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발생 2시간 43분 경과 
2호선 강남역 부근



엄마가 노량진역에 갇혀 있다. 엄마는 다쳤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중상인 것 같다. 엄마는 구조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엄마는, 죽을 수도, 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앞이 핑 돌았다.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고? 

“찾았습니다! 여기예요!” 
누군가 소리쳤다. 개구멍을 찾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쳐다봤다. 강남역 승강장과 가까운 곳이었다. 인부와 기관사, 해병대,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소리친 사람 쪽으로 몰려갔다. 개구멍을 덮고 있는 벽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우린 패닉 상태가 되어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머리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노량진역에 갇혀 있다니…….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연아가 애써 차분히 말했다. 

“정신 차리자. 우리 아니면 엄마를 구할 사람 없어.” 

나는 연아를 쳐다봤다. 그렇게 말하는 연아도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착한 척하려 해도 몸의 반응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왜 하필 오늘 지하철을 타 가지고! 아오!” 

지태가 잔뜩 화를 내며 소리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도 눈물을 참으면서 말했다. 

“일단…… 개구멍을 찾았다니까 나가서 바로 노량진역으로 가자. 가서 119 붙잡고 들어가든, 아니면 군인 붙잡고 구해달라고 하든, 아니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든, 엄마 데리고 나오자.” 

말하다 보니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 된다. 

우린 사람들이 발견한 개구멍 쪽으로 달려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개구멍이 있는 터널 벽 주위에 몰려 있었다. 인부가 어디선가 커다란 망치를 가지고 오더니 터널 벽에 내리쳤다.  

쿵! 쿵! 조금씩 벽에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이 벽이 갈라지고 있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인부가 몇 번 더 망치로 벽을 내리쳤다.  

쿵! 쿵! 쿵! 쿵! 벽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뿌연 먼지가 덮치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연신 기침을 해댔다. 먼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자 인부가 랜턴을 비췄다. 랜턴에서 나오는 불빛이 먼지를 뚫고 무너진 벽 사이를 더듬었다. 마침내 개구멍이 보였다. 딱 어른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철문이었다. 저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분당선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온다. 

나는 연아와 지태에게 말했다. 

“됐어. 개구멍 찾았어. 이제 나가서 노량진역으로 가면 돼. 그럼 엄마 구할 수 있어.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언제나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해준 건 엄마였다. 엄마의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에 우리는 철없는 아이처럼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 사실이 슬펐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연아와 지태에게 우린 다 괜찮을 거라고 몇 번을 더 말했다. 

그러나 내가 바보였다. 
개구멍을 발견했으니 이제 탈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모습을 드러낸 개구멍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일제히 개구멍으로 몰려들었다. 탈출구를 찾은 1등 공신인 인부는 개구멍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채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파묻혀버렸다. 그 뒤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마 압사했을 것이다.  

아귀다툼이었다. 선릉역에서 여기까지 온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제껏 봤던 어떤 모습보다 더 추한 모습으로 개구멍에 달려들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희망 앞에서 사람들은 사람임을 포기해버렸다. 절망이 아닌 희망이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갑자기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악취가 나는 쪽을 돌아봤다. 우리가 걸어온 역삼역 방향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 뒤로는 괴물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앞서 본 날개 달린 괴물은 물론이고, 거인처럼 거대한 몸집에 두 발로 걸어오는 처음 보는 괴물도 있었다. 날개 달린 괴물이 사람을 물어뜯어서 죽인다면, 거인 같은 괴물들은 사람들을 내려치거나 집어 던져 죽였다. 어느 쪽이든 무자비한 괴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역삼역 방향이면 방금 우리가 지나쳐 온 길인데 대체 어디서 괴물들이 나타난 거지?   

크아아아아아! 괴물들의 포효가 지하 터널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개구멍을 향해 더욱 맹렬히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눈이 뒤집힌 채였다. 서로 자기가 먼저 들어가려고 앞선 사람을 밀치고 밟다가 정작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밟혀 죽어갔다. 개구멍에 들어가는 사람보다 밟혀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젠장! 우리 어디로 가야 되냐?” 

지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개구멍을 향한 아귀다툼에 동참하든가, 괴물이 나타난 반대 방향인 교대역 쪽으로 도망가든가. 그런데 교대역은 괴물들의 최초 습격이 있었던 곳이다. 그곳에 아직까지 다른 괴물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야야! 언니는?” 

대뜸 연아가 소리쳤다.  
그 순간 큰 송곳이 머리를 관통하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아차, 싶었다. 누나를 잊고 있었다. 엄마가 노량진역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 뒤에 바로 개구멍을 찾고 난리가 나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개구멍이 발견된 위치가 누나를 벽에 기대 쉬게 했던 곳 근처였다. 그렇다면 누나는 이 근처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데……. 

그때였다. 개구멍 앞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 틈에서 거짓말처럼 누나가 보였다. 슬로모션처럼 모든 게 천천히 움직이는 가운데, 누나는 조금씩 개구멍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 좋게 개구멍 근처에 앉아 쉬다가 기회를 잡은 것 같았다. 누나는 불룩한 배를 움켜쥐고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개구멍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나는 미소인지 울음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안 돼’라고 생각한 순간, 누나는 사람들에게 치여 바닥을 뒹굴었다. 불룩한 배는 이름 모를 수천 명의 발에 밟혔다. 비명을 지르던 누나의 얼굴 역시 사람들의 발에 밟히면서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바닥에 떨어진 누나의 손에는 아까 누나의 식은땀을 닦아준 연아의 손수건이 꼭 쥐어져 있었다. 누나의 모든 것이 사람들의 무수한 발에 묻혀 사라졌다. 누나는 그렇게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다.  

지태가 고개를 돌렸다. 연아는 누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양손으로 입을 막고는 덜덜 떨었다. 나는 누나의 시체라도 찾아오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생존을 향한 사람들의 광기는 무시무시했다.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사람들 틈에서 휩쓸리다가 결국엔 바깥으로 튕겨나오고 말았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지태와 힘을 합쳐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괴물들의 포효는 더욱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대략 200미터 앞까지 괴물들이 몰려온 게 보였다. 선택해야 한다. 아귀다툼에 동참할 건지, 교대역 쪽으로 도망갈 건지. 

“씨발! 저 괴물들하고 이 사람들이 뭐가 달라! 교대역 쪽으로 가자!”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억누르면서 소리쳤다. 연아와 지태도 누나의 죽음이 준 충격을 딛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선택에 동의했다. 우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교대역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남역 승강장을 지나갈 무렵, 우리 앞에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나타났다. 
완전무장한 군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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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ycoffee 2017-10-2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재 단숨에 읽었습니다.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되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테러 발생 2시간 02분 경과 
2호선 선릉역 ~ 강남역 구간



우리들은 다 같이 인부를 따라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선릉역에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들 기약 없이 구조대를 기다리느니 자력으로 이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나는 내가 안고 갔다. 알고 보니 누나는 내 육상 경기를 보러 온 적도 있는 나의 팬이었다. 누나는 이런 곳에서 나를 직접 만나게 될 줄 몰랐다며 신기하다고 말했다. 

“너 달리는 거 보면서 배 속의 아기도 누구보다 잘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난 살면서 너무 많이 넘어져서 어떻게 달리는 건지도 잊어버렸거든.” 

누나는 어쩌다가 지하에 갇히게 됐는지도 말해줬다. 누나는 교대역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승강장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엉망이 됐고, 정신을 차려보니 승강장은 폐허가 되고 모든 출구가 막혀 있었다. 신기한 건 교대역 승강장에서 유일하게 누나만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했다는 것. 같이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모두 잔해 더미에 깔려 괴로워하며 죽어가는데 누나만 혼자 멀쩡히 잔해 더미 위에 서 있었다. 누나는 세상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것 같은 그 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누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괴물들로부터 도망치는 우리를 만나 여기까지 함께 오게 된 것이다.   

강남역으로 가는 동안 연아와 지태는 계속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계속 연결되지 않았다. 연아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충 적어서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고 연아가 문자 메시지까지 보냈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분명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다. 우리는 엄마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계속 걸어갔다. 

우린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계속 걸어 강남역 승강장 부근에 도착했다. 다행히 괴물들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는 길에 시체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괴물들은 강남역까지 넘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기관사와 해병대들, 인부,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강남역 승강장 부근 벽에 붙어 개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인부는 개구멍 위에 콘크리트를 바를 때 신분당선이 완공된 날짜를 새겨놨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신분당선 완공 날짜가 새겨진 벽이었다. 그곳을 찾아 부수면 개구멍이 나올 것 
이다. 

나는 누나가 벽에 기대 쉴 수 있게 내려준 뒤 개구멍을 찾기 위해 벽을 살피고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연아가 스마트폰을 흔들며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연아가 외쳤다. 

“빨리 와, 빨리! 엄마 전화 왔어!” 

나는 두 눈이 동그래져서 지태와 함께 연아에게 달려갔다. 연아가 스피커폰으로 설정하고 전화를 받더니 소리쳤다. 

“여보세요! 엄마! 어디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았어?” 

옆에서 나와 지태도 엄마에게 어디냐고 우리는 지금 지하에 갇혀 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다. 

“아유, 시끄러워, 이 녀석들아……. 엄마가 좀 바빴어. 일이 좀 생겨서……. 너희들 지금 어디에 있니? 주위에 사람들도 같이 있지?” 

그런데 엄마의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았다. 어딘가 아픈 사람 같았다. 연아가 엄마의 물음에 대답했다.

“우린 지금 강남역 쪽 지하에 있어! 밖으로 나가는 길이 다 막혀서 지금 사람들이랑 다 같이 나가는 길 찾고 있어. 엄마는 어디야?” 
“그래, 우리 딸…… 듬직하네. 사람들 말 잘 듣고…… 절대 너희들끼리 딴 데로 가면 안 된다…….” 

그러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후…… 후……. 
엄마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퇴근길 버스가 아닌 게 분명했다. 불안해진 내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지금 어디야?” 
“아유…… 귀 아파, 이 녀석아……. 난 괜찮아…….” 

답답하게 왜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 걸까? 불길한 예감은 점점 커져갔다.  

“엄마, 지금 퇴근길 아니지? 솔직히 말해. 어디야?” 

연아도 나처럼 답답함을 느꼈는지 화가 난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물었다. 연아가 정말 심각할 때만 가끔 나오는 목소리다. 엄마가 잠시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엄마, 지금…… 노량진역에…… 그 안에 있어.” 

깜짝 놀란 나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노량진역? 엄마가 그 안에 갇혔다고? 왜?” 

후…… 후…….  
거친 엄마의 숨소리.  
이번엔 지태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엄마! 왜 자꾸 숨만 쉬어? 말 좀 해봐! 거긴 지금 상황이 어떤데?” 
“엄마도 힘드니까 숨만 쉬겠지, 바보야!” 

연아가 지태를 타박했다. 지태는 이 와중에도 “아, 그렇지” 하며 눈이 동그래졌다. 
다시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지금…… 여기 돌에 좀 깔렸어……. 아까 지하철 기다리는데 갑자기 무너져서…….” 

우리 셋 다 놀란 얼굴이 됐다. 내가 연아의 스마트폰을 낚아채 소리쳤다. 

“돌에 깔리다니, 뭐 얼마나 깔린 건데! 아, 평소엔 버스 타고 다니면서 오늘은 왜 지하철 타러 갔어!” 
“단이 네가 오늘 기분 안 좋을 것 같아서……. 빨리 가서 너 좋아하는 갈비 해놓으려고 했지. 버스는 많이 막히잖니…….” 

엄마의 대답에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엄마는 오늘 내가 육상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래서 평소엔 타지도 않던 지하철을 탄 것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연아가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엄마, 주위에 도와줄 사람 없어? 거기 엄마만 있는 거 아니지?” 
“후…… 걱정 마, 우리 딸……. 119에서 구조하러 온대.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너희들 몸 잘 챙겨……. 특히 단이랑 지태, 너희는 몸이 재산이잖아. 연아는 똑똑하기라도 하지…….” 

나와 지태가 발끈해선 서로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또 그 소리! 나도 머리 좋거든!” 
“내가 창만 안 던졌어도 전교 1등 했어!” 

연아가 흥분한 나와 지태를 말리고는 다시 차분히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119에서 진짜 구조하러 온대? 누가 그랬어?” 
“아까…… 여기 사람들이 그랬어. 나가서 자기들이 119 불러온다고 했어. 걱정 마.” 
“몸은 어떤 상태야? 아예 못 움직여? 돌에 어디가 어떻게 깔렸는데?” 
“아유…… 너희들이 그거 알아서 뭐하게. 그냥 여기 있으면 구조하러 올 거야……. 움직이는 건 좀 힘들어.” 

나와 지태가 119는 빨리 못 올 수도 있다고, 주위에 도움 청해서 나오라고 바득바득 소리치는데, 연아가 또 다시 우릴 말렸다. 연아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엄마, 잘 들어. 우린 지금 다 괜찮아. 다친 데도 없고 여기 어른들도 많아. 다 같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지? 대신 엄마 몸 잘 챙겨야 돼. 우리가 지금 나가서 119 아저씨들한테 엄마 있는 곳 알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프다고 정신 잃으면 안 돼. 응?” 

침묵.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우린 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우리 딸……. 다 컸네…….” 

엄마의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 있었다.  

“내가 딸 하난 잘 키웠……” 하는데,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쿠쿠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찢어질 듯한 비명이 이어졌다.  

“엄마! 왜 그래? 엄마!” 

우리들은 애타게 엄마를 불렀지만, 엄마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콰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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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발생 1시간 32분 경과 

2호선 선릉역 부근



기찬이는 항상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 두 명—‘주댕이’, ‘헐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과 함께 있었다. 하필이면 저 자식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런 상황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지간해선 반가울 텐데 이 자식들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이야, 너희들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겁나 반갑다야. 이 난리통에 어째 안 죽고 살아 있었네.”

기찬이가 비꼬듯 말했다. 기찬이의 얼굴은 거뭇거뭇했다. 아마 행렬 앞쪽에 있다가 폭발 때문에 뒤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얼굴의 숯 검댕이나 닦아, 이 새끼야.” 

지태가 기찬이에게 거칠게 말했다.   

“요즘 트렌드거든. 얼굴 까맣게 하는 거.” 

기찬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지태와 연아, 둘 다 기찬이의 실없는 대꾸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갇힌 거냐? 역삼? 강남?” 
“말도 마라. 이 형님, 돌아가실 뻔했다. 선릉역 가다가 지하철이 멈춰서 내려서 걸어가는데, 씨발 갑자기 바로 앞에서 불이 나는 거야. 그래서 저 앞에서 사람들이랑 불 끄고 선릉역으로 나가보려고 별짓 다했는데 절대 안 꺼져. 조금 전엔 폭발까지 일어나 죽을 뻔했다. 근데 뭐 알아보니까 지금 2호선 지하철역들 다 무너졌다면서? 우린 그것도 모르고 괜히 저기로 나가보겠다고 불 끄려고 지랄한 거지. 그래서 다 포기하고 졸라 우울하게 뒤쪽으로 넘어온 건데, 너희들이 딱 여기 있네. 너희들 보니까 왜 이렇게 좋냐?”  
“졸라 말 많네, 새끼. 다시 꺼져라. 우린 하나도 안 좋거든.” 

지태의 말에 기찬이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답했다. 그러다 연아의 무릎에 난 상처를 봤는지,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야, 너 다쳤네. 괜찮아?” 

기찬이는 자기가 먼저 말을 걸어놓곤 수줍은 얼굴이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연아가 칼같이 대답했다.   
기찬이는 어어…… 하며 평소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렸다. 나와 지태는 그런 기찬이의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기찬이는 나와 지태를 보면서 잔뜩 인상을 썼지만 그런 모습조차 우스울 뿐이다. 기찬이는 예전에 연아에게 고백했다가 까인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평소엔 조폭 흉내내며 거들먹거리다가도 연아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물론 연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기찬이를 일관되게 차갑게 대했고, 우린 그렇게 기찬이가 까일 때마다 지금처럼 킬킬 웃어댔다. 

“근데 너희들 혹시 이 밑에서 뭐 이상한 놈들 못 봤냐? 괴물인지 뭔지 이상한 놈들이 있다고들 하던데. 막 사람도 죽이고.” 

항상 기찬이와 함께 다니는 똘마니 중 하나인 주댕이가 물었다. 입이 툭 튀어 나와서 주댕이라는 별명이 붙은 녀석이다. 나와 연아, 지태가 서로 쳐다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저기 교대역 쪽으로 계속 뛰어가봐라. 아직 그놈들 있을 거다.” 

내가 대답해줬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다.   

“대박! 단 존슨, 너 그놈들 봤어? 근데 어떻게 안 죽었냐?” 

나는 너는 왜 안 죽었냐고 묻는 이런 새끼에겐 주먹을 한 대 날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 천연덕스럽게 궁금한 얼굴이라 주먹은 참기로 했다. 

“사진 안 찍었냐? 지금 바깥에 그놈들 사진이 몇 장 돌고 있거든. 근데 졸라 멀리서 찍고 흔들리고. 씨발, 심령사진도 그보단 나을 거다. 너희들 찍은 거 있으면 좀 보여줘봐.” 

이번엔 헐크가 물었다. 얼굴이 각지고 덩치가 커서 헐크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쉽게도 피부는 초록색이 아니다.   

“미쳤다고 거기서 사진 찍고 앉아 있냐? 사진 같은 거 없어. 누군지 몰라도 사진 찍을 여유가 있었나 보네. 대단들 하다, 진짜.” 

지태가 말했다.  
평소에 그렇게 사진 찍고 방송 놀이를 해대던 나와 지태, 연아는 괴물들 앞에서 사진 찍을 생각조차 못 했다. 자칫 잘못하면 머리가 날아갈 상황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기찬이와 주댕이, 헐크는 우리에게 괴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 상황은 어땠는지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우리는 귀찮았지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간단히 말해줬다. 기찬이 일행은 우리 얘길 들으며 우와, 대박, 이야 등등 제가 아는 감탄사란 감탄사는 모두 토해냈다. 

“야, 다 이리 모여봐.” 

이야길 다 들은 기찬이가 갑자기 뭔가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가까이 불러 모았다. 나와 지태, 연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아, 빨리 와보라니까. 그놈들 이야기야” 하며 재촉했다. 일단 무슨 얘긴지 들어나보자 싶어 한 발짝 다가갔다. 우리는 기찬이를 중심으로 작은 원 모양으로 모였다.  

“너희들이 본 괴물들 말이야. 북한에서 보낸 놈들이야. 확실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와 지태, 연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기찬이를 봤다. 기찬이가 계속 말했다.  

“북한이 예전부터 DNA 복제 기술 같은 걸 전투 병력에 이용하려고 엄청 투자했거든. 너희들 몰랐지? 북한이 우리 따먹으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었다고. 암튼 북한이 DNA 복제, 유전자, 뭐 그런 기술들 있잖아. 그런 걸로 너희들이 본 그놈들 키워 가지고 땅굴로 보낸 거야. 봐봐. 지하에만 나타났잖아. 안 그럼 지상으로 덮치면 되지 왜 하필 지하로만 왔겠어? 이유는 땅굴밖에 없어. 북한하면 땅굴이지.” 
“그거 어디서 들은 거야?” 

연아가 물었다. 내 기억으론 연아가 기찬이의 말에 관심을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찬이는 연아의 관심이 반가운지 신나서 대답했다. 

“내가 음모론 그런 거에 좀 빠삭하거든. 아까 선릉역 저기 불난 데 건너오기 전에 내가 잘 가는 밀리터리 카페 검색 좀 해봤어. 거기 지금 그놈들 때문에 난리 났어. 사진도 거기에 올라온 거고.” 
“정부 발표는 아닌 거지?” 

연아가 다시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정부에서 그런 발표를 하겠어? 그럼 바로 핵전쟁으로 갈걸? 그럼 서울은 그냥 끝장이지. 완전 불바다가 되는 거야. 아니지. 방사능 바다가 되는 건가? 암튼 바로 북한 소행이라고 발표하면 전쟁이 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정체 모를 테러라고만 하고 국가비상사태 문자 때린 거야. 요즘 세상에 전쟁 터지면 다 같이 죽자는 거잖아.” 

기찬이가 자신의 군사 지식을 자랑하듯 대답했다. 딱히 자랑할 만한 수준도 안 되어 보이긴 했지만.  
나와 지태, 연아는 기찬이의 말을 다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찬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긴 힘들지만 북한과 땅굴 이야기는 그럴듯했다. 괴물들이 지상에는 안 나타나고 지하에만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찬이의 말에 설득력을 더했다.  

그때,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자, 모두 여기 주목해주세요!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주목해주세요!” 

나는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찾기 위해 터널 벽에 내 허리쯤 닿을 만한 곳에 붙어 있는 굵은 전선 위에 올라가 지하 터널을 둘러봤다. 시끌벅적한 인파가 한눈에 들어왔다. 행렬 가운데쯤에서 기관사 복장의 아저씨가 터널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위에 올라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은 누구도 기관사의 외침에 주목하지 않았다. 지하 터널은 여전히 잔뜩 흥분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날뛰느라 소란스러웠다.  

그러자 기관사 옆에 있던 해병대 복장의 남자가 잔뜩 굳은 얼굴로 각목을 들고는 근처에서 난동을 부리던 남자에게 다가가 손에 든 각목으로 힘껏 후려쳤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각목으로 두들겨 맞은 아저씨는 비틀거리며 해병대를 노려봤다. 해병대는 각목으로 아저씨의 몸통을 몇 번 더 후려치곤 그의 머리를 붙잡아 터널 기둥에 처박았다.  

“조용히 하란 말, 안 들려! 이러다 다 죽는다고!” 

해병대가 피투성이가 된 아저씨의 머리통을 붙잡고선 소리쳤다. 확성기를 쓰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지하 터널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해병대를 쳐다봤다. 

“뭐해? 조용히 안 시키고!” 

해병대가 근처에 있던 다른 해병대 남자들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해병대들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위압적인 얼굴과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외쳤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겐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서로 조용히 하라고 외치면서 지하 터널은 본래 간직했어야 할 침묵을 되찾았다. 그제야 기관사가 다시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모든 사람이 기관사를 주목했다. 

“아아! 그럼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마 다들 소식을 들었겠지만, 지금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고, 2호선 지하철역 출구는 모두 막혔다고 합니다! 확실하게 검증된 건 아니지만 본부에 전혀 연락되지 않아 자세히 확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구조대도 언제 올지 기대하기 어렵고요! 저는 아직 못 봤지만 사람들 말로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생명체가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관사의 마지막 말에 적잖이 술렁였다. 이곳에 갇혀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근처 어딘가에 식인 괴물이 존재한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는 기관사가 해결책을 제시해주길 기대하며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여기 모인 분들과 함께 탈출할 루트를 찾아보고 있는데, 우연찮게 여기 신분당선 터널 공사에 참여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신분당선은 강남역에서 환승할 수 있는 전철입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강남역 승강장 부근에 신분당선 터널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고 합니다! 신분당선 터널 공사를 할 때 인부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든 간이 통로인데, 신분당선이 완공된 이후에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놔뒀다고 합니다. 다만 통로의 입구를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놨다고 합니다. 위험해서였겠지요! 아, 그러니까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지금 강남역으로 가서 그 통로를 찾아내기만 하면 저희들 모두 신분당선으로 넘어가 탈출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나의 기대대로 거짓말처럼 해결책이 나오다니! 그런데 진짜 그런 통로가 있을까? 아니, 있더라도 지금도 이동할 수 있는 상태일까? 게다가 강남역이라면 괴물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아까 교대역 부근에서 습격 당한 게 마지막이니 만약 거기서 더 진격해 왔다면 괴물들은 지금은 강남역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기관사의 말을 듣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느라 지하 터널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러자 한 아저씨가 앞으로 나와 기관사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받아선 소리쳤다. 

“아, 제가 직접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떠들었다. 그러자 또 다시 해병대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예,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신분당선 통로에 대해 말씀드린 인부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희망에 찬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으리라. 인부가 이어서 말했다.

“사실은 저도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지하 터널에 들어올 일이 없었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끼리는 그 통로를 개구멍이라고 불렀어요. 상당히 좁은 통로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아마 그 개구멍은 도시철도 직원 분들에게 딱히 관리 대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문 앞에 콘크리트를 발라놔서 그냥 벽처럼 보이기도 할 테고, 관리라는 걸 할 만한 통로가 아니거든요. 개구멍을 완전히 없앴을 수도 있습니다.” 

인부가 잠시 말을 끊자 사람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지금 놀리는 거냐며, 왜 괜히 사람 헷갈리게 하냐고 인부를 타박했다. 하지만 인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없어졌을지 몰라도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으면, 전 거기에 매달릴 겁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 가만히 있으면 99퍼센트 죽습니다. 교대역 쪽에 괴물이 있다고 하셨죠? 만약에 그 괴물이 여기까지 밀고 오면 우린 그냥 다 죽는 겁니다. 차라리 그놈들이 오기 전에 개구멍을 찾아서 도망가는 게 훨씬 낫죠.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여러분 자유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따라오건 말건 저는 지금 강남역으로 가서 개구멍을 찾을 겁니다. 막혔으면 뚫어서라도 갈 겁니다. 살 수 있는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으면 전 거기에 매달리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집에 와이프랑 딸내미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곳에서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인부는 가족이 생각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옆에 있던 기관사에게 확성기를 건네주고는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 갔다.  

인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된다는 듯, 서로 눈치를 봤다. 기관사는 자신과 해병대들도 강남역으로 가서 개구멍을 찾아볼 거라며, 여기 선릉역에 남아 있을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망설이다가 대부분 강남역으로 가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우린 어떻게 할까?” 

나는 터널 벽면에 붙은 굵은 전선에서 내려와 지태, 연아에게 물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괜찮을까? 괜히 강남역으로 갔다가 또 괴물들 만나면 나 진짜 돌아버릴 거 같은데…….” 

지태가 걱정스레 말했다. 

“하긴. 누나도 같이 가야 하니까 또 괴물이 나타나면 진짜 위험하긴 해. 누난 지금 움직이기도 힘들잖아.” 

내가 옆쪽에서 앉아 쉬고 있는 누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럼 여기서 그냥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연아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이에 지태가 대꾸했다. 

“오긴 오겠지. 아까 네가 그랬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갇혔는데 위에서 모를 리 없다고. 누구든 구조하러 올 거라고.” 
“그거야 그렇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잖아.” 

지태의 말에 연아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히 이동하다가 그놈들을 만나느니 여기서 숨어 있을 곳을 찾는 게 나을 거 같아. 구조대가 올 때까지.” 

지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여기 남아 있는 게 옳은 선택이려나? 

“지랄들 한다.” 

느닷없이 기찬이가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와 지태, 연아는 기찬이를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냐?” 

내가 기찬이를 한 대 칠 기세로 말했다. 기찬이는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 좀 해라, 이 병신들아. 2호선이 다 무너졌으면 그 안에 갇힌 인간들이 얼마나 많겠냐? 뭐 2호선 말고 다른 곳도 많이 무너졌다면서. 아마 구조대보다 구조해야 할 사람이 훨씬 더 많을걸. 그런데 뭐? 숨어서 구조대를 기다려? 단 존슨, 네가 그런 놈이니까 코치가 주는 대로 약 처먹다가 도핑 걸린 거 아냐. 그리고 지태 너는 약이라도 좀 처먹고 기록 세워야 되지 않겠냐?” 

지태가 발끈해서 기찬이에게 다가가는데 그보다 내가 빨리 기찬이의 멱살을 쥐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 

그러자 연아가 다가와 내 팔을 잡으며 말렸다. 

“단아, 그만해. 됐어.” 

나는 연아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기찬이에게서 손을 놨다. 기찬이는 그런 나를 보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저 면상을 갈겨버려야 하는데. 

“연아야, 넌 왜 이런 놈들이랑 같이 다니냐? 그러지 말고 이제 나랑 놀자. 이 새끼들도 엄청 웃겨.” 

기찬이가 주댕이와 헐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댕이와 헐크는 마치 자신들의 매력을 보여주려는 듯 장난스럽게 연아에게 윙크했다. 연아는 벌레 보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기찬이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난 너 같은 애들이 제일 싫어.” 

기세등등하던 기찬이는 금세 상처받은 얼굴이 됐다. 연아, 나이스! 더 심하게 상처 줘도 되는데!  

“근데 기찬이 말이 일리 있는 것 같긴 해. 구조대가 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마 서울 지하가 다 난리 났을 테니까……. 구조대만 믿고 기다리기엔 기약이 없어.” 

연아가 말했다. 풀 죽어 있던 기찬이가 그 말을 듣고는 금세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순정남 새끼. 연아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구나.  

“얘들아,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누나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어느새 누나가 우리 옆에 와서 서 있었다. 

“언니는 어떻게 하려고요?” 

연아가 누나에게 물었다.  

“난 강남역으로 가볼래.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 

누나가 우리 셋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는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아니에요, 언니. 그럼 우리랑 같이 가요. 우리도 강남역으로 갈 거예요.” 

연아가 말하자 지태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뭐? 우리 진짜 가기로 한 거야? 진짜? 기찬이 저 새끼 말 듣고 마음 바뀐 거야?” 

기찬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지태를 조롱하듯이 쳐다봤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리고 언니 몸 안 좋으니까 강남역까지 차 태워드려야지. 언니, 지프랑 스포츠카, 어떤 거 타실래요?” 

연아가 지태와 나를 가리키며 누나에게 말했다. 지태와 나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는, 함께 기찬이를 돌아봤다. 

“여기 초소형차 한 대 더 있어.” 

지태가 키가 작은 기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눈치 없는 기찬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연아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누나는 장난치는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그럼 다 같이 강남역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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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발생 1시간 01분 경과
2호선 선릉역 부근

퍼퍼퍼펑! 
연아가 찍은, 화재가 난 선릉역 사진을 보고 있는데 행렬 앞쪽에서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행렬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빼 행렬 앞쪽을 쳐다봤다. 조금 전보다 더욱 거세게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먹구름이 지하 터널을 뒤덮고 있었다. 


폭발 이후 지하 터널은 빠른 속도로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검은 연기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행렬 곳곳에서 짜증 섞인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떤 곳에선 싸움이 벌어졌는지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알려달라는 외침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다들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돼? 앞뒤가 다 막혔잖아.”


지태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바로 앞의 선릉역은 화재로 막혔고, 반대 방향인 역삼역, 강남역, 교대역 또한 출구가 막혔다. 교대역을 지나서 더 가볼 수도 있지만, 그쪽으로 갔다간 괴물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린 지금 이곳에 고립된 것이다.


“얘들아, 이거 봐봐.”


대뜸 연아가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지금 2호선 지하철역들 상황이래.”


연아가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해서 내리자 2호선 지하철역 승강장들의 사진이 쭉 나타났다. 우리가 지나쳤던 역처럼 죄다 붕괴된 모습이었다. 성한 역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처럼 지하에 고립된 사람들이 찍어서 SNS에 올린 사진이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2호선 지하철역들은 싹 다 무너졌대. 그리고 왜 2호선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돌잖아. 그 원 안쪽 지하철역들도 거의 다 무너졌대. 지금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자력으로 지상으로 나오기 힘들 거라면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래. 아무래도…….” 연아가 잠시 쉬었다가 말했다. “우리 지금 지하에 갇힌 거 같아.”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연아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게 말이 돼? 2호선만 해도 지하철역이 몇 갠데 그게 다 무너졌다는 게? 그 원 안쪽의 지하철역들까지 다 무너졌다면……. 아냐, 그건 아닐 거야. 그게 어떻게 한번에 다 무너져? 그건 아냐, 네가 잘못 안 거라고!”


지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우리를 쳐다봤다. 하지만 연아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태의 물음에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데 우리가 본 그 괴물들을 생각해봐. 이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근데 우리가 직접 봤잖아. 무너진 지하철역들도 우리가 다 직접 봤잖아. 그러니까 지금 서울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게 다 현실이라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할 말이 없었다. 연아의 말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구조대가 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앉아 기다려야 하나? 괴물들이 또 습격해 오면 숨을 곳도 달아날 곳도 없는데?


그때 사이렌 소리 같은 삐삐삐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곳에 몰려 있는 수천 명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재난 경보 메시지 소리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와 지태, 연아, 그리고 벽에 기대 앉아 있던 누나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국가비상사태 선포] 실제 상황입니다. 서울특별시에서 전시에 준하는 테러가 발발했습니다. 가까운 재난 대피소로 대피하십시오. 대피 시 비상식량, 물품, 라디오를 챙기십시오. TV, 라디오를 통해 정부의 안내에 따라주십시오. 곧 모든 채널을 통해 대통령의 발표가 있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국가비상사태라니. 말로만 들어봤지 이런 상황을 실제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심각한 상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국가비상사태 선포 메시지를 읽으니 정말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해 있는 이 엿 같은 상황이 갑자기 실감 났다. 그런데 지태는 웬일인지 희망에 찬 얼굴로 나와 연아를 보며 물었다.


“가까운 재난 대피소가 어디냐? 거기 가면 안전한가 봐.”


그러자 연아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밖에 나가면 있겠지. 지금 여기선 갈 수 없어.”
“뭐? 그럼 우린 어디로 대피하라는 거야?”


지태가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묻자 또 연아가 대답했다.


“이 문자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해당되는 게 전혀 없어. 비상식량, 라디오 그런 건 전부 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이 문자는 그냥 무시해.”


그러자 지태는 정말로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되었다. 놀이공원에 갈 생각에 한껏 부풀었다가 못 가게 된 아이처럼.


“이런 망할 문자는 왜 보내고 지랄이야! 괜히 희망 품게!”


지태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서 버럭 소리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모두 지태처럼 문자 메시지를 보고 희망을 품었다가 실망하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한 남자가 숨을 못 쉬고 꺽꺽대며 나를 붙잡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내가 놀라서 남자를 보며 물었다. 남자는 점점 더 숨 쉬기 어려워했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아와 지태를 쳐다봤다.


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빛이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댔다. 발작하는 것처럼 몸이 기괴하게 꺾였다. 주위에 있던 몇몇 어른들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몰려들어 괜찮냐고 물었다. 사람들의 말 속에서 폐소공포증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사람들이 진정하라고 말하는데, 남자는 이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꺄아아아아악! 옆에 있던 여자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여자를 쳐다봤다. 소리를 지른 여자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막무가내로 붙잡으면서 소리쳤다.


“저 좀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요! 선생님! 국가비상사태라니요! 저 좀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네?”


사람들은 왜 이러냐며 서로 여자를 밀쳐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눈이 뒤집히더니 핸드백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던 아저씨가 감전되어 쓰러졌다. 


“이 여자가 미쳤나!”


다른 아저씨가 보다 못해 여자의 얼굴을 후려쳤다. 여자는 잠시 휘청하더니 어느새 전기 충격기를 내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커다란 유리 조각에 베여 손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여자는 유리 조각을 쳐들고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후려친 아저씨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아저씨의 팔에 유리 조각이 꽂히며 피가 튀었다. 


“아아아아악!”


아저씨가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유리 조각을 잡아빼더니 또 찔렀다. 또 찔렀다. 또 찔렀다. 계속 찔렀다. 아저씨의 팔이 너덜너덜해졌다. 저 여자는 미쳤다. 우리는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벽에 기대 쉬던 누나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도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은 여자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붙잡고 괴로워하는 아저씨를 내버려두고 여자는 다른 먹잇감을 찾아 눈을 번뜩였다. 여자가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짜증 섞인 고성이 오갔다. 그러다 뒤에서 어떤 남자가 덮쳐서 여자를 붙잡았다. 또 다른 사람이 달려들어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또 다른 사람이 여자의 손을 쳐서 유리 조각을 떨어뜨리게 했다. 여자는 세 남자에게 붙잡힌 채 마구 날뛰었다. 


“아아악! 살려줘! 여기서 빼내줘!” 


갑자기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괴성을 질렀다. 그러곤 여자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붙잡으며 자신을 여기서 빼내달라고, 나가서 돌봐야 할 가족들이 있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남자를 밀쳐내자 남자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왜 날 여기에 가두냐며 사람들을 향해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뒤엉키면서 마구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모두가 정신이 나가버린 듯했다. 누군가는 앞니가 부러져 피가 철철 흐르고, 누군가는 귀를 물어 뜯겨 너덜너덜해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광기 어린 폭력이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곳곳에서 비명과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집단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국가에서 국민들을 위해 보낸 대피 안내 메시지는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흥분시켰을 뿐이다. 


마구잡이로 싸워대는 사람들을 피해 사람들은 휴대폰을 마구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112, 119에 전화하거나 가족, 지인들에게 전화하더니 살려달라고, 빨리 여기서 꺼내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통화량이 폭주해서인지 전화가 연결된 사람보다 연결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통화가 되지 않자 사람들은 무작정 선릉역이나 역삼역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비가 붙어 드잡이를 하며 싸우는 사람도 있고, 괴성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어떤 사람은 터널 벽을 부수려는 듯 마구 두드렸지만 손에서 터져 나오는 피만 확인하고 절망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기도 했다. 지하 터널은 말 그대로 미친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누나를 데리고 집단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무서웠다. 심지어 괴물들보다 더. 잠시 쉬었는데도 누나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얼굴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우린 누나를 벽에 기대 앉아 쉬게 했다. 


“괜찮으세요?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누나는 말도 하기 힘든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누나, 곧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조금만 힘내세요.”


내가 말했다.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연아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누나의 얼굴을 닦아줬다. 누나는 고맙다며 연아의 손수건을 받아 쥐고는 얼굴을 꼼꼼히 닦더니 배 위에 손을 올려놨다. 누나의 불룩한 배를 보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저 아기는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었다. 괴물도 모자라 사방에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까지 바글바글한 이곳에서.

“일단 엄마한테 전화하자. 우리 여기 갇혀 있다고 말해야지.”


연아와 지태에게 말하고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전화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리기도 전에 연결이 힘들다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옆에서 연아와 지태는 스마트폰으로 뭔가 검색해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접속해서 그런지 속도가 느렸다. 아예 페이지가 바뀌지도 않았다. 둘 다 답답한지 한숨만 내쉬었다.


“아마 누구든 구조하러 올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는데 위에서 모를 리 없어. 119든 아니면 여기 관리하는 서울메트로든, 아니면 군대가 오든, 사람들을 구조하려고 준비 중일 거야.”


연아가 애써 희망을 찾으려는 듯 말했다. 


“씨발, 한 몇 달 지나서 오는 거 아냐? 오긴 오겠지?”


지태가 불안한 듯 되물었지만 나와 연아 둘 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 엄마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야 안심될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 엄마는 어떻게든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야, 근데 엄마도 그 국가비상사태 문자 받았을 거잖아? 그럼 우리가 걱정돼서 벌써 전화했을 텐데……. 다들 전화 온 거 없어?”

지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엄마는 그런 문자 메시지를 받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벌써 우리들의 전화기에 불이 났어야 한다. 스마트폰의 통화 목록을 확인해봤지만 누구한테도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설마 엄마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지상엔 괴물들이 안 나타났다고 했는데…….


“아닐 거야. 그냥 통화량이 많아서 먹통인 거겠지. 엄만 별일 없을 거야.”


내 머릿속을 읽은 듯 연아가 말했다. 그래, 엄마는 별일 없어야 한다.


“맞아. 아마 엄마도 밖에서 지금 우리랑 통화 안 돼서 엄청 답답해하고 있을걸. 엄만 지하철도 안 타니까 괜찮을 거야.”


지태가 연아의 말에 덧붙였다. 지태 말대로 엄마는 출퇴근할 때 지하철이 아닌 버스만 이용했다. 버스가 지하철보다 더 오래 걸렸지만 바깥 풍경을 보는 게 좋다고 했다.

“어이! 단 존슨! 뽕쟁이!”

어디선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 존슨은 도핑 스캔들 이후 나에게 붙은 별명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그 유명한 칼 루이스를 제치고 육상 100미터에서 우승했지만 약물 복용으로 탈락한 벤 존슨의 이름을 내 이름에 붙인 건데……. 문제는 평소 날 고깝게 여기던 우리 학교 일진들 말곤 저렇게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지태와 연아도 설마 하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기찬이다. 우리 학교의 일진이자 꼴통. 연아를 짝사랑해 나와 지태를 질투하는 재수 없는 자식. 마주칠 때마다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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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2017-10-26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새벽에 정주행으로 계속 읽고있는중이네용....!!!!!!책으로도 빨리 만나보고 싶어요~~^^
 



같은 시각

경복궁 부근


“아버지, 절대 집에서 나오지 마세요. 특히 지하철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고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집에 계세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현국은 TV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한 가지 방송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전화를 해 온 아버지에게 짧게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TV 채널은 서울의 지하 세계를 휩쓴 전대미문의 재난에 대해 앞다퉈 보도하는 중이었다. 서울의 지하철역 100여 개가 폭파되었으며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나타나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피해는 겪지 않았어도 온갖 뉴스를 접하며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현국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현국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는 주차장이 되어버린 도로 사이에서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자동차는 도로에 버려둔 채였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목발을 짚고 있어 뛰는 게 뛰는 게 아니었다. 바람이 선선한 늦가을이지만, 현국은 한여름처럼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도로에 갇힌 운전자들은 목발을 짚고 지나가는 현국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신들도 그냥 자동차를 버리고 가는 게 더 나을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스마트폰과 라디오, DMB 내비게이션 등을 통해 서울의 현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모든 포털 사이트, 채널에서 재난에 대한 속보를 전했다. 


또 다시 현국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방금 전화를 끊은 아버지 아니면 왜 빨리 안 오냐고 독촉할 국정원장일 거라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는데, 휴대폰 액정에 ‘장호준 박사님’이라는 발신인 표시가 떴다. 장 박사라면…… 3년 전에 죽었다. 그 뒤로 한 번도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정리하지 않아서 아직 번호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장 박사의 번호로 전화가 왔다? 현국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다짜고짜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오늘 밤 11시까지 장 박사님과 처음 만났던 곳으로 오십시오.”


현국은 “여보세요”라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뭐야? 누가 이런…….’

현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 박사는 현국이 국정원에 들어와 방황할 때 만난 멘토 같은 존재였다. 그가 심장마비로 죽고 난 뒤 현국은 꽤 큰 공허함을 느꼈을 정도다. 그런데 서울에 재난이 일어난 이 시점에 그의 번호로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오다니,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현국은 경복궁역에 거의 다다랐다. 경복궁역 근처에서 분주하게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있는 군인들이 보였다. 바리케이드를 지나 경복궁 돌담길을 쭉 달려가면 청와대가 나온다. 청와대 깊숙한 곳의 지하 벙커. 지금 현국이 가야 할 장소다. 


“이쪽으론 못 들어갑니다. 돌아가세요.”


바리케이드를 지나려는데, 군인들이 현국을 막아섰다. 현국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등에 메고 있던 백팩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국정원 소속 기현국 실장입니다.”


군인들이 현국이 내민 신분증과 얼굴을 비교해보더니 어디론가 무전 연락을 했다. 현국의 출입 여부를 허가 받는 것 같았다. 현국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무전을 끝내더니 군인들이 현국에게 바리케이드를 열어줬다.


“후, 저기, 비상 상황이라 그런데 저 차량, 운행 가능합니까? 청와대까지 좀 태워주시면 좋겠는데…….”


현국이 주차되어 있는 군용 레토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군인들은 왜 귀찮게 하냐는 듯 현국을 쳐다봤다. 현국은 자신의 목발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했다.  


경복궁 옆, 청와대로 가는 길엔 군인들이 바글바글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보호벽, 무기 등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현국이 탄 레토나가 지나갔다. 보조석에 탄 현국이 태블릿 PC를 꺼내 뉴스 속보를 스크롤하며 확인했다. 특별히 더 알려진 소식은 없었다. 서울 각지의 지하철역이 일제히 테러를 당해 도심이 마비됐다는 소식,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다행이다, 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실시간 SNS 정보에 괴물의 사진이 올라와 있는 걸 보자 현국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괴물들의 사진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괴물의 정체 자체를 의심하는 반응부터 공포에 질린 반응까지. 괴물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대한민국에서 괴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니까. 현국은 그중 한 명이었다.


레토나에서 내린 현국은 몇 차례 신분 확인 과정을 거친 후, 청와대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지하 벙커에선 청와대 실무진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와.”


원도훈 국정원장이 현국을 맞이했다. 국정원장은 현국의 걸음을 재촉하며 지하 벙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비상대책센터로 향했다


“들어가서 입도 뻥끗하지 마. 알겠지.”


국정원장이 현국에게 경고했다. 현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국정원장은 비상대책센터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현국은 국정원장에게 왜 들어가지 않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대답해, 기현국.”


국정원장이 현국을 노려봤다. 이에 질세라 현국이 대꾸했다.


“지금 이 마당에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어서 다 알리고 대책을…….”


하지만 현국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 뼘이나 더 큰 국정원장이 현국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 앞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곧 우리끼리 따로 회의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선 조용히 해. 알겠어?”


국정원장이 현국의 두 눈을 짓이길 것처럼 노려보며 말했다. 현국은 씩씩 숨을 내쉬기만 했다. 국정원장은 현국의 그런 태도를 무언의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그의 턱을 놓고 비상대책센터 문을 열었다. 현국은 비틀거리면서 목발로 몸의 중심을 잡았다.


비상대책센터 안에는 이미 도착해 있는 각 부처 장관들, 실무진이 가득했다. 모두들 전화통에 불이 난 듯 어딘가와 통화 중이었다. 국정원장과 현국은 비상대책센터 가운데 있는 회의 테이블의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와 동시에 비상대책센터의 또 다른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몇 명의 경호원 뒤로 굳은 표정의 박정근 대통령이 들어왔다. 개헌을 통해 현재 9년째 장기 집권 중인데도 독보적인 카리스마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대통령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5분만 함께 있으면 상대방을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국은 그가 매력적인 만큼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괴물의 정체를 아는 대한민국의 극소수 중 한 명이었다. 지금 일어난 재난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현국이 보기에 대통령은 야누스 같은 사람이었다. 천상이 내려준 카리스마와 핵폭탄보다 위험한 야망을 동시에 품은 사람.

대통령이 들어오자 비상대책센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급히 전화를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이 상석에 앉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현재 상황 브리핑해주세요.”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시하자 비상대책센터 안의 여러 각료 중 국가안보실장이 대형 스크린 앞으로 나왔다. 스크린에 서울의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가 떠오르며 안보실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폭발 테러가 일어난 곳은 서울 지하철역 127개 역으로 파악되며, 이 중 98개 역은 출입구가 완전히 붕괴되어 이동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나머지 29개 역은 붕괴 직전 단계로 곧 출입구가 완전히 막힐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테러는 모두 지하에 위치한 지하철역 승강장에서만 발발했으며, 지상에 위치한 승강장은 어느 곳에서도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지하 터널을 지나가던 지하철 탑승객과 지하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시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현재 군부대가 투입되어 구조 중입니다. 지상에서는 아직까진 교통 대란 이외에 어떠한 피해도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안보실장의 말에 따라 대형 스크린의 지하철 노선도에 테러를 당한 지하철역들에 반짝이는 불빛이 들어왔다. 현국은 그걸 보며 테러를 당한 지하철역들이 너무 예쁘게 표시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보실장은 반짝이는 지하철역들을 가리키며 브리핑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테러가 일어난 구역은 지하철 2호선을 중심으로 그 안쪽에 위치한 지하철역들입니다. 2호선 지하철은 서울 시내를 원을 그리며 도는 순환선인데, 이 원에 위치한 2호선 지하철역들을 포함, 원 안쪽에 위치한 수많은 지하철역들이 모두 테러를 당한 것입니다.”


안보실장의 말에 따라 2호선 지하철 노선도가 그리는 원과 원 안쪽의 지하철역들이 모두 빨갛게 표시됐다. 한강을 중앙에 두고 서울 시내를 뒤덮은 커다란 원이 빨간색으로 채워졌다. 안보실장이 말을 이어갔다.


“2호선은 서울의 대표적인 흑자 노선 중 하나인 만큼 서울의 주요 역들을 지나고 있고 그 안쪽의 지하철역들 또한 두말할 것 없이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잠깐만요, 그럼 저 2호선 원 안쪽 지하 구역이 모두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당했다는 말입니까?”


질문을 던진 건 현국이었다. 안보실장은 브리핑을 끊은 현국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현국 바로 옆에 앉은 국정원장 또한 현국에게 눈치를 줬다. 


“대답해보게. 나도 궁금하니까.”


느닷없이 대통령이 말했다. 대통령은 평소에도 소신 있게 할 말 하는 성격의 현국을 신임하는 편이었다. 안보실장은 별수 없이 현국의 질문에 대답해줬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 2호선 원 안쪽 구역을 사수하기 위해서 군부대가 투입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붕괴 직전에 있는 29개 지하철역이 모두 붕괴된다면 저 원 안쪽 구역은 거대한 지하 밀실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 군도 저곳에 갇히게 되는 셈으로, 사실상 적들에게 저 구역을 넘겨주게 된다고 봐야 합니다.”


안보실장의 대답이 끝나자 1초 정도 침묵이 이어진 뒤, 다른 장관들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센터 안은 순식간에 새벽 시장의 경매장처럼 시끄러워졌다. 


“조용히 하세요! 조용!”


대통령 비서실장이 회의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박력 있는 그의 목소리에 센터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평소에도 위압적인 카리스마로 대통령의 손발이 되어주는 그였다. 

정적을 깨고 각료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대답해줘야 우리도 대책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국민안전처 장관이었다. 그가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하나 떠올렸다. 지하 터널에 나타난 괴물이 찍힌 사진이었다.


“이것의 정체가 뭡니까? 국가안보실에서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요?”


안보실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사진만 쳐다봤다. 모른다는 의미의 침묵이 아니라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의 침묵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사진을 들고 있던 국민안전처 장관이 대통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통령님, 진상을 말해주셔야 저희들도 대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번 테러와 이 괴생명체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겁니까? 혹시 지하철역을 폭파시킨 것도 이 괴생명체의 짓입니까? 북한에서 보낸 괴물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대체 이 괴생명체의 정체는 뭡니까?”


비상대책센터는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긴장이 흘렀다. 모두들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현국은 대통령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리는 걸 느꼈다. 사과가 썩어가는 과정을 고속촬영한 것처럼 그의 표정은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잠시 후, 대통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일단 시민들을 구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주십시오. 저를 믿고, 일단 그렇게만 해주세요.”

 

회의는 허무하게 끝났다. 

비상대책센터에 있는 수많은 각료들이 계속해서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했지만, 대통령은 끝내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통령은 몇 가지 지시만 내리고 비상대책센터를 나갔다. 그 지시 중 가장 강조한 건 언론에서 괴생명체에 대한 소식을 다루지 못하게 막으라는 것이었다.


남아 있는 각료들은 대통령을 향해 비난을 쏟았다.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요구하는 대통령에게 실망한 기색들이었다. 이후에 그들은 안보실장을 대상으로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그러자 안보실장 역시 대통령과 똑같이 비상대책센터를 나가버렸다. 이어서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던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도 비상대책센터를 나갔다. 


이제 비상대책센터 안에 있는 사람 중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국정원장과 현국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현국은 몇 번이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들은 국정원장의 말을 기억하며 침묵을 지켰다. 언제까지 이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현국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비상대책센터의 공기가 순식간에 다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진 현국은 도망치듯 절뚝거리며 비상대책센터를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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