녁 여덟 시경신촌 기차역 뒷골목에 위치한 원룸텔에 침입해 혼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하려던 스물일곱 살의 김 모 씨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여성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두 명의 형사 덕분에 범행은 미수에 그쳤다김 모 씨는 현장에서 달아나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도주했다평소 이쪽 골목을 자주 오갔기 때문에 지리에는 자신이 있었다골목길을 벗어나 번화가 대로변 입구로 달릴 때까지만 해도 두 형사를 따돌렸다고 믿었다그는 골목 입구 근처에 세워놓은 오토바이에 올라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한데 시동을 걸고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두 형사가 앞뒤를 막은 채 서 있었다당황한 김 모 씨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태를 파악했다앞에는 살짝 마른 체격에 머리를 짧게 자른 젊은 여자가 서 있었고뒤에는 다부진 몸집에 연륜 좀 묻어나 보이는 남자가 아니꼽다는 눈빛을 하며 서 있었다

좁은 골목길이다옆에 피할 만한 여유 공간은 없다앞뒤를 번갈아 보던 김 모 씨는 재빨리 결정을 내린 뒤 액셀을 밟았다


저 미친놈이!” 

뒤에 서 있던 남자 형사가 소리쳤다

뒈지기 싫으면 비켜!”


김 모 씨는 소리를 지르며 여자 형사를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오토바이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데도 여자 형사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김 모 씨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김 모 씨는 액셀을 더욱 힘차게 밟았다오토바이는 더욱 커다란 굉음을 토하며 빠르게 여자 형사를 향해 돌진했다여자 형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미친년이 뒈지든 말든 상관없다고김 모 씨는 생각했다오토바이와 여자 형사의 간격이 뻗은 팔 길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허공에 온갖 오물과 플라스틱 커피 컵이 날아올랐다뭔가에 부딪친 충격이 컸던 탓에 오토바이는 대로변 바닥에 쓰러져 약 십 미터가량 미끄러졌다김 모 씨는 오토바이에서 굴러떨어져 골목 입구에 널브러졌다생존 본능인지질긴 명줄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 모 씨는 사고 직전 뛰어내려 옆으로 굴렀다덕분에 가벼운 뇌진탕 외에는 다친 데가 없었다정신을 차린 순간 철컥 소리가 났다손목에 한기가 돌았다김 모 씨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수갑이 채워져 있었다눈앞에는 방금 전 오토바이로 쳤다고 생각한 여자 형사가 서 있었다여자 형사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귀하는 강간미수 및 주거침입죄를 범한 현행범으로 형사소송법 212조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합니다변호사 선임 및 체포 적부심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뭐야……?”

김 모 씨는 놀라 여자 형사를 위아래로 훑었다피가 돌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 겨울날 춥지도 않은지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만 입은 그녀의 모습에는 상처는커녕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귀신이야?”

김 모 씨가 넋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어쭈용케도 우리 한예은 형사 별명을 맞추셨어.” 


남자 형사가 뒤쪽에서 건들대며 걸어왔다그는 납작하게 찌그러진 쓰레기통을 보고는 김 모 씨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너 이 새끼공공기물 파손 죄도 추가.” 


한예은이라 불린 형사는 아무 말 없이 김 모 씨를 끌고 가 경찰차에 태웠다

역시 한귀야.”

남자 형사가 보조석에 올라타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장 선배가 느린 겁니다운동 좀 하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예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동을 걸었다

너 건수 올리라고 뒤로 좀 빠져 있던 거지선배 마음을 이렇게 몰라.”
빛깔 좋은 핑계로 들립니다만.”
내가 누구냐강력반 경력 팔 년 차 장두진이야인마이런 병아리 같은 건수가 뭐 아쉽다고?” 

예은은 대꾸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저기…….” 


졸지에 이런 병아리 같은 건수가 된 김 모 씨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두진이 돌아보았다.

뭐야?”

김 모 씨는 눈을 끔뻑끔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시면…….”


두진은 따악 소리가 나도록 김 모 씨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네 죄를 네가 몰라 새꺄?”
아니그건 알겠는데……저 형사님이 대체 어떻게 피하셨는지…….”
아아.”

두진이 씨익 미소 지었다
김 모 씨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할 독자를 위해 설명을 조금 보충하자면김 모 씨가 두 형사에게 쫓기던 때로 상황을 되감기 해볼 필요가 있다김 모 씨는 경찰이 왔다는 걸 눈치 채고 곧장 도주했다예은과 두진은 있는 힘껏 뒤쫓았지만능숙하게 골목길을 달리는 김 모 씨를 당해내기 어려웠다예은은 달리기를 멈추고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늘어서 있는 주택들의 높낮이를 살폈다담벼락다세대 건물원룸 옥상 등등형태가 다른 건물들이 다양한 길이와 크기로 존재하고 있었다예은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점프한 뒤팔을 뻗어 담벼락 위로 올라탔다중력이 없어진 것처럼 가뿐하게 올라탄 걸로도 모자라담벼락을 지지대 삼아 바로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넘기도 했다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두진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그저 익숙하게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달릴 뿐이었다

훨씬 높은 곳에서 골목을 내려다보며 달린 덕에예은은 김 모 씨의 목적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그녀는 두진에게 대로변 쪽 골목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자신은 전속력으로 달려 옥상을 뛰어넘고 가파른 담벼락 위를 달렸다그리고 대로변 쪽에 다다르자낙법으로 굴러 착지해 골목길 입구를 봉쇄했다김 모 씨가 도착한 건 그 다음이었다두진은 마지막으로 도착해 뒤를 막았다당황한 김 모 씨는 속도를 올린 채 예은을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따로 피할 틈이 없는 좁은 골목인 데다가상대는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였다당연히 코앞까지 돌진하면 비명을 지르며 입구 쪽으로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김 모 씨는 그 틈을 타 대로변을 달려 도주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예은은 오토바이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재빨리 주변을 살폈다골목 입구 쪽에 커다란 쓰레기통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오토바이가 코앞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오토바이 정면에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는 쓰레기통 정면을 들이받았다동시에 예은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백 텀블링을 했다그녀는 우아하게 세 개의 원을 그리고 나서야 착지했다김 모 씨와 오토바이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이로써 상황 종료.

우리 한 형사가 괜히 한귀인 줄 알아?”

벙찐 김 모 씨를 돌아보며 두진이 놀렸다형삿밥을 먹은 지 이제 갓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예은이 마포 경찰서 강력반 2팀에서 한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초반에 
한 형사 사람 맞아귀신이야?’, ‘사람이면 어떻게 저리 움직일 수 있어?’라는 말을 하도 듣다가그게 한귀로 줄어들며 별명으로 굳어진 게 첫 번째 이유

그나저나 선배우리 그 사건.”


웃고 있던 두진의 얼굴이 삽시간에 찌그러졌다

또 뭐?” 
한 달 전 도화동에서 실종된 강은혜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해이거 진짜 물귀신이라니까저번에도 알아듣게 충분히 이야기했다.”


집요한 예은의 성격이 두 번째 이유다한 번 꽂힌 사건에는 물귀신마냥 끈덕지게 달라붙어 끝까지 쫓아가는 성격

느낌이 안 좋습니다.”
네 감이 귀신 뺨 왕복으로 때릴 만큼 좋은 건 잘 아는데그건 단순 가출이라니까?” 
단순 가출이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됐어일단 지금 잡은 범인부터 처리해사건 해결해놓고도 표정이 그게 뭐야뚱하니.” 

예은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핸들을 확 꺾었다

범인 잡은 게 뭐가 기쁩니까범죄가 아예 없는 게 기쁘지.” 
하여튼 말 섞는 보람이 없어.”


두진은 혀를 쯧쯧 차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어플을 구동하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넘어가는 동작이 꽤 손에 익어 보였다이윽고 화면에 커다란 그림과 글 한 줄이 떠올랐다.

오늘의 운세: 
말띠/78년생/큰 사고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동쪽, 검정색을 조심.


두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은을 쳐다보았다

네 자리 동쪽 창가 아니냐?”
선배님 옆자리잖습니까.”


예은이 검정색 니트 소매를 걷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아씨오늘 당직 느낌 안 좋은데.”

두진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연재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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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 4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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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8-04-1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한예은-이 등장해서 기쁩니다! 매력있는 설정이어서 마음이 가네요

스파이스트리 2018-05-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남, 운명상담소, 천재에 액션뛰어난 여형사를 보태면 뭐다? 음...이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