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발생 21분 경과

2호선 서초역 ~ 교대역 구간


지하철에 들러붙은 괴물들은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이고 등에 날개가 붙어 있는 게 꼭 서양 전설에 나오는 가고일처럼 보였다. 가끔 날개를 펼쳐 한번에 먼 거리를 날아가기도 하고, 네 발을 이용해 빠르게 천장과 벽을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놈들은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빠르게 이동하면서 지하철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었다. 우리가 저곳을 탈출한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나와 지태, 연아가 괴물들로 뒤덮인 지하철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또 다시 불이 꺼졌다. 암흑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괴물들의 포효만 들려왔다. 빌어먹을 정전이 반복되고 있었다. 불빛이 사라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양옆에 있는 연아와 지태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빨리 여기를 뜨자!”


둘에게 소리치며 돌아섰다. 터널 저 앞쪽에 정전되지 않은 지하철역이 보였다. 


“저기! 무슨 역이지는 몰라도 저기로 가자.”


왼쪽에서 지태가 소리쳤다. 나는 양손으로 각각 지태와 연아를 붙잡고 불빛이 보이는 지하철역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교대역일 거야! 지하철 뒤쪽이니까.”


오른쪽에서 연아가 소리쳤다. 방금 잠시 불빛이 들어왔을 때 확인한 바로,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은 우리가 타고 있던 지하철 뒤편이었다. 지하철이 조금 전 지나친 역이 교대역이니까, 저 앞에 불빛이 보이는 역은 교대역일 것이다.


우리 셋은 서로의 손을 잡고 나란히 달렸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자 지태와 연아가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바닥을 비췄다. 바닥엔 검은 자갈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쇠로 된 지하철 선로가 드러나 있었다. 우린 바닥을 보면서 넘어지지 않게 선로를 따라 달렸다. 우리 뒤로 지하철이 멀어지면서 사람들의 비명과 괴물들의 포효도 조금씩 멀어졌다. 앞쪽에 우리보다 먼저 지하철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스마트폰 불빛들이 흔들거렸다. 


교대역이 가까워질수록 승강장 불빛이 강해지면서 우리가 달리는 지하 터널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하 터널은 사각형 모양이고, 터널 가운데 커다란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을 지나가면 반대편 선로가 나오는 구조였다. 여태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기둥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교대역 승강장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교대역은 한가운데 양방향 선로가 설치되어 있고, 선로를 중심으로 바깥쪽에 승강장이 있는 구조다. 그런데 승강장 곳곳이 붕괴되어 선로와 승강장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히 천장에 설치된 형광등만은 무사해 승강장의 피해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까 지하철이 멈춘 다음에 폭발음 같은 게 들렸잖아. 그게 저기가 무너지는 소리였나 봐.”


연아가 헉헉대며 말했다. 


“설마 밖으로 못 나가는 건 아니겠지?”


지태가 불안한 듯 물었다.


“일단 가보자. 이제 다 왔으니까.”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다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태의 물음에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교대역에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건 생각보다 더 처참하게 부서진 승강장의 모습이었다. 폭격을 맞거나 강력한 지진이 휩쓸고 간 것 같은 광경이었다. 스크린 도어의 유리는 산산조각 나 선로와 승강장 바닥에 흩뿌려져 여기저기가 반짝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커다란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승강장 벽은 가혹한 신이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계단은? 계단은 어떻게 됐어? 우리 못 나가?”


지태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우린 교대역 승강장에 있어야 할 계단을 하나하나 다 찾아봤다. 계단 주위에는 계단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이 함께 무너져 계단을 올라가면 나와야 할 출구가 붕괴 잔해에 막혀 있었다. 모든 계단이 그랬다. 눈 씻고 찾아봐도 교대역 승강장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모두 막혀 있었다.


“젠장! 여긴 왜 이렇게 된 거야!”


지태가 울분에 차 소리쳤다. 


“아까 그 괴물들이 여기를 이렇게 만든 걸까?”


연아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연아는 궁금한 게 생기면 답을 찾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게 연아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이다.


“그건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우리가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말이야.”


내가 대답했다. 연아가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단 살아야 할 일 아닌가. 연아는 나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이거 좀 치워달라고! 거기 아무도 없어!”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우리 말고도 지하철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막혀버린 출구 앞에서 바득바득 외쳤다. 혹시라도 바깥에 누군가 있다면 저들의 목소리를 듣고 구조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저기, 학생들! 좀 도와줄래요?”


응? 분명히 ‘학생들’이라고 했는데……. 우릴 부른 건가? 

나는 외침이 들린 쪽을 돌아봤다. 임신해서 배가 불룩한 누나가 잔해 더미에 깔린 남자를 구하려는 듯,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힘에 부친지 낑낑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함께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지태와 연아도 달려와 함께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어올렸다. 아래 깔려 있던 남자가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다리가 부러졌는지 혼자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연아가 남자의 상체를 잡고는 잔해 더미에서 꺼냈다. 나와 지태, 누나가 손을 놓자 쿵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졌다. 잔해 더미에서 빠져 나온 남자는 다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119 구조대원이나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해줘야 했다.


“고마워요.”


누나는 우리에게 짧게 인사를 하곤 잔해 더미에 깔린 또 다른 사람에게로 갔다. 누나는 계속 잔해 더미를 치우면서 아래 깔린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줬다. 문득 주위를 보니 승강장 곳곳에 붕괴된 잔해들에 깔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평소와 다름없이 승강장에서 2호선 지하철을 기다리던 사람일 것이다. 밖으로 나갈 출구만 찾느라 이들을 발견하지 못한 나 자신을 꾸짖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오더니 멀리서 괴물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우리가 탈출한 지하철 방향으로 정전되어 어두컴컴한 터널이 보였다. 마치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새카만 터널 속에서 무언가가 몰려오고 있었다. 괴물들이다. 도망가야 한다.


“강남역으로 가자! 그 새끼들이 또 오는 것 같아!”


나는 지태와 연아에게 소리쳤다. 

승강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어두컴컴한 터널을 쳐다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강남역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우리 셋도 강남역 방향으로 달렸다. 그런데 여전히 승강장에서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을 도와주느라 낑낑대는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괴물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언니! 저기 괴물들이 와요! 빨리 도망가요!”


내가 누나를 도와줘야 하나 그냥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연아가 누나에게 외쳤다. 누나는 우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어두컴컴한 터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터널 속에서 또 괴물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분명히 오고 있었다, 괴물들이.


누나는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강남역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나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불룩한 배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달리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안 돼. 혹시 지금 산통이 온 건가? 


“야, 저 누나 도와줘야 되는 거 아냐?”


지태가 달리면서 물었다. 우리 셋 다 강남역 방향으로 가면서도 계속 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이번엔 고민하지 않고 누나에게 달려갔다. 누나는 배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뛰면서 나를 쳐다봤다. 


“가만히 있어요!”


내가 소리치고는 양팔로 누나를 눕히듯 안아 올렸다. 누나는 놀란 얼굴이 되더니 옆으로 누운 모습으로 나에게 안겼다. 이 정도 무게면 달릴 만하다. 나는 누나를 안아 올린 채 연아와 지태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괜찮겠어요?”


누나가 아픔을 참느라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물었다. 


“괜찮으니까 내 목에 팔 감으세요! 그게 더 안전해요!”


나는 달리면서 대답했다. 누나가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아주 약간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괜찮겠냐?”


지태가 함께 교대역 승강장을 빠져 나가면서 물었다. 


“괜찮아! 이따 힘들면 바통 터치하자!”

“오케이.”


지태와 내가 번갈아 가며 누나를 들면 충분히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강남역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정하에.


다행히 강남역으로 가는 지하 터널은 정전되지 않았다. 터널 벽면의 형광등에 쭉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번 구간은 두 개의 선로 사이에 기둥이 없어서 사각형 터널이 탁 트여 있었다. 간만에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조금 더 달려가니 다시 터널 중앙에 기둥이 나왔다. 우린 오른쪽 선로로 들어가 계속 달렸다. 곧 완만한 커브 길이 나왔다. 커브 길에 들어서자 갑자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가 많았다.


“잠깐만! 잠깐만요! 잠시만 멈춰보세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옷차림으로 봐선 지하철 기관사 같았다. 우린 어쩔 수 없이 급정거하듯 사람들 앞에 멈춰 섰다. 지태가 맞은편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쪽으로 가면 안 돼요! 빨리 저쪽으로 도망치세요! 이쪽으로 가면 다 죽어요!”


그러자 기관사가 우리에게 되물었다.


“아니, 왜 다 죽습니까? 좀 전에 지나간 사람들도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가버렸어요. 이쪽으로 가봤자 강남역도 역삼역도 다 막혔다고 하는데도 가버리더라고요.”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우리가 가려고 하는 강남역이랑 역삼역도 막혔다고?


“게다가 그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더라고요.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기관사가 이어서 물었다. 이에 연아가 나서서 대답했다.


“이쪽으로 가셔도 교대역이 막혀서 못 나가요. 그리고 교대역 뒤쪽에선 괴물들이 사람들 죽이고 있어요. 절대 이쪽으로 가지 마세요.”


연아의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괴물……이라고요?”


기관사 역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이럴 시간 없어요! 안 돌아갈 거면 우리라도 지나가게 비켜주세요! 여기 산모 있는 거 안 보이세요?”


다급해진 연아가 한 손으로 누나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 이쪽으로 가봤자 강남역도 막혔는데…….”


기관사가 계속 강남역 방향으로 가려는 우리를 말렸다.  


“가다 보면 어딘가는 뚫려 있겠죠! 비키세요!”


또 다시 연아가 소리쳤다. 비키지 않으면 맞은편 사람들을 때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때, 갑자기 강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이어서 타타타탁! 하고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뛰어!”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치고는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어어,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비켜요! 비켜!”


나는 막무가내로 인파를 뚫고 계속 전진했다. 내 뒤로 지태와 연아가 따라왔다. 잠시 후 뒤통수 너머에서 키에에에엑! 하는 괴물의 포효와 사람들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괴물이다. 바로 뒤에 또 괴물들이 나타난 거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패닉 상태가 되면서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누나를 안고 있는 터라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지태야! 길 좀 뚫어라!”


나는 고개를 돌려 지태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지태가 앞으로 달려나오며 온몸으로 사람들을 밀어냈다. 중학교 때였나. 패싸움에 휘말렸을 때도 지태가 이렇게 상대편 애들을 밀치며 길을 뚫은 뒤 함께 달아난 적이 있었다. 


“연아야, 잘 따라와! 누나, 꽉 잡으세요!”


나는 뒤에 있는 연아와 품에 안긴 누나에게 소리쳤다. 그러곤 지태처럼 으와아아악! 기합을 넣으며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질주했다. 다닥다닥 몰려 있는 사람들을 머리와 어깨로 마구 밀치며 전진, 또 전진했다. 그러는 한편 품에 안은 누나가 사람들에게 부딪혀 다치지 않도록 더욱 꽉 끌어안았다. 뒤쪽은 비명과 포효가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2호선 지하철에서 겪었던 끔찍한 상황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1분쯤 무작정 사람들을 뚫고 달리자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눈앞에 직선 길이 펼쳐졌다. 행동반경이 조금 넓어졌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강남역 쪽으로 뛰어갔다. 직선 길이 끝나고 커브 길을 한 번 더 지나가자 강남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관사의 말대로 강남역도 모든 출구가 막힌 것 같았다. 교대역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을까 봐 우린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모든 출구는 막혀 있었다. 잔해 더미에 깔려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었다.  


“잠깐만……. 나 여기서 좀 내려줄래?”


누나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통증 때문에 괴로운 얼굴이었다.


“왜요? 여기도 막혔어요. 더 가야 돼요.”

“아니, 저 사람들 몇 명이라도 좀 도와주려고…….”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누나는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자기도 아프면서 누굴 도와주겠다는 건가? 그보다 지금 여기서 한두 사람 잔해 더미에서 구해낸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빨리 바깥으로 나가서 119 구조대원이나 의사를 불러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누나는 이제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며 계속 내려달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누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누나는 심호흡하고는 잔해 더미에 깔린 어느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낑낑대며 치웠다. 


“왜 그래? 누나 놔두고 가려고? 이제 내가 안을까?”


지태가 강남역 승강장을 둘러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누나가 여기 깔려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며 내려달랬어.”

“또? 자기도 아프면서 왜? 저 사람들 구해줘봤자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지태 역시 누나를 돌아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연아는 누나를 보자 함께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는 교대역 쪽 지하 터널을 쳐다봤다. 괴물들을 피해 도망쳐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괴물들이 쫓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 내가 지태에게 말했다.


“일단 나도 조금만 도와줄게. 넌 혹시 괴물들이 오는지 망 좀 봐줘.”  

 

머리로는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 몸은 누나와 연아를 도와주러 가고 있었다. 지태는 알겠다며 우리가 도망쳐 온 터널 쪽을 바라보면서 괴물들이 다가오는지 감시했다. 


나와 연아, 누나는 힘을 합쳐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몇 명 더 구조했다. 그들은 대부분 뼈가 부러지거나 중상을 입어 괴로워하면서도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움직이기 힘든 그들을 위해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 다시 가자.”


누나가 말했다. 나와 연아는 그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터널을 감시하고 있던 지태에게 다시 출발하자고 소리쳤다. 내가 누나를 다시 안으려 하자 누나는 괜찮다며, 살살 뛰어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지태가 와선 넉살 좋게 웃으며 소리쳤다. 


“에이! 우리, 육상 선수예요! 같이 뛰면 누나, 우리 못 쫓아와요!” 


그러면서 누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어서 연아도 소리쳤다.


“언니, 얜 지프, 쟨 스포츠카라 생각하면 돼요! 언니가 타고 싶은 대로 골라 타세요!” 


그러곤 차례대로 지태와 나를 가리켰다. 투척 선수인 지태와 단거리 선수인 나를 적절히 비유한 말이었다. 누나는 못내 알겠다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미소였다.

우린 육상 훈련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갔다. 나와 지태는 이렇게 달리는 것이 일상이라 괜찮았지만 연아는 점점 지치는지 헉헉댔다. 


“스포츠카 한 번 탈래?” 


내가 연아에게 농담을 던지자 그녀는 얕보지 말라며 더 빨리 달릴 수도 있다고 큰 소리쳤다. 연아는 지는 것을 무지 싫어하는 성격이다. 


“얼마나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 한번 볼까?”


나는 연아의 등을 밀며 속력을 냈다. 그러자 연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이 바보야! 힘들다고!”


하지만 그녀는 기어이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와 지태의 속도에 맞춰 계속 뛰었다. 역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니까.


대략 10분쯤 뛰어가자 역삼역이 나왔다. 기관사의 말대로 역삼역도 폐허가 되어 모든 출구가 막혀 있었다. 누나는 이번에도 잔해 더미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했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와 지태, 연아가 나서서 몇 명을 도와줬다. 그러곤 바로 다음 역인 선릉역 방향으로 출발했다. 이번엔 내가 누나를 안았다.


선릉역으로 가는 지하 터널은 이제까지의 사각형 지하 터널과는 달리 아치형 터널이었다. 가운데 기둥도 없고 직선 길이 쭉 이어져 있어서 시야가 탁 트였다. 사람들의 통화하는 소리와 자갈 밟히는 소리가 터널에 울려 퍼졌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선릉역에는 혹시 위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뚫려 있지 않을까 기대됐다. 기관사도 강남역, 역삼역은 막혔다고 했지만 선릉역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까. 추측건대, 그 사람들은 역삼역과 선릉역 사이에서 지하철이 멈춰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하다가 역삼역 방향으로 걸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선릉역은 출구가 뚫려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안정되자 우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고 자동 응답 서비스로 넘어갔다. 지금 시각은 오후 6시 30분. 엄마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있을 시간이다. 연아가 인터넷을 검색해본 바로는 서울의 모든 지하철이 운행을 멈추면서 지상에서는 교통난이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엄마는 지금 꽉 막혀버린 도로에 갇혀 있는 신세일 것이다. 우리는 잠깐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엄마가 아마 버스에서 졸고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졸다가 버스 종점까지 간 적도 있는 엄마니까. 어쩌면 엄마는 서울이 이 모양이 됐다는 것도 모를 수 있다. 괴물은 지상에는 전혀 출몰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선릉역에 거의 가까워지자 다시 중앙에 기둥이 나타나고 터널 모양도 사각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파가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선릉역 앞 지하 터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지? 혹시 이거 줄 서 있는 건가? 선릉역 계단으로 나가려고?”


지태가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승강장에는 출구가 몇 개 없으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나가려면 꽤 오래 걸릴 거야.”


내가 지태의 말에 대답했다. 

우린 사람들 뒤쪽에 다가가 무슨 상황인지 물어봤다. 그사이 나는 누나를 바닥에 내려 벽에 기대앉을 수 있게 해줬다. 누나의 안색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분들도 방금 여기 왔는데,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대.”


지태가 말했다. 하긴 행렬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조금 전에 여기 도착했을 테니,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행렬 앞쪽에 가야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겠지.


셋 중 키가 큰 편인 내가 고개를 빼고 앞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행렬이 꽤나 길어서 앞쪽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 장막을 덮어놓은 것처럼 행렬 앞쪽은 시커멓기만 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여. 저 앞엔 전등이 나갔나 봐.”


까치발을 한 채 내가 말했다.


“단아, 나 좀 들어봐. 내가 한번 볼게.”


연아가 말했다. 그 말에 바로 연아의 허리를 감아 들어올렸다. 내 머리 위로 우뚝 솟은 연아가 앞쪽의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후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연아가 찍은 사진을 확대하니 흐릿하긴 해도 행렬 앞쪽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앞쪽이 어두컴컴해 보였던 건 전등이 나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커먼 연기였다. 시커먼 연기 사이로 불타는 지하철과 선릉역 승강장이 보였다. 우리가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선릉역은 화재로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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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 2017-10-1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같은 전개네요. 뒷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브로캉 2017-10-2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출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테러 발생  

2호선 지하철  


서초역으로 향하던 지하철이 급정거하자 서서 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졌다. 의자 앞에 서 있던 나는 재빨리 한 손으론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내 쪽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연아와 지태를 껴안았다. 나는 끄응, 작게 신음을 흘리며 내 몸에 실린 지태와 연아의 몸무게를 감당해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와르르 넘어지는 와중에도 우린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다. 


덜커덩. 지하철이 완전히 멈춰 서자 우린 균형을 잡으며 똑바로 섰다. 넘어진 사람들도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는 불평이 차량 안을 가득 채웠다. 지태도 몸을 추스르며 한마디 보탰다. 

“아, 무슨 브레이크를 이렇게 밟아? 기관사 잘라야 되는 거  아냐?” 

나와 연아는 몸을 추스르면서 지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리서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쿠쿠쿵. 쿵…… 쿵, 쿠쿵……. 
땅이 흔들리는 건지 약간의 진동도 느껴졌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인가?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우린 사뭇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잠시 지하철 기관사의 안내방송을 기다려봤지만 어색한 침묵 속에 몇몇 사람들의 잡담만 오갔을 뿐이다.   

“이거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빨리 나가야 되는 거 아닌가?”  
“지진 났나?”  
“그냥 문 열고 나갈까?”  
“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아, 무슨 일인지 빨리 안내를 해주든가 해야지 뭐하는 거야?”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는 게 느껴졌다.  

“얘들아, 이거 봐봐.” 

연아가 스마트폰을 내밀며 말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연아가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 띄워져 있었다. 게시판에는 새로운 글이 빠른 속도로 업로드되고 있었다. 최신 업로드 글 제목에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었다. ‘전쟁’, ‘테러’, ‘지진’, ‘재난’, ‘서울’ 등등. 설마 지금 정말 서울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연아가 게시판의 글 하나를 터치하자 내용이 떠올랐다. 

「씨발, 전쟁이든 테러든 실제 상황 같다. 다들 서울 떠라.」    

연아가 다른 글을 터치했다. 

「그냥 지진 같은데. 서울 사람들 지진 겪어본 적 없어서 오버하는 듯. 이 정도 진동이면 진도 몇이려나.」 

또 다른 글을 터치했다. 

「나도 폭발 소리 들음. 뭔가 터지긴 터짐. 제대로 된 정보 아는 사람?」 

그 외에도 게시판엔 전쟁과 테러, 지진을 의심하는 글들이 무서운 속도로 업로드되고 있었다. 그중 ‘속보 떴다. 원인 파악 중이란다’라는 제목의 글이 뜨자 연아가 바로 터치했다. 속보 기사로 이동하는 링크 주소가 떴다. 또 한 번 터치했다. 속보 기사가 화면에 떴다. 뉴스 기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속보] 서울 지하철 폭발 사고’라는 제목으로, 서울 시내 지하철과 지하철역 곳곳이 폭발했으며 정확한 원인과 사고 규모를 파악 중이라는 짤막한 내용만 적혀 있었다. 고작 두 줄짜리 기사였다.  

“아, 그냥 폭발 사고인 거야, 아님 진짜 뭐 테러라도 터진 거야?” 

지태가 답답한 듯 물었다. 

“지진일 수도 있다고 하잖아.” 

내가 다른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전쟁이 난 걸 수도 있지.” 

이번엔 연아가 다른 가능성을 말했다. 
순간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극도로 예민해졌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얘들아……, 이거 좀 봐봐.” 

잠시 후 연아가 다시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아의 표정이 더 없이 심각했다. 스마트폰 화면엔 아까 지하철도 레이스를 생방송했던 연아의 페이스북 계정이 띄워져 있었다.  
  
「연아님, 지금 당장 지하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오세요. 안 그럼 다 죽습니다.」 

연아의 팬이 남긴 댓글이었다. 나는 연아와 지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마 내 두 눈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이거 무슨 개소리냐? 

그때 갑자기 지하철 안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사람들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곤, 침묵.  
코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상태가 된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거운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암흑은 빛만 삼킨 게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도 삼켜버렸다. 지하철 바깥 지하 터널을 밝히던 형광등도 꺼져버려 주위엔 희미한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린 밀폐된 터널의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혔다.  

연아는 스마트폰 화면의 불빛으로 나와 지태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떴다 반복하면서 어둠에 적응하려 했다. 그러나 사방엔 어둠, 어둠뿐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연아와 지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안 곳곳에서 불안해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켜 촛불처럼 빛을 밝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이 암흑 속이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나의 두 눈은 어둠 속을 방황하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 점에 멈췄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지하 터널이 펼쳐져 있었다. 지하 터널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나의 시선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지하 터널의 어둠에 정박되어버렸다. 그 속에서 뭔가가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능한 한 눈을 크게 뜨고 창문 너머 지하 터널을 살펴봤다. 시력의 한계 때문인지 온통 새카맣기만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응시했다. 그 순간, 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게 움직였다. 커다란 짐승 같기도 하고, 덩어리 같기도 한 무언가가……. 그다음엔, 내 착각일까.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다. 등골이 쭈뼛했다. 무언가가 창밖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지하철 안으로 들어올 텐데, 지금 우리 위험한 거 아닌가?   

그때 팟, 하고 다시 전등이 켜지면서 지하철 안이 밝아졌다. 주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하철 바깥에도 형광등이 켜지면서 지하 터널이 훤히 보였다. 다행히 터널엔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괜찮아?” 

연아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괜찮은 척 되묻자 연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퍽이나. 귀신 한 다스는 본 것 같은 얼굴이야, 너.” 

내 얼굴이 그런가? 나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쳐다봤다. 확실히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 같긴 했다. 

“아니……. 지하 터널에 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시 지하철의 전등이 꺼지며 암흑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이번엔 침묵하지 않았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불 켜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의 예민함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지하 터널의 형광등도 모조리 꺼져 다시 완전한 암흑 세상이 됐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꺄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하철 곳곳에서 연이어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이 찢어질 듯 커져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쏟아지는 비명을 뚫고 바로 옆에서 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콰쾅! 콰콰쾅! 무언가가 지하철을 부수려고 하는 건지 사방에서 둔탁한 충격음이 들리면서 지하철이 흔들렸다. 

“꺅! 흔들리잖아! 뭐야, 지금!” 

이번엔 연아의 목소리였다.  

“다 손 잡아! 빨리! 절대 놓지 마!” 

내가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연아의 팔을 더듬어 손을 잡았다. 콰쾅! 쾅! 콰콰쾅! 우리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몸의 균형을 잡았다. 여전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새카만 암흑의 세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와장창창! 콰쾅! 소리를 내며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창문이 깨지면서 파편이 튀었다.  

“아악!”  

파편이 튀었는지 연아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으아아악!” 하며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TV를 꺼버린 것처럼 남자의 비명이 뚝 끊어지고, 와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키에에엑! 하며 기괴한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지하철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나는 그 무언가에 부딪히면서 연아의 손을 놓치고 튕겨 나갔다.   

“꺄악! 단아!” 

연아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날 밀쳐낸 무언가는 덩치도 크고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몸의 중심을 잃고 핀볼처럼 지하철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혔다. 사방에서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수많은 비명이 들려왔다.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씨발!” 

나는 어둠 속에서 팔을 휘휘 저으며 뭔가 잡을 것을 찾았다. 장님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의자 근처에 있는 기다란 봉처럼 생긴 손잡이였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는 퍽퍽 부딪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했다.  

“아, 밀지 좀 말라고!” 

나는 짜증스럽게 소리치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겨우 몸의 균형을 잡고는 연아와 지태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선 귀를 찢을 듯한 비명만 들려왔다. 너무 어두워서 뭐가 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 불빛이 여기저기서 흔들렸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몇 바퀴를 빙빙 돌다 보니 방향감각도 상실해버렸다. 제길, 내가 애들이랑 어느 쪽에 서 있었지?  

“이거 뭐야? 비켜! 으아악!” 

바로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동시에 키에에에엑!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콰직! 으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이어졌다. 소리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대체 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 소리에 주위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내가 있는 쪽으로 몰려 왔다.  

“저리 비켜!”  
“이거 놔!”  
“밀지 말라고!”  
“야, 이 개새끼야!”  
“잡지 마세요!”  
“어딜 잡아!”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뒤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는 도리 없이 손잡이를 놓치고 그들 속에 파묻혀 쓸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쿠쿵! 쿵! 쿵! 쿵! 쿵! 하면서 지하철의 바닥, 벽, 천장을 무언가가 뛰어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소리의 크기로 봐선 육중한 무게일 것 같은데 움직임이 매우 민첩했다. 곧 키에에에엑! 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체가 뭔진 몰라도 한두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이었다. 사람들의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얼굴에 끈적한 액체가 흩뿌려졌다. 비릿한 냄새가 났다. 혀에 닿는 액체에선 쇠 맛이 났다. 피, 피였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으아악! 저리 가!” 
“안 돼! 살려주세요! 제발!” 
“끄아아아악!” 
“오지 마! 살려줘! 아악!”  

지하철은 처절한 비명으로 휩싸인 도살장과 다를 바 없었다. 흔들리는 스마트폰 불빛 사이로 정체 모를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찰나였지만 정확히 봤다. 커다란 몸집에 온몸이 까만 털로 뒤덮인 괴물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어느 남자의 머리를 와드득 씹고 있었다. 와드득! 아까부터 계속 들려온 저 소리가 사람 머리를 씹어 먹는 소리였구나!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연아의 팬의 댓글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지하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오세요. 안 그럼 다 죽습니다.」 

“단아! 어디 있어? 단아!”  
“대답해! 강단이!” 

어디선가 연아와 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인가? 아비규환 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오다니.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선 비명과 포효만 들려올 뿐, 두 사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야? 둘 다 어디에 있는 거야? 

“나 여기 있어! 연아야! 지태야!”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람들의 비명뿐이었다.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지만 어둠 속에서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발에 물컹하고 무언가 밟히는가 싶더니 쭉 미끄러져 넘어졌다. 몸을 받치느라 바닥에 손을 짚었는데, 누군가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화들짝 놀라 손을 뿌리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마트폰 불빛이 내 손목을 잡은 이를 비췄다. 그를 본 순간, 나는 TV 정지화면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의 허리 아래로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의 허리 단면은 맹수가 잡아 뜯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사람의 피부가 저렇게 찢어발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살려줘……, 제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또 한 번 숨이 멎을 뻔했다. 지태였다. 두뇌 회로가 정지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지태……. 지태야……. 네가 왜……?  

나는 하반신이 뜯겨 나간 지태에게 다가갔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그가 지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지태가 아니라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나 달렸다. 지태인 줄 알았다. 지태가 그렇게 된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지하철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제길, 갑자기 왜 이런 상황이 된 거야……? 난 그냥 육상 그만두고 하루 재미있게 놀려고 한 것뿐인데……!  

그때, 누군가가 마구 달리는 나를 붙잡았다. 괴물인가 싶어 바로 밀쳐냈는데 그럴수록 완강하게 날 껴안았다.  

“나야, 지태! 나라고, 인마!” 

분명히 지태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랜턴 불빛에 비쳐 지태의 얼굴이 보였다. 랜턴 불빛이 옮겨 가더니 바로 옆에 있는 연아의 얼굴을 비췄다. 랜턴을 들고 있는 사람은 연아였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 얼어붙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둘 다 살아 있었구나. 

키에에에엑! 바로 옆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연아가 랜턴을 비췄다. 흔들리는 랜턴 불빛 사이로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는 괴물이 보였다. 

“씨발! 빨리 나가! 빨리!” 

지태의 외침에 랜턴을 든 연아가 뒤로 달려가 지하철 아래로 뛰어내렸다. 누군가 지하철 문을 열어놓았다. 지태가 정신없는 나를 붙잡고 달려가 함께 지하철 아래로 뛰어내렸다. 쿠쿵! 하고 뒤쪽에서 돌진해오던 괴물이 우리가 서 있던 곳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지태와 난 소리를 지르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레 딱딱한 바닥에 부딪친 우리는 악,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뒹굴었다. 지하 터널 바닥이 심하게 울퉁불퉁해서 뒹구는 내내 온몸이 여기저기 쑤셨다. 그 와중에도 지태는 내 팔을, 나는 지태의 팔을 놓지 않았다. 나와 지태는 서로에게 괜찮냐는 말을 하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연아야, 어디 있어? 연아야!” 

지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도 주위를 둘러보며 연아를 찾았다. 하지만 어둠은 그녀의 위치를 순순히 드러내주지 않았다.  

“연아야! 이연아!” 

나도 외쳤다. 그러자 누군가 한 팔로 내 몸을 더듬으며 감쌌다. 

“랜턴을 놓쳤어! 빨리 가자!” 

연아의 목소리였다.  

“야, 연아 너 맞지? 지금 단이 잡은 거지?” 
“맞아! 빨리 가자!” 

어둠 속에서 지태가 재차 확인하자 연아가 냉큼 대답했다. 나는 왼손으론 지태의 팔을, 오른손으론 연아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둘 다 잡았어! 가자!” 

터널 저 멀리 빛이 보여서 그곳으로 달려가려는 찰나, 우리 뒤에서 달려오던 사람들이 등 뒤로 부딪히면서 소리를 지르며 다 함께 와르르 넘어졌다. 사람들과 뒤엉키면서도 나는 악착같이 양손에 쥔 지태와 연아의 팔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팔이 없는 사람처럼 온몸으로 자갈 바닥에 넘어져야만 했다. 더 심하게 다치더라도 두 사람을 놓치는 일만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다 비켜! 이 개새끼들아! 비키라고!” 

바로 뒤에서 우리와 부딪힌 사람들이 소리쳤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광기에 휩싸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너희들이나 비켜! 뒤에서 부딪힌 건 당신들이잖아!” 

지태의 목소리였다. 바로 왼쪽에서 들려왔다.  
어둠 속의 남자가 지태에게 더 화를 내려 하자 그와 일행인 듯한 사람들이 빨리 도망가자며 남자를 말렸다. 남자는 자기 분에 못 이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지태야, 괜찮냐?” 

내가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고 지태를 더듬으며 물었다. 

“난 괜찮아. 연아는?” 

지태의 물음에 연아가 내 오른쪽에서 대답했다. 

“아윽, 나도 괜찮아.” 

연아의 팔을 더듬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내 손 잡아.” 

나는 양손으로 지태와 연아의 손을 잡고는 함께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때 어디선가 불빛이 깜빡거리더니 갑자기 지하 터널이 환해졌다. 터널 벽면에 붙어 있던 형광등이 켜진 것이다.  

“불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사방이 환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눈앞에 우리가 타고 있던 지하철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차라리 불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늘어진 2호선 지하철은 본래의 상징 색깔인 초록색은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온통 검은 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검은 점은 모두 괴물이었다. 수십, 아니 수백은 될 것 같은 괴물들이 흡사 박쥐 떼처럼 지하철에 들러붙어 사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렸다.

이곳 지하는 괴물들의 소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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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발생 27분 전

2호선 지하철



“이번 역은 잠실나루, 잠실나루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안내방송이 들리자 지하철 오른쪽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불꽃처럼 달리던 나의 19년 육상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레이스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지하철이 완전히 멈춰 서자 푸시식 소리를 내며 총 10량으로 이뤄진 2호선 지하철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스타트 신호다!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지하철의 가장 앞 칸인 1호차에서 승강장으로 튀어 나갔다.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지하철과 멀리 떨어진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지상역인 잠실나루역의 창문 너머로 분홍빛 노을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눈을 찡그리곤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다 내린 것을 확인한 후 달리는 방향을 꺾었다. 지하철 문 쪽으로 바짝 붙었다. 4호차쯤부터 직선으로 앞이 뻥 뚫려 있었다. 이대로 10호차까지 달려 문이 닫히기 전에 타면 된다. 나는 정차해 있는 지하철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지금 나에겐 이 길이 트랙이요, 나만의 레인이었다. 지하철이 정차한 짧은 시간 동안 

1호차에서 10호차까지 달려 탑승에 성공해야 하는, 이른바 ‘지하철도 레이스’였다!


“출입문을 닫겠습니다.”


8호차쯤 지났을 때, 잠실나루역 승강장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10호차 문에서 연아와 지태가 몸을 반쯤 내민 채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연아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끼워진 셀카봉이 들려 있었다. 이 레이스는 연아의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으로 생방송되고 있었다. 


“빨리, 빨리!”

“조금만 더!”


연아와 지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푸시식 소리를 내며 지하철 문이 닫히려 했다. 연아와 지태는 깜짝 놀라 몸을 지하철 안으로 넣었다. 


“으아아아!”


기합을 넣듯 소리치며 9호차 옆을 번개같이 지나갔다. 10호차 문이 절반쯤 닫히는데 재빨리 몸을 웅크려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안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지태가 내 몸을 받으면서 우와악! 소리를 질렀다. 창던지기 선수라 근육이 잘 발달한 지태는 비틀거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게 나의 거구를 잘 받아냈다. 덜커덩, 하면서 지하철이 출발했다. 


“우와아아! 대박! 보세요! 성공했습니다! 1호차에서 10호차까지 거리는 200미터! 정차 시간은 약 20초!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장애물처럼 있는데도 10호차에 탑승하는데 성공했어요! 참고로 200미터 세계 신기록은 19초대입니다! 물론 그 기록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트랙에서 만들어진 거지요!”


연아가 한 손엔 20초라고 찍힌 스톱워치를 들고, 한 손엔 스마트폰이 끼워진 셀카봉을 든 채 소리쳤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연아와 지태, 헉헉대는 나를 한 화면에 담고 있었다. 지태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예! 오오! 괴성을 지르며 9회 말 투아웃에서 역전 홈런을 친 것처럼 세리머니를 했다.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에 사람들의 댓글이 마구 올라

왔다. 


「ㅋㅋㅋㅋㅋㅋ대박ㅋㅋㅋ 이걸 진짜 해내네.」

「초대박ㅋㅋㅋ 이걸 진짜 찍을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성공!」

「ㅋㅋㅋㅋ강단이 인정. 멋진 은퇴다!」

「얘네 진짜 마지막까지 골 때리네ㅋㅋㅋㅋㅋ.」

「저게 가능하긴 한 거구나. 지하철 탈 때마다 궁금했는데.」

「맙소사, 잠시 문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10칸을 달리다니ㅋㅋㅋ.」


우리 이벤트에 즐거워하는 댓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우린 댓글들을 보면서 마구 웃어댔다. 개중엔 저게 무슨 민폐냐, 또 약 빨고 뛴 거냐, 미친 짓 좀 그만해라 등등 악플도 종종 달렸지만 우린 신경 쓰지 않았다. 도핑 스캔들이 터진 후 나와 지태, 연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모두 다 먹어본 것 같다. 그리고 이 방송은 대부분 연아의 팬들이 보기 때문인지 악플을 단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연아는 인터넷 방송계에서 꽤 유명한 인기 VJ였다. 


어찌 됐든 우리의 이벤트는 대성공! 나와 지태, 연아는 소리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봐, 학생들! 지하철 안에서 왜 그렇게 소란스러워? 여기가 학교 운동장이야,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잔뜩 흥이 오른 우리 뒤통수에 꽂혔다. 나와 지태, 연아는 웃다 말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자리에 앉은 채 우리를 꾸짖고 있었다. 그 밖에도 10호차에 타고 있는 어른들은 모두 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우린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것처럼 떠들어댔으니까.


“너희, 어느 학교 학생이야? 보니까 아직 학교 끝날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버젓이 교복 입고선 말이야! 요즘 애들은 겁대가리가 없어. 어느 학교야!”


아저씨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소리쳤다. 


“저, 자퇴했는데요.”


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뭐, 당연하지만 거짓말이다. 육상 선수는 그만뒀어도 아직 학교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럼 왜 교복을 입고 나왔겠는가? 그저 오늘 하루 땡땡이 쳤을 뿐이다.

아저씨가 나의 대답에 잠시 당황했지만 질 수 없다는 듯 맞받아쳤다.


“자퇴한 게 자랑이야? 뭐 잘했다고 고개 쳐들고……. 어? 이제 보니 너 그놈이네. 몇 달 전에 육상 도핑 스캔들! 그거! 너 맞지?”


안 그래도 주목받고 있긴 했지만 아저씨의 말이 끝난 순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10호차 안의 눈 달린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그런 안 좋은 사건 일으켰으면 자숙하고 성실하게 지내야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안 그래도 사람들을 죄다 실망시켜놓고 말이야.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떠들고 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잘못했으면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지내야지!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고! 안 그래?”


이 아저씨가 미쳤나? 당신 좋으라고 내가 그렇게 훈련하고 달린 줄 아나? 자기들 멋대로 나한테 기대했다가 실망해놓고선 무슨 헛소리야? 


내가 아저씨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퍼부으려 하는데, 연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얘가 뭘 반성해야 되는데요?”


아저씨는 나에게서 연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쏘아붙였다. 


“얘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눈에 안 띄게 지내야 되는데요? 네? 한번 말해보세요.”

“야야, 됐어. 그만해.”


지태가 연아를 말렸다. 그러나 뚜껑 열린 연아를 말릴 순 없었다.


“단이도 모르고 먹은 거라고요. 스티브 그 새끼가 얘 속이고 약물 투약한 거라고요! 그리고 9초 91은 그전에 기록했거든요. 지금도 얘, 아시아 신기록 보유자는 맞아요. 그 기록 내려고 얼마나 힘들게 훈련했는지 아세요?”


연아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스티브가 준 약물이 스테로이드제라는 걸 몰랐다. 작년에 9초 91을 기록했을 때는 약물을 복용하기 전이었다. 9초 91은 아시아 타이 기록이다. 육상 100미터 부문에서 고등학생이 그 정도의 기록을 세운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것!


“이 자식들이……. 자식 같아서 좋게 말했더니 꼬박꼬박 말대꾸네. 야, 너 어디서 그 따위 말버릇이야?”


연아를 쳐다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어른들은 항상 저런 식이다. 자기들 멋대로 우리 같은 애들을 자식처럼 생각한다고 하면서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화부터 냈다. 특히 연아 같은 여자애에겐 더했다. 이에 질세라 연아가 아저씨에게 한마디 더 하는데, 지태가 재빨리 양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조용히 할게요! 죄송합니다!”


연아가 지태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럴수록 지태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아저씨는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 듯 연신 연아를 향해 욕설을 내뱉다가 계속되는 지태의 사과에 화를 누그러뜨렸다. 이렇게 상황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지태가 나지막이 아저씨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아저씨, 그런데요, 얘 이제 육상 그만뒀어요. 다신 안 달릴 거래요.”


아저씨가 지태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지태가 이어서 말했다.


“아저씨 말대로 얘 반성 많이 했거든요. 자기 행동에 딱 책임지고 물러난 거죠. 멋있죠?”


아저씨는 지태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의 얼굴엔 ‘멋있긴, 개뿔!’이라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요, 얘 한때 세계 우승까지 노렸던 놈이거든요. 그랬던 놈이 이제 선수 생활 그만둔다는데 지금 얼마나 기분이 ‘엿’ 같겠어요. 아저씨 기분도 ‘엿’ 같은 거 잘 알겠는데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거 얼굴도 좀 ‘엿’같이 생기셔 가지고 그렇게 ‘엿’ 같은 말만 하시면 듣는 우리 기분도 ‘엿’ 같아지고, 서로서로 ‘엿’ 같아지는 거 잘 알 만하신 분이 왜. 거 참.”


지태가 욕설만 유달리 강조해서 말하자 연아가 피식 웃었다. 나도 실소를 머금었다. 반면 아저씨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주위의 다른 어른들도 지태의 욕설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태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와 연아에게 지하철 다른 칸으로 옮겨 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나와 연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저씨에게 함께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고는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깔깔대는 우리 뒤통수 너머로 아저씨가 버럭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를 쫓아오진 않았다. 그럴 만한 용기와 끈기는 없어 보였다. 하긴, 그토록 성실하게 우리를 혼내는 어른은 본 적 없다.


사실 오늘 우린 하루 종일 가는 곳마다 이런 장난을 치는 중이다. 우리를 그저 골 빈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봐도 오늘 우린 온종일 바보 같은 짓만 했으니까. 조금 전의 지하철도 레이스는 오늘의 바보짓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조금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오늘은 내가 ‘영원히’ 육상을 그만두기로 한 날이니까. 내 청춘 다 바쳐가며 뛰었던 그 세계를 내 손으로 끝낸 날이니까. 


사실 내가 오늘 국제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통지받은 처벌은 4년간 국제경기 출전 금지였을 뿐이다. 국내 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받은 처벌도 4년간 국내 경기 출전 금지였을 뿐이다. 3개월 전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것에 대한 처벌의 결과였다. 4년 뒤엔 다시 국내외 육상 경기에 모두 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4년 뒤에 다시 9초대 기록을 세우고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나는 약쟁이로 불릴 뿐, 절대로 칼 루이스, 우사인 볼트 같은 스프린터로는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트랙 위에서 사회자가 내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함성이 아닌 야유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이건 나의 추측이 아니라 도핑 스캔들이 있는 선수라면 응당 짊어져야 할 영원한 족쇄다. 내 육상 선수 인생은 사실상 4년이 아니라 영원히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명예를 떠안고 계속 뛰느니 스스로 육상을 그만두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지태와 연아는 오늘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겠다며 말만 하라고 했다. 사실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었다. 다만 나와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나와 함께 사람들에게 영혼이 부서질 정도로 욕을 먹은 두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웃긴 얘기지만, 그게 지하철도 레이스였다. 평소 연아와 내가 가족인 걸 아는 연아의 팬들은 연아에게 나에 대한 괴상한 질문을 해댔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질문이 ‘지하철이 정차했을 때 강단이는 몇 칸이나 이동할 수 있나’였다(이에 대해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지하철도 레이스를 마지막으로 육상을 그만두겠다고 연아와 지태에게 선언했다. 두 사람은 처음엔 물음표가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봤지만, 이내 두 눈 속의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그 느낌표 앞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녀사냥하듯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우리의 미친 레이스를 보여주자! 


그렇게 우린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적당한 역을 골라 지하철도 레이스를 펼치게 됐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올림픽? 다 필요 없다. 지태, 연아와 함께 이렇게 놀 수만 있다면 그곳이 나의 올림픽이지.


여기서 잠시 지태와 연아, 나, 우리 셋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어떤 사이이길래 이러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나, 지태, 연아는 오래된 친구이자 동갑내기 남매다. 우린 절대 지울 수 없는 상처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사건이다. 열 살 때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우린 새엄마의 보호 아래 한 집에서 살게 됐다. 원래는 친한 소꿉친구였다가 동갑내기 가족이 된 것이다. 아픈 상처와 끈끈한 세월을 공유하고 있는 만큼 우리 셋의 사이는 소꿉친구, 가족 이상으로 각별하다.


여기에 한 명 더.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친부모 못지않은 정성으로 길러주신 우리의 엄마. 당시 우리 셋을 한꺼번에 입양해준 엄마가 아니었다면 열 살의 우리는 그 사건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 셋이 지금처럼 자랄 수 있었던 건 오롯이 엄마 덕분이다. 

우리 셋, 그리고 엄마. 이렇게만 있으면 된다. 그럼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우리가 탄 2호선 지하철은 어느새 지하로 들어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는 강남 쪽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곧 퇴근 시간대여서 그런지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서초역으로 향하던 지하철이 갑자기 고장 난 것처럼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멈췄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한쪽으로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급정거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 어딘가에서 갑자기 지하철이 서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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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캉 2017-10-2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물 복용으로 상실감이 큰 주인공이 실의에 빠져살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최대한 밝게 살려고 하는군요 :)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다. 캐나다 남부에 위치한 토론토 육상 스타디움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객들의 열기로 한껏 달아올랐다. 무더운 날씨 탓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관객들은 곧 열릴 100미터 부문 결승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막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들의 불꽃 같은 이벤트가 시작될 참이었다.


단이가 뜨겁게 달궈진 트랙에 들어섰다. 관객들은 단이를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피부색이 밝은 탓에 단이는 흑인 선수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단이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흑인이었다. 육상 100미터 부문은 언제나 그렇듯 흑인들의 잔치였다.


단이는 이번 대회의 다크호스였다. 불과 열아홉 살의 나이에 9초대를 기록하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준결승전에서 세운 단이의 기록은 9초 88. 아시아 신기록이자 세계 청소년 신기록이었다. 자신의 종전 최고 기록이자 아시아 타이 기록인 9초 91을 1년 만에 갈아치웠다. 이 기록만으로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선 이미 난리가 났고, 전 세계가 단이를 주목하게 되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시아의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고 있었다.


미타쿠예 오야신. 

단이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오른쪽을 쳐다봤다. 가까운 객석에서 연아와 지태가 단이를 응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타쿠예 오야신.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웠다. 연아가 알려준 주문이다. 인디언들의 인사말이라고 했다. 보다 정확히는 토착 원주민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이곳 캐나다에서는 ‘첫 번째 민족(First Nation)’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인사말로,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연아가 알려준 이 인디언들의 인사말은 훌륭한 치료제가 되어줬다. 트랙 위 각자의 레인에서 100미터를 달리는 건 홀로 터널을 달려가는 일과 같다. 그 고독한 중압감에 스타트조차 할 수 없었을 때, 연아가 알려준 주문은 외로운 터널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줬다.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단이가 주문을 외울 때마다 트랙 위에는 연아와 지태가 함께 있었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면 단이는 연아와 지태와 함께 달렸다. 그 덕분에 준결승전에서 9초 88을 기록할 수 있었다. 결승전에선 더 빠른 기록을 낼 것이다. 단이는 더 빨리 달릴 자신이 있었다. 단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1위를 할지도 모른다. 우사인 볼트가 은퇴한 이후 비어버린 제왕의 자리를 아시아의 한 소년이 차지할 수도 있었다.


선수들이 워밍업을 끝내고 각자 자신의 레인으로 가서 섰다. 곧 선수 소개를 한 후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한 인간이 이뤄온 모든 것이 10초도 되지 않아 판가름 나는 세계. 단이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봤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고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0.1초. 첫 발인 오른발을 내딛고 추동력을 얻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총 일곱 발짝 내딛으면 10미터 지점 통과. 그 뒤 20미터 지점까지는 상체를 숙이고 속도를 더 올린다. 30미터 지점부턴 상체를 펴면서 최고 속도 구간으로 진입. 오른팔, 왼팔 크게 흔들면서 발은 앞 부분 위주로 트랙 표면을 힘껏 내딛는다. 50미터를 지날 무렵 최고 속도를 낸다. 보폭도 더욱 커진다. 온몸의 근육은 터져 나갈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이제 100미터 지점까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근육은 더욱 팽창한다. 빠른 속도로 터널의 끝이 가까워진다. 


6초, 7초, 8초……. 100미터 지점에 골인한다. 전광판에 뜨는 기록은 9초 81! 

단이는 눈을 떴다. 단이는 언제나 경기 직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그 경기에서 자신이 달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열에 아홉은 그 모습대로 달렸다. 정말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한 번 빼고는 모두 이미지 트레이닝에서의 기록 그대로였다. 지금 단이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이미지 트레이닝대로라면 9초 81로 골인할 것이다. 하지만 1위를 할 수 있는 기록일까? 


아시아권 대회라면 분명히 우승이다. 하지만 이곳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다. 그 정도면 훌륭한 기록이지만, 우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른 선수들이 자신만의 터널을 몇 초에 달릴지 아무도 모른다. 혹 누군가 이번 경기에서 우사인 볼트가 세웠던 세계 신기록을 깰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경기 운영진과 무언가 상의했다.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관객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각 레인에 서 있던 선수들도 검은 양복들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극도로 예민해지는 결승전 직전에 이런 돌발 상황은 선수들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단이는 그들을 보자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굳었다. 근육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런 상태로 달리면 10초대 기록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검은 양복들이 트랙 위로 올라왔다. 흑인 선수들을 지나쳐 단이 앞에 와 섰다. 단이에게 몇 마디 말을 하더니 그를 데리고 트랙을 내려갔다. 관객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전 세계로 방송을 내보내던 카메라들이 일제히 단이를 비췄다. 

단이는 검은 양복들에게 끌려 트랙에서 사라졌다. 귀가 먼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이 먼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트랙에서 멀어지기 전, 객석에 앉아 있는 연아와 지태의 얼굴을 봤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아래 스태프석에 있던 스티브. 아,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든든한 코치 스티브. 이제는 나를 파멸로 이끌 그, 스티브.   


그날 이후, 단이는 트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희대의 도핑 스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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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여느 때처럼 지옥철이 된, 평범한 퇴근 시간. 

서울 교대역을 향해 달리던 지하철 2호선이 괴생명체들의 습격을 받는다. 놈들은 지하철을 때려 부수고 승객들을 무참히 살육한다. 지하철은 붉은 피의 열차로 변한다.


열차 안에는 고교 단거리 최강자 단이와 친구들이 타고 있었다.

아이들은 출구를 찾아 밖으로 도망치려 하지만 2호선 모든 출구는 이미 파괴되었다. 다른 출구를 찾기 위해 이동하던 중, 엄마가 노량진역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엄마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계속되는 습격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던 아이들은 지하 비밀 공간에서 사는 노숙자 꼬마 화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 고속터미널역으로 향한다. 그곳에 집결한 군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아이들을 총기로 위협하며 격리시키려고만 한다. 다시 시작된 괴생명체들의 등장으로 전투가 벌어진 사이 9호선 선로로 도망친다. 노량진역에 엄마가 있다. 쓰러진 생존자들 사이에...



괴생명체가 흘린 피를 따라가던 아이들 앞에 나타난 거대한 싱크홀. 그 안으로 내려가 계속 추적을 이어가던 중 드론과 마주친다. 드론의 음성은 자신이 국방부 요원이라며 곧 정예부대를 투입할 예정이니 괴생명체들이 은신 중인 지하세계로 잠입해 빨간 버튼을 눌러 길을 열어 줄 것을 제안한다. 엄마도, 다른 생존자들도 구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단이와 아이들은 지하세계로 향한다.


끝을 모를 만큼 넓어 마치 고대 문명과 미래 도시가 융합된 듯한 지하 세계. 아이들은 그 위용에 압도된다. 하지만 굉음과 함께 한강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 혼돈을 틈타 아이들은 각각 빨간 버튼과 엄마를 찾기 시작한다. 빨간 버튼을 누르기 위해 코어라는 구조물에 잠입 단이는 한 소년을 만난다. 



바로 '신야'라고 불리는 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중성적인 얼굴,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 같다는 아름다움... 
이 아이는 누구일까? 
또 지하세계는 누구에 의해 왜 만들어진 것일까?

19살, 아시아 최초 100미터 9초대 기록을 세운 스프린터 단이는 위험에 빠진 엄마를 구할 수 있을까?




천만 서울 시민이 매일 타는 지하철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재난 사태와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음모,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청소년다운 유쾌함과 패기를 잃지 않는, 정이안 작가의 <스프린터: 언더월드>







작가 | 정이안

1983년 가을, 부산에서 태어나 비디오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지내다가 19살의 어느 날에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영화와 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시나리오와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후 영화 시나리오를 가장 많이 썼다. 소설은 <스프린터>가 처음이다. 앞으로도 다양한 형식을 오가며 좋은 이야기를 써내는 일에 매진하려 한다.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지내고 있다.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창문을 열어놓고 음악을 들을 때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곤 한다.



<헝거 게임>, <메이즈 러너>, <레드 라이징>을 잇는 한국 영 어덜트 소설의 신기원!
방대한 세계관과 치밀한 설정을 바탕으로 한 트릴로지(3부작)의 시작!
2016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E-IP피칭 New Creator Award 수상작!



★★★★★ 추천평 ★★★★★


웹툰, 영상, 게임 등 플랫폼을 갈아탈 때마다 새로운 팬 층을 만날 수 있는 마중물 스토리의 탄생!

- 영화 투자배급사 NEW 영화부문 박준경 대표


끝을 모르고 펼쳐지는 비밀의 실체를 파헤치는 아이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에 동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현수 / 씨네21 기자


<스프린터>를 읽는 재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장감이다. 도약의 순간까지 <스프린터>는 맹렬하게 달려간다.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스토리의 흡인력이 대단하다!

작품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강력해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헐리우드식 모험물 SF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 판타지 속 괴물과 음모론, 다분히 호러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와 스릴러, 이 모든 것이 작품 안에 공존하고 있다. 

-김창규 SF작가 및 번역가



“무슨 일이 생겨도, 사람다운 선택을 하자. 우리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자.”

전대미문의 서울 지하철 테러 발발! 엄마를 구하기 위한 여정 끝에서 만난 거대한 비밀. 
스프린터 단이와 두 친구의 이야기가 16일부터 연재됩니다.
  연재기간 |   2017년 10월 16일~ 26일 (매일 늦은 6시)

-연재 이벤트(1)-
스프린터가 연재되는 동안 
캐비넷 포스트를 팔로우해주시고
덧글 + ♥ 를 남겨주시는 
10분에게 
<스프린터 뱃지>를,
3분에게
<스프린터 출간본과 뱃지>를 
드립니다.
( 발표: 10월 30일 )

-연재이벤트(2)-
스프린터 선연재 독자님들을
작가와의 만남에 초대합니다.
서울SF아카이브 박상준 대표와
<스프린터>의 정이안작가가 함께하는 
<안전가옥 작가와의 만남>
댓글로 신청 해 주세요!
(15분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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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캉 2017-10-2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온 사지방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책을 찾았네요. 쭉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