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식민지 대만에서의 일본 식민주의와 문학/언어 개혁들
[1] 향토문학 운동과 대만어 표기법(모두 1930년대)
운동의 전사—정치적으로
ü 이 두 운동은
정치영역에서의 좌절로부터 비롯된 것. 개량주의자도 급진주의자도 모두 좌절.
ü 개량주의자들의
반-식민주의: 일본과 중국의 유학생들로부터 시작. 원래는 일본에 잘 적응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인데 한국 중국의 반-식민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반-식민주의에 눈뜸. 1920년대 초 신민계(한자는??) 설립으로부터 시작. 대만인에
대한 차별을 법에 새겨 넣은 법63조 철회 및 대만에 대만인에 의한 국회 설립(à 자치 운동)을 위한 탄원을 일정부에 총 15번 제출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었고, 대만의 반식민주의를 지지하는
중국인들과의 연대도 큰 성과 없었고.
ü 개량주의자들과
중국의 관계: 일본은 대만과 중국을 서로 절연시키기 위해 노력함. 이런
상황에서 대만 개량주의자들은 중국과의 연대를 꾀함. 대만섬 인구의 80프로
이상이 대륙 한족이었으므로 자기 정체성을 중국인이라고 생각 했고. 그러나 중국인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만이 중국이면서도 후진적인 중국이라고 생각한 것. 이 후진성은 보존해야 할 것인 아니라 벗어나야
하는 것이야. 그래서 이 후진성을 벗어나 ‘선진적인’ 중국인이 되는 것을 원했고, 그 방법으로 (정치적 좌절이 명백해지면서) 학교,
강연, 세미나 등 통해 대만인들 계몽 교육하는 데 힘을 기울임.
그러나 중국과의 결합을 정말 원했나 하면 그것도 아님. 그런 당당한 중국인이 됨으로써 정말 중국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기 보다는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함으로써 일본인과 차별받지 않는 상태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보아야 함. 개량주의자들의 반-식민활동
많이 알려져 있는 이유는 이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했기 때문. 이들의 활동은 일-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라서 공식적 활동이 가능했어. 반면
급진적 반-식민주의자들의 경험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도전했고 그렇기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ü 급진적 반-식민주의: 이들은 개량주의자들의 자치 운동에 절대 반대했어. 그건 식민상태를 영속화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 1920년대 초 도쿄에 있었던 대만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바람이 불었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대만 학생들의 사회주의
운동 조직이 생겨남 (정식 조직은 1927년에 도쿄에서). 이들이 사회주의에 끌린 이유는 사회주의가 약소민족의 해방을 주장했기 때문이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당시 큰 영향 미쳤고.) 이들이 보기에 일본은
중국과 대만의 공통의 적. 대만은 중국, 한국, 필리핀, 인도와 같이 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는 약소민족국가. 그니까 이들은 이미 대만을 정치적으로 하나의 구별되는 민족으로서 본 것인데, 사실
이 견해는 당시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만에 대한 시각과 다르지 않았어. 중국이 대만을 자신들에게 귀속해야
할 자신들의 일부라고 천명한 것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야.
ü 대만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시각은 양측이 완전히 달랐지만 양측 다 대만 문화의 고유함을 두드러지게 주장하지는 않았고 또 그 문화적 고유함을 정치적 행동의 이유로서 제시하지도
않았어. 대만 문화의 특수함이 문제가 된 것은 이런 양측의 정치 운동이 모두 철벽 탄압당하고 난 뒤인
1930년대에 일어난 문화 논쟁에서야. 이 두 논쟁은 하나의 동전의
양면. 하나는 문학을 대만 문화의 특수성을 재현하는 지적 활동으로 보았고, 다른 하나는 이 문학적 재현의 툴로써 언어를 본 것이지.