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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이책은 요즘 시쳇말로 '좀 대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언제 한번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는가. 그것도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말이다. 특히 작가들의 사는 이야기나 글 쓰는 이야기를 거의 환장하리만치 좋아하는 나는 이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행운이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처음 이책을 받아들고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을까 의문을 가졌더랬다. 부제가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라고 되어있는데, '16인의 반란자들'은 원제 그대로 맞는지 모르겠다. 아마 맞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왜 하필 그들을 가리켜 '반란자들'이라고 했을까?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읽어나가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이책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다양한 모습과 포즈를 사진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인터뷰도 인터뷰지만 오히려 사진으로 더 말해지는 책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늙고 쇄락한 모습이지만 그 모습속에서 인생의 연륜이 느껴져 묵직하고도 조용한 감탄을 하게 된다.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오르한 파묵의 사진
특히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기억나는 사진은 오르한 파묵의 사진이다. 뭐가 그리도 우스워 저토록 파안대소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안락의자에 앉아 웃고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전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저리 유쾌하게 웃으리만치 행복했고 즐거웠던 것마는 아니었다. 그는 터키의 정체성을 모독한 죄로 기소됐고 그때부터 삶의 고행의 길로 변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방구석에 쳐박혀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꿈을 한참 굽이쳐 돌아나오게 만들었나 보다. 이를테면 그의 반란은 그런 것이다. 터키군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인 대학살에 대해 잠잠치 않는 것. 얼핏 그의 모습 속엔 청년의 모습이 남아있는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작가 다리오 포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작가는 다리오 포는 아닐까 싶다. 애석하게도(?) 노벨문학상 수장자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쉽지 않은 인생을 사는 양 근엄하거나 뭔가 세상 세파에 찌들려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수장자로 결정됐을 때 보았던 한 컷의 사진은 얼마나 장난기 가득하고 천진한 모습이던지 그야말로 셈이 날 지경이었다. 저렇게 행복한 모습인데 노벨상의 영애도 안다니. 뭔가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것은 연극이다. 연극 대본을 직접 쓰기도 하며, 연출을 하기도 한다. 그는 그것을 통해 풍자를 말하고 그것은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말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리오 포처럼 자신의 일을 통해 행복을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 도리스 레싱
이책이 소개한 16인의 반란자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는 단연 도리스 레싱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질러진 그녀의 서재와 책장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게 또 내 방 모습과 오버랩이 돼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동병상련이랄까?ㅋ 삼단으로 찍힌 그녀의 각기다른 세 표정이 인상적이다. 젊었을 땐 늙은 사람에게 무슨 미(美)가 있을까 싶은데 깊이 패인 주름에서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은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란 확실히 젊은 날의 고뇌와 상처들이 빚어낸 것일테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움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것일테다.
난 아직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는데(내 생애 어느 시기에 읽게될런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2007년 낸 <틈>이란 작품의 설명이 흥미롭다. 많은 사람이 여자만이 사는 세상, 또는 남성을 정복해버린 세상에 대해 예견을 하거나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그것을 한층 더 뛰어넘어 보인다. 아예 남자를 모르는 세상에서 사내녀석을 찾기 위해 원정대를 꾸리기까지 하다니.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여가와 일, 성별 간의 책임들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테마로 잡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녀는 <다시 사랑을>(1996년)이란 작품을 쓰면서 나이 많은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이해 못한다고 하며 이 작품은 그녀 자신을 말한다고 한다. 글쎄.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사람을 이해하는데 더 넓은 시야를 가져주기를 바랬었나 보다. 나는 왠지 그녀의 생각에 동조해 주고 싶어졌다.
꿈을 쓰는 작가 나기브 마푸즈
가장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작가는 1988년 수상한 이집트의 작가 나기브 마푸즈였다. 그는 1994년 어느 종교 통합주의자의 습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치명상을 입고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왕년에 노벨상 수상자가 어린애처럼 펜을 잡는 일부터 다시 배워야 하다니. 후에 재활치료를 받긴 했지만 하루에 반시간 정도만 펜을 잡을 수 있단다. 그렇다면 글을 얼마나 함축적으로 쓸까? 그렇지 않아도 누구는 그의 글을 일본의 하이쿠에 비교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글과 하이쿠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못 밖는다. 이를테면, 일본의 하이쿠는 좋아하는 형태로 자유롭게 뽑아내지만 자신의 글은 필연성이 그렇게 만들었다고(221p).
나를 좀 놀라게 했던 건, 그는 꿈을 자신의 소설의 재료로(?) 쓴다는 것이다. 물론 30년간 자신이 꾼 꿈을 기록한 사람도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소설에 반영할 생각을 한 소설가가 있다니 놀랍다. 나도 가끔은 내가 꾼 꿈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를 의문을 갖곤 했다. 하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소설이 되지 못할 건 없다. 소설도 창작이니. 상식에 나를 가두지 말고 모든 것에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그 밖에...
마르케스는 참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 같다. 항상 그랬지만 그의 풍채에서 남미 특유의 낙천적 기질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는 2010년 수상작가인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와 우정을 나누다 1976년 한 공개석상에서 요사가 그에게 펀치를 날리므로 단절이 됐다고 하는데 그게 묘하게 나를 위로한다. 얼마 전 요사가 날린 펀치 못지 않은 일을 당하면서 나는 잠깐 마르케스가 돼 봤다.'저런 거장도 주먹을 날리는데 나라고 별 수 있어? 까짓 거.' 하긴. 76년도에 요사나 마르케스나 거장이 될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선물 받고 아직도 못 읽은 그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나 속편하게 읽어 봐야겠다.
읽으면서 숙연해지는 작가도 있다. 그는 바로 귄터그라스다. 그는 자신이 나치 친위대였음을 스스로 고백하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고백한 사실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것은 자국의 역사를 거스를 수 없기에 당하는 고통이라 생각한다. 파이프 담배를 문 그의 얼굴이 참 인상적이다. 작가는 모름지기 고백하는 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다.
(속된 의미에서)쾌감을 느끼게 해 줬던 인터뷰도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V.S 네이폴 이다. 그는 우리가 고전의 반열에 놓은 작품을 기꺼이 비판을 했다. 그는 말하기를,제인 오스틴은 '단지 그 시대의 특정한 양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한테만 매력을 줄 뿐'이고, 헨리 제임스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작가로, 모험을 감행한 적도 진지한 적도 없으며, 마차의 상석에 앉아 젠틀맨 같은 폼을 잡은 채 세상을 내려다보고, 헤밍웨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전쟁 중에 파리에 있었지만 독자들한테 준 것은 그가 어떤 칵테일을 마셨는가, 하는 것 뿐이다.(243P)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로인해 이런 일련의 작가들에 주눅들지 않고 좀 편하게 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도 완벽한 작가는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너무 쫄지 말자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질 법도 하다.
하지만 난 얼마 전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었는데 새삼 매력적인 작가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생각을 했을까? 감탄까지는 아니어도 내 안에 조용한 탄성을 자아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저런 작가들의 흠은 네이폴이나 되니까 잡아낼 수 있는 거지 일반인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고전은 잔말 말고 읽어야 한다. 일단 읽어보고 네이폴처럼 흠을 잡던지 감탄을 하던지 해야할 것이다.
아무튼 이책은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냥 3년 여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고 하는데, 몇년부터 몇년까지 3년을 했다는 건지, 언제 인터뷰 했는지 정확한 년도가 밝혀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특히 마푸즈 같은 경우 95세로 기입을 했는데 지금 현재의 나이가 그런 건지, 인터뷰 당시의 나이가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했을 당시의 나이가 그렇다면 지금도 이 사람이 생존해 있는 건지 애매해진다. 이런 건 역자라도 주를 달아주면 좋지 않았을까?
솔직히 노벨문학상이 어떤 상인가?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궁금했다. 해마다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수상자들은 상을 받은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야말로 '받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이책을 읽음으로 비로소 그 의문이 (다소는)풀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되리만치 노벨문학상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줬지만 당연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글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또 몇몇 작가는 오히려 그 때문에 글을 못 쓰고 다른 부가적인 일에 시간을 빼앗긴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그게 참 친근하다. 여기 소개된 16인의 작가들은 나름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상처는 글을 남긴다. 즉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과연 문학상을 받을만 했(겠)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 필요한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왜 '반란자'란 이름을 붙였는지 알 것 같다. 둘 다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