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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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것이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그 후회는 종종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물론 엄마 아빠도 그걸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망은 반사되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정처없이 원망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처럼 컸다. 어릴 때는 그게 쉬웠다. 치마를 거부했다. 국민학교 6년 동안 세 번 치마를 입었다. 여자아이들에게 쥐어주는 미미인형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고(그걸 다 벗겨서 머리채를 끌고 다녔다고 엄마는 종종 말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로봇을 받았다. 시험을 잘 보았을 때 대가로 한 해는 축구공을, 한 해는 농구공을 요구했다. 물론 남자 아이들은 나를 대놓고 무시했고, 단 한 번도 축구 경기에끼워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비탈길에서 혼자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달리기를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잘도 뛰었다. 학교 대표 선수도 하고 운동을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조금 더 커서 여고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앞머리를 붙들고 또는 가슴을 가리고 뛸 때도 나는 잘 뛰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순간 남자처럼 크기를 포기했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걸 그냥 포기한 것이 안타깝다. 고립 속에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눌 통로 없이 나는 그냥 일반적인 여자가 되었다. 그냥 어느 날 ‘사춘기 끝‘하고 머리를 기르고 보통 여대생이 된 것이다. 뭐랄까 어딘가 기억상실증 같아 그때를 곰곰 돌아보지만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나를 맴돌던 원망도 주위의 시선과 ‘원래 그래‘라는 단어에 물들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어린 페트로니우스의 생각에 격하게 공감하고 말았다. 맨움인 그는 움(male-female의 구조를 반대로 만들어 여자를 wom 남자를 manwom으로 부른다)의 직업인 뱃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맨움은 움의 직업을 갖기에 나약하고, 아이들 돌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설득과 압력에 부딪힌다. 그는 맨움이 억압받는 사회에 맞서 싸운다. 내가 남자가 되고 싶었던 건 우리 아빠의 형제 중에 우리 집에만 ‘아들‘이 없었고, 아들이 딸 보다 더 좋다는 집안의(그 시절의) 일반적인 시각 때문이었을텐데. 남자아이들에게는 내가 되고 싶었던 과학자의 꿈이 권장되기 때문이었을텐데. 그때는 그 구조 안에서 생각이 작았다. 조금 더 자랐다면 나도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조금 더 전투적인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안타까움.

미러링의 원본처럼 보이는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여자-남자의 이분법적인 구조가 얼마나 문화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상세한 설명을 위화감 없이 푼다는 것, 그리고 감정과 한 사람의 삶 속에서만 펼쳐지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과 국가 차원에서의 큰 구조를 비틀어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반대로,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거울처럼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니. 1977년에! 작가는 얼마나 재미있어하며, 동시에 소스라치며 글을 썼을지.

좋은 페미니즘 책이 많이 나오고 이런책까지 다시 재조명 받는 이유는 2015년 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 때문일 것이다. 그중 메갈리아에 관한 몇 가지 세부적인 논의는 아직까지도 벽에 가로막혀 관계가 조심스러운 누군가들에게는 입장을 묻기 어렵다. 그 논쟁의 와중에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고 당황하고 혼자 상처받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벌어진 ‘사실‘에 관한 관점조차 달라 사용하는 한 단어에도 여러 뜻이 붙었다.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그에 관한 논의의 깊숙한 바닥에 <이갈리아의 딸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이름을 선택했기 때문에 결국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과, 메갈리아가 미러링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해석된다. 같이 해석하기 위해 김고연주의 추천사를 인용한다. ‘메갈리아의 등장에 주목하고 고무되고 긴장하고 고민하고 분노하는 모두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정독해야 한다.‘

페트로니우스가 맨움이 움을 지배하는 나라를 바라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아들‘을 쓰지 않았듯이, 이갈리아는 여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외치고 좌절하면서도 함께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래서 다음 책으로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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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8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보면 초중딩 시절에 운동하는 여학생을 신기하게 봤습니다. 그때는 ‘운동=남자’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여학생이 남자처럼 운동하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선입견이 생겨요. 여학생은 열심히 운동하는 것뿐인데, 남자다운 인상 때문에 흡연한다거나 불량아라는 소문이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