙니다. 057

어떤 소설은 작가가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또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작가는 몇 년에 걸쳐 다섯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아홉 걸음을 후진해 원점으로 돌아오는 롤러코스터를 수없이 경험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런 사태가 생길 줄 알았다면, 그래도 그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겼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066

작품 만드는 과정을 즐기는 것을 최우선 목표에 올려두셨으니, 우선 질문부터 한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작품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길 필요가 있나요?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굉장히 어렵거나 새롭거나 까다로운 작품을 만든다고 하면, 그럴 경우에도 그 과정을 즐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럽기는 할 것이고 일단 완성이 되어야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107

손가락을 한 버 탁 튕겨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리 전문가라 해도 인간의 심리적 복잡성에서 나온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 154

얼굴 비추기. 밀어붙이기. 발등에 떨어진 일 처리하기. 버티기. 노력하기. 일하기. 떠나지 않기. 당신이 하지 않으면 그 일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림, 음악, 소설은 모두 빵 덩어리 혹은 마천루와 같다. 누군가 만들지 않으면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이 말이 틀렸음을 입증할 방법이 있는가? 그런데도 수많은 예술가와 예술가 지망생들은 반죽도 하지 않은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기만을 기다린다. 243

한때 나는 온갖 종류의 작법과 창의성을 다룬 책들에 빠진 중독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코앞에 닥친 마감과 사시사철 각각의 이유로 골골대는 몸과 바닥을 드러낸 통장잔고와 매일이 새로운 결혼생활을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기 떄문이다.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사연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솔직히 말하자.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일 뿐이다. 중요한 건 행동으로 옮기도록 만드는 것이고, 이 책은 바로 그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나는 추천사를 쓰기 위해 이 책을 읽다가 계획에도 없던 2주간의 계획표를 짜게 됐다. 이제야 이 분야와 관련된 짧이 않은 내 독서 이력에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다. 나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추천사 | 북칼럼니스트 금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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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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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미국의 현대사 외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스승을 찾는 다는 것의 의미, 성장, 지식과 행동, 부재를 메우려는 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 돈과 명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 예술과 글쓰기의 위치를 묻는 제사, 그리고 대가를 치르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


특히 스승을 찾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책이다. 스승을 찾아가는가 스승이 내 앞에 나타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밑줄이 많다.


“예술이 무기일까?” 그가 내게 물었다. 그 '무기'라는 말은 참으로 경멸적이었고, 그 자체가 무기였다. “예술은 모든 것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예술이 좋은 것들의 옹호자야? 이걸 다 누구한테 배웠지? 예술이 슬로건이라고 누구한테 배웠어? 누가 너한테 예술은 '민중'을 위한 거라고 가르친거야? 예술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관심을 끌만한 예술은 나우지 않아. 심각한 작품을 쓰려는 동기가 뭐지, 주커먼 군? 물가 억제에 반대하는 적을 무력화시키려고? 심각한 작품을 쓰는 동기는 심각한 작품을 쓰는 것 그 자체야. 사회에 반항하고 싶어? 그렇다면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잘 쓰는거야. 잃어버린 대의에 헌신하고 싶어?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을 위해 싸우지 마. 그들은 잘해나갈 테니까. 플리머스 같은 항구에는 노동자들이 차고 넘칠 거야. 노동자는 우리 모두를 정복할 거고, 그들의 어리석음에서 이 속물적인 나라의 문화적 운명을 가득 채울 구정물이 솓아져나올 거야. 이 나라에 곧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보다 훨씬 더 끔직한 게 생겨날 거야. 바로 노동자와 농민의 문화지. 잃어버린 대의를 위해 싸우고 싶나? 그렇다면 말을 위해 싸워. 거창한 말이 아니라, 감격적인 말이 아니라, 이걸 찬성하고 저걸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짓밟히고 억압다는ㄴ 자들의 편에 선 훌륭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걸 존경스러운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광고하는 말이 아니라, 형벌처럼 미국에서 살아가는 교양있는 소수에게 내가 말의 편이라는 걸 알리는 말을 위해 싸우라고! 네가 쓴 이 각본은 쓰레기야. 끔직해. 정말 화가 나. 조악하고, 유치하고, 멍청하고, 선동만 있는 헛소리야. 말로 세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어. 너의 도덕적 악취를 하늘 끝까지 피워올리고 있어. 예술가의 미덕을 입증하려는 욕망보다 예술에 더 사악한 영향을 끼치는 건 없어. 이상주의의 끔찍한 유혹이라고! 넌 너의 이상주의, 너의 미덕을 완전히 정복해야 할 뿐 아니라 너의 사악함도 정복해야 해. 애초에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 것, 너의 분노, 너의 정치적 동기, 너의 슬픔, 너의 사랑, 이 모든 걸 미적으로 정복해야 하는 거야! 처음부터 설교하고 자기 입장을 내세우면, 처음부터 우월한 관점을 들이대면 예술가로서 무가치하고 한심한 존재가 되고 말아. 왜 이런 선언문을 쓰지? 주위를 둘러보고 '충격'받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감동'을 먹엇?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너무 수비게 포기하고 거짓 느낌을 꾸며내. 무엇이든 적석에서 느끼고 싶어하는데, '충격'과 '감동'이 가장 느끼기 쉬운거야. 가장 멍청하기도 하고. 드문 경우가 있긴 하지만, 주커먼 군, 충격은 항상 가짜야. 선언문. 예술은 절대 선운문의 수단이 아냐! 너의 사랑스러운 쓰레기를 여기서 치워주면 고맙겠군.” 366


아버지라면 아들의 행동을 걱정해야 하고, 자신의 꼬마 톰 페인을 사회화 하는 일을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남자의 세계에 발을 들인 꼬마 톰 페인을 아버지가 여전히 아이처럼 교육시킨다면, 아버지는 그걸로 끝이다. 물론 아버지는 여전히 예상치 못한 구덩이를 걱정할 테고, 만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잘못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아버지로서는 끝난 것이다. 꼬마 톰 페인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없는 셈 치고, 아버지를 배신하고 과감하게 뛰쳐나가 인생의 첫번째 구덩이에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 그다음부터는 진정한 삶의 일관성을 실천하며 일생 동안 한 구덩이에서 다른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마침내, 딱히 추천할 만한 다른 이유가 없어도 어쨌든 빠질 수밖에 없는 최후의 구덩이인 무덤으로 걸어들어간다. 60

자신의 변절을 그가 어떻게 설명했느냐고? "그땐 똥인지 오줌인지 구별을 못했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던 거야." 그러고는 날 보고 얘기했다. "꼬마야, 저 친구 얘긴 듣지마라. 넌 미국에 살고있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이자 가장 위대한 체제에서. 물론 똥통에 빠지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소련이라고 똥통에 빠지는 사람이 없을까? 저 친구는 자본주의가 먹고 먹히는 체제라고 말할 거야. 그런데 삶이란게 먹고 먹히는 체제가 아니면 뭐겠니? 이게 삶과 어울리는 체제야. 164

그러니까 잘 돌아가지. 봐라, 공산주의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다 옳은 얘기고, 자본가가 공산주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다 옳은 얘기야. 하지만 이런 차이가 있어. 우리 체제는 인간은 다 이기적이라는 진실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잘 돌아가고, 저쪽 체제는 인간은 다 형제라는 동화같은 믿음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저렇게 개판인 거야. 그 미친 동화를 믿게 만들려고 사람들을 잡아다 시베리아로 보내고, 그 형제애란걸 믿게 만들려고 사람들을 잡아다 시베리아로 보내고, 그 형제애란 걸 믿게 만들려고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거나 총우로 쏴 죽여.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미국과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동화를 계속 믿어. 물론 한동안은 모를 수도 있어. 하지만 모를 게 또 뭐 있겠니? 인간이 어떤지 알면 다 아는거지. 너도 이도 ㅇ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 거다. 네가 어리다면 그렇게 믿어도 괜찮아 …" 165

공산주의가 문제라고. 사만 명, 육만 명, 십만 명 밖에 안되는 공산주의자가 문제라고. 그들이 인구가 일억 오천만인 이 나라를 전복시킬 거라고. 내가 바본 줄 아오? 이 빌어먹을 나라가 무엇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지 얘기해 볼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노동자에 대한 차별 때문이오. 우리나라를 망치는 건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우리나라는 인간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차별 때문에 저절로 망해가는 거야! 216

로절린드가 노게라 가문의 어마어마한 부에 대해 열정적이고 순수하게, 자부심과 성취감에 도취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았다. 하지만 담배농장에서 일하는 쿠바의 농부들은 어떤가요? 가문의 결혼식을 위해 손님들을 실질적으로 뉴욕에서 아바나까지 실어나르는 그 노동자들은? 아름다운 담배농장에서 그들은 어떤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나요? 핼러데이 양, 당신네 담배 노동자들 사이에 만연한 질병과 영양실조와 무지는 어떤가요? 당신의 스페인풍 결혼식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을 추잡하게 낭비하는 대신 노게라 집안사람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농토의 대가로 쿠바 민중에게 변상해주는 건 어떨까요? 238

네이선, 지적인 대화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구나. 나는 많은 걸 읽는데, 내가 독서에서 얻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자극을 받아 모양을 갖춘다고 믿는단다. 너는 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야. 너처럼 젊은 친구를 알게 되어 조금이나마 미래를 덜 비관적으로 느끼게 되는구나. 1949년 4월, 아이라 261

가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지금까지 내가 귀기울여 들어온 하나의 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사법은 때로 독창적이고, 때로 즐겁고, 때로 허풍이고(익명의 이야기들), 때로 정신나간 듯 보이고, 때로 사실 그대로이고, 때로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기억이 미치는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항상 이야기를 들어왔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하지 말아야 할지,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존경해야 할지, 무엇을 포용하고 언제 도망쳐야 할지, 무엇이 황호라고, 무엇이 불길하고, 무엇이 쓰레기인지, 그러고 어떻게 영혼을 순수하게 지켜야 할지에 대해. 나에게 얘기할 땐 어느 누구도 벽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마 여러 해 동안 내가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디닌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내 인생의 책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졌다. 내가 어떻게 지금의 이자리까지 왔는지 스스로 묻다보면, 놀라운 답이 나를 기다린다. 바로 `듣기`였다. 373

원래 그런거라네. 인간의 비극이란 게, 일단 완성되고 나면 언론인들한테 넘어가 오락거리로 전락하지. 그건 그 말도 안되는 미친 이야기들이 우리의 문턱을 넘어 쏟아져들어오고, 신문의 어설프고 의심스러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야. 난 매카시의 시대가 전후에 가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민주공화국을 통합시키는 이념으로 끌어올려진 가십의 승리를 선포한 시대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가십을 믿노라. 가십이 복음이고 국교가 됐지. 매카시즘은 결코 진지한 정치의 출발점이 아니라, 대중에게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진지한 모든 것을 오락거리로 만드는 행위의 출발점이었네. 지금은 도처에 만연한 미국인의 몰지각함을 전후에 처음으로 활짝 꽃피운 게 매카시즘이었어. 473

난 사람이 살인 같은 죄를 저지르면, 도스토옙스키의 진실 같은 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네. 평생 책을 가까이하고 영어를 가르친 교사로서, 아이라의 마음에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심리적 손상이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안그렇겠나?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이고 나서 이십 년 동안 멀쩡하게 지내던가? 라슼ㄹ리니코프 같은 마음을 가진 냉혹한 살인자는 평생 자신의 냉혹함을 돌이켜보며 살아. 하지만 아이라는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멀었어. 아이라는 행동하는 기계였지. 라스콜리니코프의 범되는 그의 행동을 왜곡했지만… 아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렀다네. 아이라의 참회, 자신의 인생을 되살려보려는 처절한 노력, 똑바로 서기 위한 안간힘. 그의 방식은 완전히 달랐지. 501

"자네가 궁굼할까봐 하는 말인데, 나 자신한테 당한 걸세. 그 모든 도의를 고집한 나 자신한테. 난 동생을 배신할 수 없었고, 내 교육을 배신할 수 없었고, 뉴어크의 불우한 사람들을 배신할 수 없었네. `난 아니다, 나만큼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난 도망치지 않을 테다, 다른 선생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 그럴 수도 있자, 하지만 난 이 흑인 아이들을 버리지 않겠다.’ 그 결과로 내 아내를 배신하게 된 거였지. 난 내 선택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씌워버렸어. 내 공민의식의 대가를 도리스가 치른 거야. 그녀가 내 고집의 희생자가 되었지… 이보게, 이건 끝이 없다네. 내가 살아오면서 노력했듯 종교,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도, 여전히 자신의 선량함이라는 신화는 족쇄처럼 남는다네. 그게 최후의 망상이지. 또 내가 도리스를 희생시키게 만든 망상이고. 그만하세. 모든 행동에는 손실이 따르는 법. 이게 그 체계의 엔트로피야." 선생님이 말했다. "어떤 체계 말인가요?" 내가 물었다. "도덕체계 말일세."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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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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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엔서니 버지스. 결혼하며 아직 책을 정리해 가지 않은 동생의 책장에서 훔쳐온 소설. 순식간에 다 읽었다. 음악같은 소설. 폭력과 폭력에 사로잡힌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1984><멋진신세계>보다 빠르게 읽히면서 생각은 더 하게 되는 느낌. 이미지를 찾다 보니 영화도 좋을 듯. 이제 영화를 봐야겠;;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난 사람보다 낫지 않을까?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들이구나, 6655321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언젠가 훗날에 네가 지금 이 순간을 되돌아보고 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낮고 미천한 나를 기억하게 되면, 너에게 일어날 일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되어있다고 해서 제발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다오. 114

"내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왜 그런 말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어.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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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빅 슬립 (필립 말로 시리즈 1) 필립 말로 시리즈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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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2001년인가 2002년 즈음 동숭아트센터에서 보았다.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주인공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시체를 옮겼을 사람을 떠올리며 주인공 말로는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도 무겁다˝는 독백을 한다. 여기서 이런 말이 나와? 싶은 그의 말투는 왜 경찰하다 짤렸는지 이해가 되게 한다. 사건은 생각보다 깔끔. 곳곳에 유머. 셜록은 드라마를 떠올리며 즐겁게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말로 시리즈를 다시 드라마로 만들고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말로 역할을 했어도 즐거울 뻔. 책 말미에 챈들러에 대한 하루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해설도 꽤 읽을만 하다. 시리즈로 샀으니 번호 따라가며 정주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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