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발생 1시간 32분 경과 

2호선 선릉역 부근



기찬이는 항상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 두 명—‘주댕이’, ‘헐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과 함께 있었다. 하필이면 저 자식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런 상황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지간해선 반가울 텐데 이 자식들은 하나도 반갑지 않다.  

“이야, 너희들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겁나 반갑다야. 이 난리통에 어째 안 죽고 살아 있었네.”

기찬이가 비꼬듯 말했다. 기찬이의 얼굴은 거뭇거뭇했다. 아마 행렬 앞쪽에 있다가 폭발 때문에 뒤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얼굴의 숯 검댕이나 닦아, 이 새끼야.” 

지태가 기찬이에게 거칠게 말했다.   

“요즘 트렌드거든. 얼굴 까맣게 하는 거.” 

기찬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지태와 연아, 둘 다 기찬이의 실없는 대꾸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서 갇힌 거냐? 역삼? 강남?” 
“말도 마라. 이 형님, 돌아가실 뻔했다. 선릉역 가다가 지하철이 멈춰서 내려서 걸어가는데, 씨발 갑자기 바로 앞에서 불이 나는 거야. 그래서 저 앞에서 사람들이랑 불 끄고 선릉역으로 나가보려고 별짓 다했는데 절대 안 꺼져. 조금 전엔 폭발까지 일어나 죽을 뻔했다. 근데 뭐 알아보니까 지금 2호선 지하철역들 다 무너졌다면서? 우린 그것도 모르고 괜히 저기로 나가보겠다고 불 끄려고 지랄한 거지. 그래서 다 포기하고 졸라 우울하게 뒤쪽으로 넘어온 건데, 너희들이 딱 여기 있네. 너희들 보니까 왜 이렇게 좋냐?”  
“졸라 말 많네, 새끼. 다시 꺼져라. 우린 하나도 안 좋거든.” 

지태의 말에 기찬이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답했다. 그러다 연아의 무릎에 난 상처를 봤는지,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야, 너 다쳤네. 괜찮아?” 

기찬이는 자기가 먼저 말을 걸어놓곤 수줍은 얼굴이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연아가 칼같이 대답했다.   
기찬이는 어어…… 하며 평소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렸다. 나와 지태는 그런 기찬이의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기찬이는 나와 지태를 보면서 잔뜩 인상을 썼지만 그런 모습조차 우스울 뿐이다. 기찬이는 예전에 연아에게 고백했다가 까인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평소엔 조폭 흉내내며 거들먹거리다가도 연아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물론 연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기찬이를 일관되게 차갑게 대했고, 우린 그렇게 기찬이가 까일 때마다 지금처럼 킬킬 웃어댔다. 

“근데 너희들 혹시 이 밑에서 뭐 이상한 놈들 못 봤냐? 괴물인지 뭔지 이상한 놈들이 있다고들 하던데. 막 사람도 죽이고.” 

항상 기찬이와 함께 다니는 똘마니 중 하나인 주댕이가 물었다. 입이 툭 튀어 나와서 주댕이라는 별명이 붙은 녀석이다. 나와 연아, 지태가 서로 쳐다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저기 교대역 쪽으로 계속 뛰어가봐라. 아직 그놈들 있을 거다.” 

내가 대답해줬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다.   

“대박! 단 존슨, 너 그놈들 봤어? 근데 어떻게 안 죽었냐?” 

나는 너는 왜 안 죽었냐고 묻는 이런 새끼에겐 주먹을 한 대 날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 천연덕스럽게 궁금한 얼굴이라 주먹은 참기로 했다. 

“사진 안 찍었냐? 지금 바깥에 그놈들 사진이 몇 장 돌고 있거든. 근데 졸라 멀리서 찍고 흔들리고. 씨발, 심령사진도 그보단 나을 거다. 너희들 찍은 거 있으면 좀 보여줘봐.” 

이번엔 헐크가 물었다. 얼굴이 각지고 덩치가 커서 헐크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쉽게도 피부는 초록색이 아니다.   

“미쳤다고 거기서 사진 찍고 앉아 있냐? 사진 같은 거 없어. 누군지 몰라도 사진 찍을 여유가 있었나 보네. 대단들 하다, 진짜.” 

지태가 말했다.  
평소에 그렇게 사진 찍고 방송 놀이를 해대던 나와 지태, 연아는 괴물들 앞에서 사진 찍을 생각조차 못 했다. 자칫 잘못하면 머리가 날아갈 상황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기찬이와 주댕이, 헐크는 우리에게 괴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 상황은 어땠는지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우리는 귀찮았지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간단히 말해줬다. 기찬이 일행은 우리 얘길 들으며 우와, 대박, 이야 등등 제가 아는 감탄사란 감탄사는 모두 토해냈다. 

“야, 다 이리 모여봐.” 

이야길 다 들은 기찬이가 갑자기 뭔가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가까이 불러 모았다. 나와 지태, 연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아, 빨리 와보라니까. 그놈들 이야기야” 하며 재촉했다. 일단 무슨 얘긴지 들어나보자 싶어 한 발짝 다가갔다. 우리는 기찬이를 중심으로 작은 원 모양으로 모였다.  

“너희들이 본 괴물들 말이야. 북한에서 보낸 놈들이야. 확실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와 지태, 연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기찬이를 봤다. 기찬이가 계속 말했다.  

“북한이 예전부터 DNA 복제 기술 같은 걸 전투 병력에 이용하려고 엄청 투자했거든. 너희들 몰랐지? 북한이 우리 따먹으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었다고. 암튼 북한이 DNA 복제, 유전자, 뭐 그런 기술들 있잖아. 그런 걸로 너희들이 본 그놈들 키워 가지고 땅굴로 보낸 거야. 봐봐. 지하에만 나타났잖아. 안 그럼 지상으로 덮치면 되지 왜 하필 지하로만 왔겠어? 이유는 땅굴밖에 없어. 북한하면 땅굴이지.” 
“그거 어디서 들은 거야?” 

연아가 물었다. 내 기억으론 연아가 기찬이의 말에 관심을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찬이는 연아의 관심이 반가운지 신나서 대답했다. 

“내가 음모론 그런 거에 좀 빠삭하거든. 아까 선릉역 저기 불난 데 건너오기 전에 내가 잘 가는 밀리터리 카페 검색 좀 해봤어. 거기 지금 그놈들 때문에 난리 났어. 사진도 거기에 올라온 거고.” 
“정부 발표는 아닌 거지?” 

연아가 다시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정부에서 그런 발표를 하겠어? 그럼 바로 핵전쟁으로 갈걸? 그럼 서울은 그냥 끝장이지. 완전 불바다가 되는 거야. 아니지. 방사능 바다가 되는 건가? 암튼 바로 북한 소행이라고 발표하면 전쟁이 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정체 모를 테러라고만 하고 국가비상사태 문자 때린 거야. 요즘 세상에 전쟁 터지면 다 같이 죽자는 거잖아.” 

기찬이가 자신의 군사 지식을 자랑하듯 대답했다. 딱히 자랑할 만한 수준도 안 되어 보이긴 했지만.  
나와 지태, 연아는 기찬이의 말을 다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찬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긴 힘들지만 북한과 땅굴 이야기는 그럴듯했다. 괴물들이 지상에는 안 나타나고 지하에만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찬이의 말에 설득력을 더했다.  

그때,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자, 모두 여기 주목해주세요!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주목해주세요!” 

나는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찾기 위해 터널 벽에 내 허리쯤 닿을 만한 곳에 붙어 있는 굵은 전선 위에 올라가 지하 터널을 둘러봤다. 시끌벅적한 인파가 한눈에 들어왔다. 행렬 가운데쯤에서 기관사 복장의 아저씨가 터널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위에 올라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은 누구도 기관사의 외침에 주목하지 않았다. 지하 터널은 여전히 잔뜩 흥분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날뛰느라 소란스러웠다.  

그러자 기관사 옆에 있던 해병대 복장의 남자가 잔뜩 굳은 얼굴로 각목을 들고는 근처에서 난동을 부리던 남자에게 다가가 손에 든 각목으로 힘껏 후려쳤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각목으로 두들겨 맞은 아저씨는 비틀거리며 해병대를 노려봤다. 해병대는 각목으로 아저씨의 몸통을 몇 번 더 후려치곤 그의 머리를 붙잡아 터널 기둥에 처박았다.  

“조용히 하란 말, 안 들려! 이러다 다 죽는다고!” 

해병대가 피투성이가 된 아저씨의 머리통을 붙잡고선 소리쳤다. 확성기를 쓰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지하 터널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해병대를 쳐다봤다. 

“뭐해? 조용히 안 시키고!” 

해병대가 근처에 있던 다른 해병대 남자들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해병대들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위압적인 얼굴과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외쳤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겐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서로 조용히 하라고 외치면서 지하 터널은 본래 간직했어야 할 침묵을 되찾았다. 그제야 기관사가 다시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모든 사람이 기관사를 주목했다. 

“아아! 그럼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마 다들 소식을 들었겠지만, 지금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고, 2호선 지하철역 출구는 모두 막혔다고 합니다! 확실하게 검증된 건 아니지만 본부에 전혀 연락되지 않아 자세히 확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구조대도 언제 올지 기대하기 어렵고요! 저는 아직 못 봤지만 사람들 말로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생명체가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관사의 마지막 말에 적잖이 술렁였다. 이곳에 갇혀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근처 어딘가에 식인 괴물이 존재한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는 기관사가 해결책을 제시해주길 기대하며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여기 모인 분들과 함께 탈출할 루트를 찾아보고 있는데, 우연찮게 여기 신분당선 터널 공사에 참여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신분당선은 강남역에서 환승할 수 있는 전철입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강남역 승강장 부근에 신분당선 터널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고 합니다! 신분당선 터널 공사를 할 때 인부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든 간이 통로인데, 신분당선이 완공된 이후에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놔뒀다고 합니다. 다만 통로의 입구를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놨다고 합니다. 위험해서였겠지요! 아, 그러니까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지금 강남역으로 가서 그 통로를 찾아내기만 하면 저희들 모두 신분당선으로 넘어가 탈출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나의 기대대로 거짓말처럼 해결책이 나오다니! 그런데 진짜 그런 통로가 있을까? 아니, 있더라도 지금도 이동할 수 있는 상태일까? 게다가 강남역이라면 괴물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아까 교대역 부근에서 습격 당한 게 마지막이니 만약 거기서 더 진격해 왔다면 괴물들은 지금은 강남역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기관사의 말을 듣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느라 지하 터널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러자 한 아저씨가 앞으로 나와 기관사가 들고 있던 확성기를 받아선 소리쳤다. 

“아, 제가 직접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계속 떠들었다. 그러자 또 다시 해병대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예,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신분당선 통로에 대해 말씀드린 인부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희망에 찬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으리라. 인부가 이어서 말했다.

“사실은 저도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지하 터널에 들어올 일이 없었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끼리는 그 통로를 개구멍이라고 불렀어요. 상당히 좁은 통로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아마 그 개구멍은 도시철도 직원 분들에게 딱히 관리 대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문 앞에 콘크리트를 발라놔서 그냥 벽처럼 보이기도 할 테고, 관리라는 걸 할 만한 통로가 아니거든요. 개구멍을 완전히 없앴을 수도 있습니다.” 

인부가 잠시 말을 끊자 사람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지금 놀리는 거냐며, 왜 괜히 사람 헷갈리게 하냐고 인부를 타박했다. 하지만 인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없어졌을지 몰라도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으면, 전 거기에 매달릴 겁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 가만히 있으면 99퍼센트 죽습니다. 교대역 쪽에 괴물이 있다고 하셨죠? 만약에 그 괴물이 여기까지 밀고 오면 우린 그냥 다 죽는 겁니다. 차라리 그놈들이 오기 전에 개구멍을 찾아서 도망가는 게 훨씬 낫죠.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여러분 자유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따라오건 말건 저는 지금 강남역으로 가서 개구멍을 찾을 겁니다. 막혔으면 뚫어서라도 갈 겁니다. 살 수 있는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으면 전 거기에 매달리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집에 와이프랑 딸내미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곳에서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인부는 가족이 생각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옆에 있던 기관사에게 확성기를 건네주고는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 갔다.  

인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된다는 듯, 서로 눈치를 봤다. 기관사는 자신과 해병대들도 강남역으로 가서 개구멍을 찾아볼 거라며, 여기 선릉역에 남아 있을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망설이다가 대부분 강남역으로 가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우린 어떻게 할까?” 

나는 터널 벽면에 붙은 굵은 전선에서 내려와 지태, 연아에게 물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괜찮을까? 괜히 강남역으로 갔다가 또 괴물들 만나면 나 진짜 돌아버릴 거 같은데…….” 

지태가 걱정스레 말했다. 

“하긴. 누나도 같이 가야 하니까 또 괴물이 나타나면 진짜 위험하긴 해. 누난 지금 움직이기도 힘들잖아.” 

내가 옆쪽에서 앉아 쉬고 있는 누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럼 여기서 그냥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연아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이에 지태가 대꾸했다. 

“오긴 오겠지. 아까 네가 그랬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갇혔는데 위에서 모를 리 없다고. 누구든 구조하러 올 거라고.” 
“그거야 그렇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잖아.” 

지태의 말에 연아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히 이동하다가 그놈들을 만나느니 여기서 숨어 있을 곳을 찾는 게 나을 거 같아. 구조대가 올 때까지.” 

지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여기 남아 있는 게 옳은 선택이려나? 

“지랄들 한다.” 

느닷없이 기찬이가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와 지태, 연아는 기찬이를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냐?” 

내가 기찬이를 한 대 칠 기세로 말했다. 기찬이는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 좀 해라, 이 병신들아. 2호선이 다 무너졌으면 그 안에 갇힌 인간들이 얼마나 많겠냐? 뭐 2호선 말고 다른 곳도 많이 무너졌다면서. 아마 구조대보다 구조해야 할 사람이 훨씬 더 많을걸. 그런데 뭐? 숨어서 구조대를 기다려? 단 존슨, 네가 그런 놈이니까 코치가 주는 대로 약 처먹다가 도핑 걸린 거 아냐. 그리고 지태 너는 약이라도 좀 처먹고 기록 세워야 되지 않겠냐?” 

지태가 발끈해서 기찬이에게 다가가는데 그보다 내가 빨리 기찬이의 멱살을 쥐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냐?” 

그러자 연아가 다가와 내 팔을 잡으며 말렸다. 

“단아, 그만해. 됐어.” 

나는 연아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기찬이에게서 손을 놨다. 기찬이는 그런 나를 보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저 면상을 갈겨버려야 하는데. 

“연아야, 넌 왜 이런 놈들이랑 같이 다니냐? 그러지 말고 이제 나랑 놀자. 이 새끼들도 엄청 웃겨.” 

기찬이가 주댕이와 헐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댕이와 헐크는 마치 자신들의 매력을 보여주려는 듯 장난스럽게 연아에게 윙크했다. 연아는 벌레 보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기찬이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난 너 같은 애들이 제일 싫어.” 

기세등등하던 기찬이는 금세 상처받은 얼굴이 됐다. 연아, 나이스! 더 심하게 상처 줘도 되는데!  

“근데 기찬이 말이 일리 있는 것 같긴 해. 구조대가 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마 서울 지하가 다 난리 났을 테니까……. 구조대만 믿고 기다리기엔 기약이 없어.” 

연아가 말했다. 풀 죽어 있던 기찬이가 그 말을 듣고는 금세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순정남 새끼. 연아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구나.  

“얘들아,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누나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어느새 누나가 우리 옆에 와서 서 있었다. 

“언니는 어떻게 하려고요?” 

연아가 누나에게 물었다.  

“난 강남역으로 가볼래.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 

누나가 우리 셋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말했다. 누나는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아니에요, 언니. 그럼 우리랑 같이 가요. 우리도 강남역으로 갈 거예요.” 

연아가 말하자 지태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뭐? 우리 진짜 가기로 한 거야? 진짜? 기찬이 저 새끼 말 듣고 마음 바뀐 거야?” 

기찬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지태를 조롱하듯이 쳐다봤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리고 언니 몸 안 좋으니까 강남역까지 차 태워드려야지. 언니, 지프랑 스포츠카, 어떤 거 타실래요?” 

연아가 지태와 나를 가리키며 누나에게 말했다. 지태와 나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는, 함께 기찬이를 돌아봤다. 

“여기 초소형차 한 대 더 있어.” 

지태가 키가 작은 기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눈치 없는 기찬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연아가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누나는 장난치는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그럼 다 같이 강남역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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