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네. 지금 이건 참신하게 미친 거라 봐줄만 해.” 

사람의 목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지금 들려온 건 갓 출소해 복수를 시작하려는 악당 심보만큼이나 시커먼 색이 틀림없다. 한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 인터뷰 있어서 연습 좀 했다.” 
“그래봤자 구(區) 지역 신문이잖아. 그거 누가 보냐?” 


어쩌면 저리 용기를 북돋는 말만 골라서 해줄까. 독설이라면 어디 가
서 져본 적 없는 한준이건만, 저 귀신같은 음성의 주인공에게는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굳이 지금 설명할 필요 없다. 지켜보고 있노라면 바로 답 나오니까.  
한준은 이를 꽉 다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어디 나갔다 왔…….” 

한준은 뒷말을 삼켰다. 입은 지 족히 일주일은 넘은 듯한 검정색 트레이닝복, 마지막으로 머리 감은 날이 바로 저 옷을 입은 날일 거라고 생각되는 떡진 머리, 방금 전 일어났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퉁퉁 부은 얼굴이 모든 상황을 단박에 설명하고 있었다.  

“너 라면 먹고 잤니?”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 


한준은 재빨리 부엌으로 가 찬장을 열었다. 엊그제 사다놓은 라면 개수를 세어보니, 두 개가 빈다. 한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혜준아.” 
“왜?” 


혜준, 한준의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머리 자르면 안 되냐?” 
“포니테일과 짧은 머리는 신성한 존재이니 제발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혜준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풍성하게 흩날리는 혜준의 비듬이 발코니 너머 눈구름이 잔뜩 낀 회색빛 하늘과 겹쳐지며 함박눈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눈구름이 많아지면 내리는 눈의 양이 많아지듯, 혜준의 저 풍성하고 탐스러운 머리칼이 길수록 자체 생산되는 비듬과 머릿기름의 양도 늘어날 것이다. 한준은 열심히 대출금을 갚고 있는 이 소중한 38평짜리 아파트 바닥을 그런 것들로 매끄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뭐야? 말하다 말고 왜 인상 써?” 

정작 인상을 쓰고 있는 건 혜준 본인임을 자각 못 하는 게 분명했다. 한준은 애써 미소 지었다.  

“요즘 트렌드가 숏 커트래. 너 얼굴 작으니까 잘 어울릴걸.” 
“웃기시네. 지금 오빠 말투, 난민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내 이웃으로는 둘 수 없다는 사람들처럼 완전 가식 쩔었어. 갑자기 머리는 왜 자르라는 건데?”  


한준은 매일 밤마다 전 세계 네티즌들과 댓글로 설전을 벌이며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는 저 걸물을 말로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한준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거실 구석에 놓인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 속 영웅들의 피규어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외로이 쓰러져 있는 FBI 출입 카드였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준의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 방년 26세의 남혜준은 초등학교 시절 기하학과 함수를 깔짝대 카이스트 학생들을 가볍게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히게 한 그 비범함은 혜준이 중학교에 입학한 뒤 피시방을 떡볶이 집 다니듯 드나들게 되면서 점차 잠잠해졌다. 하지만 애가 끽해야 게임밖에 더 하겠느냐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몇 달 후, 한준의 집에 정장을 차려입은 외국인 세 명이 방문했다. 외국인이 찾아올 일이라고는 사이비 종교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쫓아내려던 찰나, 한준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FBI에서 왔습니다.”  

처음에는 몰래 카메라인 줄 알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들의 방문 목적을 듣고 난 뒤, 처음에 했던 말은 귀여운 예고편에 불과했음을 알았다. 한준은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얼마 전, 당신의 여동생이 FBI의 주요 기밀 파일을 해킹했습니다.”  

한준은 물론이거니와, 한평생 성실하게 직장을 다니며 범죄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부모님은 혼절 직전 상황까지 갔다. 혜준을 다그친 결과, 걸작 같은 대답이 나왔다.  

“입단 시험 치르느라 그랬어.”  

혜준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
치는 세계적 해킹 집단에 가입하기 위해 입단 시험의 제물로 FBI를 선택했다고 했다. 작업 장소는 피시방이었다.  

“나 최연소 합격자래.”  

혜준은 FBI를 해킹해서 FBI를 찾아오게 만든 주제에,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해맑았다. 혜준은 FBI의 조사를 받게 됐고, 결국 FBI 본사까지 동행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준은 눈물을 꾹 삼키며 여동생의 손을 잡았다.  

“너 IMO대상 상금, 내가 유용하게 쓸게.”  
“아, 그 시시한 대회.”  


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의 절규를 뒤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얼마 후, FBI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몇 년 형인가요?”  

부모님은 벌벌 떨며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형기가 아니라 FBI 사이버 수사국 스카우트 제의였다. 본래 FBI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국 시민권이 필요하지만, 혜준은 특별 케이스니 시민권이고 나발이고는 본사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파격 제안까지 덧붙였다. 사건 당사자인 혜준은 FBI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상관없었다. 혜준에게 중요한 건 블리자드 본사를 마음껏 투어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물론, 한준이 여동생을 걸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천재적인 면모 때문만은 아니다.  
혜준은 FBI 근무 2년 차에 잘렸다. 당연히 업무 태만이나 부족한 업무 처리 능력이 사유였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혜준은 열여섯 살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 자체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단지 사고를 딱 한 번 쳤다.  

“말하다 말고 뭐야? 바보같이 입 쩍 벌리고.”  

갑작스레 들려온 혜준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한준의 의식을 깨웠다.  

“아, 잠깐 지난 일 생각하고 있었어.”  
“지난 일? 뭐?”  
“너 FBI에서 사고 친 거.” 
 

아─ 혜준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프로 게임단 창단?” 

그렇다.  
어릴 때부터 세계적 천재로 주목받았으며 세계적 유명 해킹 집단의 최연소 멤버이자 FBI 사이버 수사국의 최연소 직원이었던 남혜준은 직장 내에서 프로 게임단을 창단하려다가 잘렸다. 당시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사건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면, 다음과 같다. 혜준은 일을 굉장히 열심히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최대한 집중해서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게임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근 및 불필요한 잔업이 있으면 안 됐다. 동료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업무 능력을 보이는 혜준에게 점점 매료되었다. 혜준은 친구들을 모아놓고 대한민국의 게임 문화를 전파했다. 원래부터 컴퓨터를 다루는 일에 익숙했던 이들이었던지라, 적응은 금방이었다. 혜준은 팀원들의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냥 느끼기만 하고 자기 갈 길 갔으면 좋았을 텐데, 문제는 여동생이 원대한 꿈을 꾸었다는 데 있었다.  

─실력을 썩히기 아까워. 프로 게임단을 목표로 삼자.  
혜준의 말은 기름이 되어 팀원들의 열정을 더 크게 불태웠다.  

하지만 그들은─FBI에게 이런 말을 하기 어색하지만, 어쨌든 혜준과 비교했을 때─보통 사람들이었다. 혜준처럼 일하고 게임을 한다는 건 무리였다. 팀원들은 혜준의 실력을 따라잡기 위해 점점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혜준의 뛰어난 전술(?)과 실력에 감화된 요원들 중 진정한 프로 게이머로 거듭나기 위해 FBI를 그만두고 연습에 매진하는 이도 생겼다. 집중력이 저하되자, 사이버 수사국 업무에 허술한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졌다고 판단한 수뇌부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혜준은 ‘
역시 게임은 코리아’라는 이미지를 남긴 채 책상을 빼고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삼 개월 정도 공부하고 수능 쳐서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에 들어갔고, 삼 년 만에 자퇴했다.  
걸물도 이런 걸물이 또 없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라는 명언을 온몸으로 절감하며 살아온 한준이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봉은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야, 그나저나 양심 안 찔리냐?” 


혜준이 물었다. 한준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여전히 바닥에 흩뿌려지는 비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뭘?”  
“오늘 낮에 온 아저씨한테 후려친 부적 값. 심했어.” 


혜준은 떨떠름해하는 목소리였다.  
잠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준과 혜준은 한 팀이다. 단순히 가족이기 때문에 쓰는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준과 함께 ‘일’을 한다. 미남당 2층에는 벽면 한가득 모니터가 설치된 혜준의 작업실이 있다. 업무상의 이유로 종종 거기에 틀어박혀 한준이 점을 보는 광경을 지켜보는데, 오늘따라 뭔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또 시작이다. 이 장사 한두 번 해?” 

한준은 손을 휙휙 내저었다.  

“돈 그만큼 모았으면 됐지. 작작 좀 하셔.” 
“아직 멀었어. 이걸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어.” 


한준은 어깨를 으쓱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혜준이 뒤따라오며 뭐라고 욕을 해댔지만 한준은 혜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서류 가방에서 장부와 오늘 번 돈다발을 꺼냈다. 돈을 셀 때는 최대한 신속하게 손을 놀려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한준은 집중했다. 정산을 시작한 지 삼 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손이 착, 소리를 내며 마지막 지폐를 튕겨냈다. 절반으로 접혀 있던 지폐가 일자로 쫙 펴지면서 한 뭉치의 돈다발이 완성되었다. 오늘의 매출 순익은 이백만 원. 한준은 눈부시게 빛나는 돈다발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혜준이 그런 한준을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사기꾼.”  

뜬금없는 혜준의 말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들이 제법 있을 줄로 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들어준 독자들에게 답례로 
한 가지 고백을 하고자 한다.  

사실, 한준은 점을 전혀 칠 줄 모른다.



-연재 이벤트-
<미남당 사건수첩>연재기간 동안 
캐비넷 서재를 즐겨찾기해주시고
덧글을 남겨주시는 
3분에게 
<미남당 사건수첩>출간본,
10분에게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30분에게
 <엿츠 미니세트>  드립니다.
( 발표: 4월 16일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파이스트리 2018-05-0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거라 생각했다 ^^ 양적은 고급짐을 사랑하는 미남이 점까지 치믄 쓰것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